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체제로 가는 길’ 빗장 풀리는가
  • 서보혁 | 이화여대 평화학연구소 연구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09.12.2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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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즈워스 방북 이후 북·미 관계 / ‘한반도 비핵화 이행’과 연결시키는 작업 치열하게 전개될 듯

▲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1월19일 청와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2월8일 보즈워스 미국 대북 정책 특별대표의 북한 방문으로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의 방북은 2002년 10월 부시 행정부 당시 켈리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 이후 최고위급 방문이었다. 경색된 분위기에서 북한을 압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켈리 차관보의 방북과는 뚜렷하게 대조를 보였다. 보즈워스 대표의 방북은 바야흐로 ‘대북 제재 국면’에서 ‘대화 국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시점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보즈워스 대표는 방북 이후 서울을 시작으로 6자회담 참가국들을 돌면서 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6자회담을 재개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모스크바를 마지막으로 한 그의 방북 설명 행보는 긍정적인 방북 결과를 바탕으로 6자회담 재개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북한을 다녀온 뒤 보즈워스 대표는 “6자회담이 가능한 한 빨리 열릴 것을 희망한다”라는 뜻을 여러 번 밝혔다. 그는 특히 12월14일 모스크바에서 보로다브킨 러시아 외무차관과 회동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평양 방문에서 가진 북한 관리들과의 대화가 솔직하고 이성적이었으며,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는 데 고무되었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6자회담 참가 5개국이 이미 평화조약 체결을 향한 협의에 착수했다(are already committed to negotiate toward the establishment of a peace treaty on the Korean Peninsula)”라고 언급했다. 이 둘을 연결하면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조치 혹은 복귀 명분으로 평화조약 체결 논의에 응할 수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보즈워스 대표의 말을 빌리면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 6자회담 당사국의 관계 정상화와 경제 지원 등 9·19 공동성명의 모든 요소의 완전 이행’에 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북한도 12월11일 보즈워스와 논의한 사안들이 이와 같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평화체제 논의와 관련해서 보즈워스 대표는 “6자회담 당사국들은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언젠가는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6자회담이 재개되면 비핵화에 대한 논의에 추진력이 생기고 우리 모두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할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리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과 보즈워스 대표의 상호 방문을 통해 확인한 새로운 사실은, 양국 대표들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북핵 문제 해결과 평화협정 체제가 다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 및 관계 정상화를, 미국은 북핵 문제 해결을 각각 우선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보즈워스 대표의 방북에서 양측이 논의한 사안을 보면, 단순히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그 유인 조치로써 대북 지원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까지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보즈워스 대표가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를 북측에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런 전망을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6자회담 재개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12월12일 태국에서 북한산 무기를 적재한 수송기가 억류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6자회담의 앞길이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평화체제 관련 사안들이 당사국들에 따라 달리 설정되면 ‘난항’

▲ 지난 1월21일 평양 시민들이 겨울 추위 속에 보통강 강바닥 준설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평화체제와 관련한 공식 논의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2000년 10월12일 발표된 ‘북·미 공동 커뮤니케’를 꼽을 수 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워싱턴에 가서 미국측과 채택한 이 성명은 ‘북·미 관계 정상화, 정전협정의 평화 보장 체계로의 전환을 통한 한국전쟁의 종식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2005년 9월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북한의 핵 포기에 상응해 미국 등 나머지 다섯 개 국가가 북한에 안전 보장, 관계 정상화, 인도적 지원, 경제 협력 등과 같은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9·19 공동성명의 이행에 북·미가 공감한 것은 이 성명이 쌍방의 이해관계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비핵화 이행 초기 단계 조치(핵시설 폐쇄)를 담은 ‘2·13 합의’는 북한의 비핵화 이행 조치에 따라 대북 에너지 지원과 북·미, 북·일 간 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화를 개시한다는 데 합의한 것이었다. 미국이 보즈워스 대표의 방북을 6자회담의 틀 속에서 바라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한편, 2007년 비핵화 2단계 조치(핵 불능화)를 담은 ‘10·3 합의’ 다음 날인 10월4일 발표된 남북 정상 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해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10·4 정상선언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에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공감대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 선언에서는 나아가 3자 혹은 4자 정상에 의한 한국전쟁 종전 선언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사실 2005년부터 한·미 간에는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데에서 우선 한국전쟁의 종료를 선언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한반도 평화체제와 관련한 기존 논의를 종합해보면, 당사자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으로 볼 수 있다. 9·19 공동성명은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무르익었을 시기는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모두 양호했던 때였다. 2000년 남북 6·15 공동 선언과 북미 공동 커뮤니케, 2007년 10·3 합의와 10·4 남북 정상 선언이 모두 이런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단순히 평화협정 체결로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신뢰 구축과 군축 등 실질적 조치가 필요하고, 그에 앞서 한반도에서 비핵화를 달성하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에 복잡한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예상 탓이다. 또, 종전 선언과 북·미, 북·일 간의 관계 정상화도 평화체제 수립에 필요한 선결 과제이다. 요컨대 평화체제와 관련한 각각의 사안들마다 당사국들이 달리 설정될 수 있다.

앞으로 한반도 정세는 비핵화 이행과 평화체제 수립을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이는 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 비핵화 문제가 선후가 아니라 병행 과제임을 전제로 한다. 그 과정에서 남한은 당사자 자격을 구체적인 역할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지상 과제가 남북 대화와 미국 등 주변국들과의 협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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