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권력 승계’ 시곗바늘은 돈다
  • 이승열 |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 ()
  • 승인 2009.12.08 16: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한, 후계 논의 중단설 불구 ‘김정은 영웅화’ 착착 진행…‘차별화된 지도자’ 부각에도 애써

▲ 지난 9월9일 평양 시민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61주년을 기념해 평양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 주석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

지난 9월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일본 교토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현 시점에서 후계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라고 단언했다. 발언 의도와는 달리, 사실상 북한 최고위 당국자의 입을 통해 북한 내에서 후계 체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밝힌 최초의 공식적인 언급이었다. 

북한에서 김정은 후계 체제 작업은 지난해 11월부터 본격화되었지만, 올해 7월부터 이상 징후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이 모든 후계 논의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김정은에 대한 선전 활동 또한 중단시켰다”라는 보도가 연이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북한 노동당 인사와 관련해 김정일과 김정은 사이의 불협화음설이 전해지기도 하고, 건강에 자신감을 되찾은 김정일이 후계 논의를 더 이상 확산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등의 소문들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하지만 이는 남한 및 국제 사회를 향한 대외 선전용에 불과했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후계 작업이 상당히 진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11월29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4월 원산을 방문했을 때 김정은을 동행시켰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사실 그동안 김정은이 김위원장의 현지 지도에 동행하고 있다는 추측은  지난해 11월부터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이번처럼 공식적인 문서로 작성되어 공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2009년 9월18일 타이완의 사진작가 후앙 한밍 씨가 강원도 원산에서 찍었다고 공개한 선전 벽보 또한 이미 주민들 사이에 후계자 김정은에 대한 내부 교양과 선전 작업이 매우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이에 앞서 지난 9월에도 마이니치 신문은 ‘김정은에 대한 북한 내부의 중요한 문건을 입수했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일본에서 입수되고 있는 이같은 문건에는 과연 김정은에 대해 어떤 내용들이 적혀 있을까. 이 문건에는 김정은을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는 절세의 위인이시며, 백전백승 강철의 영장이신 어버이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꼭 빼닮은 선군 영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상 북한 내부에서 김일성-김정일에 이은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은 이미 공식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건의 내용을 보면 김정은의 ‘영웅화’ 작업이 상당히 가속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높은 군사 과학기술은 물론 군사적 안목에서의 실력에 대해서도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걸출한 위인’이라는 표현처럼 김정은을 다재다능하고 현대 군사 과학과 기술에 정통한 천재로 묘사하고 있다. ‘광명성 2호’를 발사할 당시에도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과 함께 현지 시찰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차별화된 차세대 지도자임을 부각시키려는 흔적이 역력한 셈이다.

화폐 개혁은 후계 구도보다 김정일 체제 강화용인 듯

또한 ‘영도의 계승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혁명의 승패와 민족 존망에 관련된 제일 중대사이며, 열쇠다’라는 표현처럼 순조로운 후계 체제 확립에 상당히 고심하는 대목도 엿볼 수 있다.  ‘김정은 대장 동지의 영도적 기반을 굳건히 하는 사업이 다름 아닌 경애하는 장군님의 영군 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사업’이라거나, ‘대를 이어 계승되는 충실성만이 진정한 충실성’이라는 표현 등이 그것이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김정은에게 ‘백전노장’이라는 표현을 유독 많이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에 대한 주변의 우려를 의식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정은 후계 구도를 놓고 북한의 목소리에는 왜 이처럼 혼선이 빚어지는 것일까. 이는 후계 체제의 등장 자체가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위원장에게는 정치적으로 서로 상충하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다. 즉, 후계자의 등장이 선임 수령의 권력 약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북한 후계 체제의 정치적 특성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위원장에게 후계 체제는 ‘계륵’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무작정 서두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늦출 수만도 없다.

북한이 후계 문제를 서두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의 협상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후계 논의는 후계자 문제의 정치적 특성상 김정일의 통치력 약화로 비화되었다.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후계 체제 등장에 따른 논란 확대는 오히려 북한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6자회담보다 북·미 양자회담으로 협상 전략을 수정해야 할 김위원장의 입장에서는 협상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로 전락되었고, 오히려 국제 사회의 강력한 제재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위원장 스스로가 후계를 마냥 늦출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북한의 후계자 선정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수령이 살아 있는 동안 후계자를 선정하도록 관례화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현 시점에서 후계 체제를 진행시키지 않을 수 없다. 

권력 누수 없는 조용한 후계 체제를 위해서는 김정일 체제의 강화가 후계 체제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요건이 된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와 ‘비핵화’ 협상을 앞둔 상황에서 김위원장이 건재하다는 사실은 협상뿐만 아니라 후계 체제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 지난 11월30일 단행된 북한의 화폐 개혁은 바로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화폐 개혁이 ‘3대 권력 세습’을 앞두고 체제 단속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하지만, 그보다는 김정일 체제에 위협이 되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척결하고 특히 주민들 간의 계층 분화를 촉발할 수 있는 신흥 자본가들의 돈을 몰수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즉, 후계 체제를 위한 체제 강화용이 아니라 김위원장의 통치 체제 강화가 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북한의 화폐 개혁은 궁극적으로 김정일 체제뿐만 아니라 향후 후계 체제 구축 과정에서 김정은에 대한 주민들의 ‘자발적 동인’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체제 안정을 위해 선택한 김위원장의 결정이 최대의 체제 불안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