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 족집게’, 알고 보니 ‘첨단 도둑’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01.26 15:5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원 강사가 국가 간 시차 이용해 시험 문제 빼내 유출…유사 사례 더 있을 듯

▲ SAT 시험 문제를 유출한 학원 강사가 구속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시사저널 박은숙

해마다 6월과 12월 방학 때가 되면 서울 강남의 학원가는 유학생들로 북적거린다. 미국 등 북미 지역의 유학생들이 국내 SAT(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 학원의 강좌를 듣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들기 때문이다. 특목고 국제반이나 미국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인 국내 학생들도 이곳 학원가로 몰려든다. 때문에 SAT 전문 학원은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때 최대 성수기를 맞는다. 이때를 겨냥해 학원과 강사들은 각종 ‘특강’을 신설하거나 비공식적인 ‘VIP 그룹’을 만들어 고액 강의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최근 강남 학원가에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다. 얼마 전에 터진 ‘SAT 시험 부정’ 사건이 터지면서 학원들은 경찰 수사가 확대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번 SAT 부정 사건을 보면 지난해 7월에 있었던 ‘토익 시험 부정 사건’과 흡사하다. 토익 시험 부정에 초소형 무전기 등 첨단 기기가 동원되었다면 이번에는 국가 간 시차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서울 강남의 유명 SAT 전문 학원인 E어학원 강사인 김 아무개씨(38)는 지난해 1월24일 태국 방콕에서 현지 수험생에게 50바트(한화 약 1만5천원)를 주고 SAT 시험지를 구입했다. 이후 김씨는 인근 PC방으로 가 이 시험지 내용을 미국에서 SAT를 준비하던 김 아무개군(19)과 이 아무개군(19)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시험 시작 전에 문제를 넘겨받은 두 사람은 만점(2천4백점)에 가까운 고득점을 받았다. 태국과 미국이 12시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유층 자녀들인 이들 두 명은 현재 미국 코네티컷 주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10여 곳의 대학에 입학 원서를 제출한 상태라고 한다. 경찰은 이들을 조사하기 위해 출석을 종용하고 있지만, 비협조적이어서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김군과 이군은 E어학원에서 김씨에게 SAT 강의를 받은 수강생들이었다. 당시 수강생은 두 사람을 포함해 20명 정도였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이번에 범행이 들통 난 것은 실력이 떨어지는 두 사람이 좋은 점수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한 수강생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두 사람이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여기저기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얘기가 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수사가 시작되었고 범행이 드러난 것이다. 돈을 노린 학원과 강사 그리고 돈으로 점수를 따려는 유학생들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져 발생한 사건이다. 경찰은 김씨가 또 다른 학생들에게 문제를 유출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시험 부정 사건은 학원가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김씨가 근무했던 E어학원은 SAT 학원으로 업계 1·2위를 다툴 정도였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시즌에는 학원을 찾는 유학생들로 붐볐다고 한다. 김씨 또한 강남 학원가에서는 ‘족집게’로 통했다. 김씨의 고득점 비결은 ‘시험 문제 유출’이라는 부정행위였다.

그는 지난 2006년까지는 직접 SAT 시험에 응시해서 기출 문제를 빼냈고, 이것을 토대로 강의 교재를 만들었다. 한 문제라도 더 빼내기 위해 자신의 부인까지 시험에 응시하게 했을 정도로 시험 문제 유출에 집착했다. 김씨는 유출한 시험 문제를 밑천으로 강의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지난 2007년 미국교육평가원(ETS)은 자주 응시하는 김씨를 이상하게 여겨 응시 자격을 박탈하기도 했다. 그 뒤 김씨가 새로 고안해낸 수법이 바로 시차를 이용해서 시험 문제를 빼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김씨가 빼낸 시험 문제지는 든든한 장사 밑천이 되었다. 그는 1회 강의에 학생 1인당 30만원을 받았다. 1인당 한 달에 약 10회를 강의하고, 3백만원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달 수입이 수천만 원에 달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김씨는 경찰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해고될 것 같아 문제지를 빼돌렸다”라고 말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 그보다는 ‘족집게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상습적으로 부정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 건넨 대가로 거액 받았을 가능성 조사

▲ ⓒ연합뉴스
그렇다면 SAT 시험 부정이 김씨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경찰과 교육 당국에서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지만 학원가에서는 새삼스럽지 않다는 분위기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강남의 학원가에는 ‘SAT 시험지 유출’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구체적인 학원명과 강사 이름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어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07년 2월, 미국에서는 그해 1월 한국에서 치러진 SAT 시험에 대한 ‘사전 유출’ 의혹이 제기되었었다. 당시 뉴욕타임스, AP통신 등 미국 언론들은 “2005년 12월 응시생들에게 출제되었던 문제들이 올해 시험에 그대로 나와 사전에 문제지를 본 응시생들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라며 한국의 SAT 시험의 문제점을 크게 보도했었다.

시험이 끝난 후에 수험생들은 출제 문제 상당수가 “한국 내 몇몇 학원에서 치른 모의고사 문제와 거의 일치했다”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학부모들이 미국의 칼리지 보드에 이메일과 전화, 팩스 등을 통해 사전 유출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의혹이 더욱 확대되었다. 이번 부정 사건이 터진 후 ETS측은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한국에서의 시험 횟수 축소 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SAT 학원가에 부정이 만연한 것은 학원 간의 과열 경쟁이 주요 원인이다. SAT 학원이 늘어나면서 학원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입소문을 타기 위해 ‘족집게 강사 모시기’에 경쟁적으로 나섰고, ‘스타 강사’가 되려는 강사들에게 ‘시험 부정’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되고 있다.

서울 강남 지역의 한 SAT학원 원장은 “우리 학원의 경우 교과 과정 차별화와 철저한 개인 관리를 위해 다양한 학습 방법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강사들의 경우도 영어 실력·글쓰기 능력·현장 경험 등을 갖춘 검증된 강사들을 높은 가격에 영입하고 있다. 그런데도 부정을 통해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학원이나 강사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수서경찰서는 사설 어학원 등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수서경찰서 지능수사팀 관계자는 “학원과 학부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은밀한 불법 고액 과외’ 사례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단속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김씨가 문제를 건넨 대가로 학부모들로부터 거액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학부모들은 대부분 강남의 부유층 인사들로 알려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