불굴의 ‘코리안 특급’‘최후의 꿈’을 향해 뛴다
  • 민훈기 | 미국 메이저리그 전문 해설가 ()
  • 승인 2009.11.02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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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젊은 시절의 목표 ‘월드시리즈 무대’에 우뚝

▲ 10월21일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승리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박찬호 선수가 샴페인을 뿌리고 있다. ⓒ연합뉴스

박찬호(36ㆍ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집념이 대단한 선수이다. 또, 운도 따르는 선수이다. 지난 1994년 한양대 2학년생이던 박찬호라는 투수가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계약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야구계의 반응은 싸늘했었다. 당시만 해도 메이저리그는 넘볼 수 없는 벽이었고, 따라서 국내 대학 야구에서도 최정상급으로 평가받지는 못하던 그가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자질에 변함없이 성실한 훈련 자세 그리고 그를 인정하고 믿어 준 팀과 구단주가 밀어주는 행운까지 겹치면서 박찬호는 빅리그 100승 투수가 되었고, 이제 만 36세에 메이저리그(MLB)에서도 최고봉인 월드시리즈(WS)에 진출하는 기회를 잡았다.

메이저리그를 거쳐간 수많은 야구 영웅 중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보지 못하거나, 아예 무대도 밟아보지 못한 선수들은 수없이 많다. 새미소사, 켄 그리프 주니어, 라파엘 팔메이로, 어니 뱅크스 등의 대선수들이 WS 무대를 밟아보지도 못했다.

한국 선수들 중에 WS 무대를 밟아보고 또 우승 반지를 낀 선수는 딱 한 명, 김병현뿐이다. 김병현은 애리조나와 보스턴에서 각각 WS 우승 반지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 박찬호가 드디어 ‘가을의 고전’으로 불리는 프로야구 최대의 무대인 월드시리즈 그라운드를 밟게 된 것이다.

미국 야구에 도전하면서 박찬호는 세 가지 꿈을 가지고 태평양을 건넜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던 그는 ‘200-40-WS’의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MLB에서 2백승을 거두고 마흔이 될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하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2백승은 텍사스 시절 오랜 부상과 부진을 겪으면서 불가능해졌지만, 고질적인 허리 부상과 장출혈에 이은 탈장 수술, 35세에 마이너리그 생활 등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찬호는 결국 재기해 40세 현역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인 월드시리즈 진출도 우여곡절 끝에 참 멀고도 험한 길을 지나 결국은 이루어냈다.

미국 생활 초반 박찬호는 포스트시즌과는 크게 인연이 없었다. 빅리그 풀타임으로 처음 뛴 1996년, 다저스는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했고, 루키 박찬호도 로스터에 포함되었지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3연패로 패하는 동안에 박찬호는 단 한 번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필자는 당시 스포츠조선 특파원으로 애틀랜타와 LA를 오가며 취재를 했는데, 박찬호가 한 번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해 허탈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다저스에서 시즌 평균 15승 이상을 거두면서 맹활약 하는 동안에도 포스트시즌에서 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FA가 되면서 5년 계약으로 텍사스로 이적하며 새로운 꿈을 키웠지만 역시 포스트시즌은 멀기만 했다.

결국, 박찬호가 다시 포스트시즌 마운드에 서기까지는 만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지난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유니폼을 입고서야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것이다. 물론 당시도 쉽지는 않았다. 그해 8월 초 장출혈이 오면서 선수 생활의 갈림길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큰 수술을 거친 그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시즌 막판에 복귀했고, 브루스 보치 감독은 디비전 시리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 구원투수로 박찬호를 전격 투입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등판 후 팀은 탈락했고,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그리고 2007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박찬호는 포기하지 않았고, 2008년 친정팀 다저스로 복귀해 놀랍게 재기하며 팀의 NL 서부조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이번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NLCS에서 4경기에 등판했다. 총 1, 2이닝 동안 1안타 무실점의 호투에도 팀이 무력하게 패하고 말아 WS 진출 코앞에서 분루를 삼켜야했다. 지난겨울 다시 FA가 된 박찬호는 다저스가 잡지 않은 대신에 필라델피아와 1년 계약을 맺었다. 선발투수의 기회를 보장받은 것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가장 큰 이유였다.

시즌 초반 선발로 자리 잡는 데 실패한 박찬호는 구원투수로 변신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챨리 매누엘 감독은 7, 8회의 긴박한 상황에 박찬호를 주저 없이 투입하며 신뢰감을 보였다. 필리스의 NL 동부조 우승이 굳어지면서 박찬호는 다시 WS를 꿈꿨지만 이번에는 햄스트링 부상이 왔다.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NLDS) 출전 명단에 들지 못하며 포스트시즌과의 악연이 계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플로리다에서 한 달간의 혹독한 재활을 견뎌낸 박찬호는 친정팀 다저스와의 NLCS에서 거침없는 맹활약을 해 필리스가 승리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박찬호, 뉴욕 양키스에 강한 전적 가져…옛 명성 되살릴 기회 될 수도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프로야구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 필리스 대 LA다저스 경기에서 박찬호 선수가 역투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히 가장 중요했던 1차전에서 1점 차로 앞선 가운데 7회 말 노아웃 주자 2루에서 나와 다저스 클린업 트리오를 틀어막고 승리를 지켰다. 4차전에서는 1점 차로 리드당한 가운데 7회를 무실점으로 막고 역전극의 서막을 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야구에 도전한 지 16년 만에 박찬호는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게 되었다. 처음에는 디비전 시리즈에 나갔지만 등판도 하지 못했고, 10년 후 두 번째 기회에서는 디비전 시리즈에 딱한 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다시 2년 후에는 리그 챔피언십까지 진출했다가 이번에 4번째 기회에서 WS 무대를 밟아보는 감격을 누린 것이다.

이번 1백5번째 WS에서는 지난해 챔피언 필리스와 27번째 WS 우승을 노리는 최강팀 뉴욕 양키스가 만났다. 10월29일 열린 1차전에서는 필리스 선발 클리프 리가 완투하며 6 대 1 승리를 이끌어 박찬호에게는 등판할 기회가 없었다.

양키스 라인업을 보면 조니 데이먼, 마쓰이 히데키, 로빈슨 카노가 왼손 타자이고 마크 터셰어러, 호르헤 포사다, 닉 스위셔, 멜키 카브레라는 스위치 타자이다. 그래서 우완 박찬호는 결정적인 순간에 양키스의 최고 파워 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34ㆍ애칭 에이로드)와 양키스 주장 데릭 지터(35)와 맞대결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박찬호는 통산 양키스와는 4번 만나 2승 무패에 3.38로 강했다.


필리스가 1976년 신시내티 레즈 이후 NL 팀으로는 최초로 2연패를 달성하려면 반드시 양키스를 꺾어야 하고, 양키스를 꺾으려면 에이로드와 지터를 봉쇄해야 한다. 박찬호가 ‘코리안 특급’의 명성을 되살리는 활약을 펼친다면 필리스의 2연패와 함께 숙원이던 WS 우승 반지를 낄 가능성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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