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이중 생활 베일 벗은 대학 강사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10.01.2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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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판결문으로 드러난 ‘신세대 엘리트 간첩’ 이 아무개씨의 행적

ⓒ일러스트 이경국

지난 1월13일 수원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이 아무개씨(37). 경기도에 있는 한 대학에서 경찰경호행정학과 강사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10월 말 공안 당국에 체포되어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당시 검찰은 해외 유학생 시절에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된 전형적인 ‘장기 우회 침투 간첩’이며, 조선노동당 공작금으로 학업을 계속한 ‘장학생형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이씨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자문위원과 통일교육원 통일교육위원을 역임하는 등 여론 주도층 인사라는 사실이 알려져 주목되기도 했다.

이른바 ‘신세대 엘리트 간첩’인 그는 왜 간첩이 되었고, 체포되기까지 지난 17년 동안 어떻게 활동한 것일까. 판결문을 통해 이씨의 드라마 같은 인생을 추적했다.

이씨는 19세 무렵인 1991년 8월부터 인도 델리 대학교 람자스 칼리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인도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리 아무개씨를 만난 것은 이듬해인 1992년 10월이었다. 리씨는 북한의 대남공작 부서 중 하나인 이른바 ‘35호실’ 소속의 핵심 공작원이었다. 이씨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리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북한 평양에도 두 차례나 다녀왔다. 입북 권유를 받은 이씨는 1993년 6월, 한국에서 홍콩을 경유해 베이징에 도착한 후 리씨와 만나 고려항공 편으로 평양에 들어갔다. 여권은 리씨가 제공한 다른 이름으로 된 북한 공무여권을 사용했다.

이씨는 평양 고려호텔과 대동강초대소 등에서 체류하며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국장이 주재한 입북 환영 행사에 참여했다. 이후 서해갑문과 만경대 등을 관광한 그는, 북한을 떠나기 전 조평통 국장이 연 환송식에서 양복과 구두 그리고 오메가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

두 번째 입북은 인도에서 출발했다. 1994년 6월 중순, 이씨는 인도에서 네팔 카트만두로 간 다음 태국과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에 들어갔다. 그는 첫 번째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대동강초대소에 머무르면서 안내요원의 요청에 따라 북한 조선노동당 입당원서와 충성 서약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당원증은 북한측에서 보관하겠다는 말을 듣고 돌려주었다.

이씨가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95년 10월 중순. 이씨는 귀국 이후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등 바쁜 일정으로 인해 한동안 리씨와 연락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7년 봄,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부탁하는 리씨의 영문 편지를 받았다. 그해 7월 중순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리씨를 만난 그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상황과 군 입대 문제 등을 보고했다. 이씨는 여비 명목으로 미화 3백 달러와 함께 변경된 연락처를 받았다.

여당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기밀 유출

군 복무 기간에도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씨는 1998년 10월 학사장교로 임관해 2000년 1월부터 2001년 9월까지 육군에서 정훈장교로 복무했다. 이 기간에 그는 부대 참모들의 연락처가 담긴 ‘백두산 훈련 전화번호부’, 육군의 야전 교범인 ‘지상작전’, 미국 육군의 전투 수행 교범인 ‘미 작전요무령’ 등의 문건 파일을 입수했다. 이 자료를 CD 한 장에 담아 군 제대 직후인 2002년 1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리씨에게 전달했다. 이번에는 활동 경비 명목으로 미화 5천 달러를 받았다.

이들의 만남은 1년에 한 번 정도 이어졌다. 이씨는 2003년 2월 싱가포르에서 군사 자료를 입수해 전달한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 당국으로부터 ‘노력훈장’과 ‘훈장증’을 수여받았다. 물론 국내로 가져오지는 못했다. 이씨는 통일이 되면 돌려주겠다는 말을 듣고 훈장을 반납했다.

이후 연락 방법이 바뀌었다. 이씨는 공중전화를 이용해 약속된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했다. 두 달에 한 번가량 신변에 이상이 없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2004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리씨를 다시 만났다. 출국 전에 미리 구입한 국내 서적과 군사 관련 잡지 등을 전달했다. 그는 또 한 정당의 당원으로 가입한 사실을 보고했고, 이에 리씨는 정계 인사를 많이 사귀어두라고 지시했다. 이번에는 활동 경비 명목으로 미화 1만 달러를 받은 후 영수증을 작성해 주었다.

1년 뒤인 2005년 6월에도 베이징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씨는 정당의 대의원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2학기부터는 서울에 있는 K대학에 시간강사로 강의할 예정이라고 보고했다. 또, 출국 전에 국회도서관에서 복사해 온 군사·정치 분야 잡지를 전달했다. 국내 정치·경제·안보와 관련한 비공개 자료 수집을 지시받은 그는 휴대전화 번호와 이메일 주소 등 새로운 연락처를 제공받았다. 활동 경비 명목으로 미화 5천 달러를 받았다.

이씨는 예비군 동원훈련을 받으면서도 정보 수집에 나섰다. 2005년 8월 경기도 용인시에서 훈련을 받던 중 정훈장교실에 들러 후배 장교에게 동대 소대장이 되려고 하는 데 필요하다며, 예비군 부대 및 지휘관 현황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신을 믿은 후배 장교로부터 예비군 편제와 지휘관 연락처 등이 기재된 ‘예비군 부대 및 지휘관 현황’ 자료를 넘겨받았다.

2006년 2월에는 자신이 소속된 정당 당원협의회의 소식지 편집 업무차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회 의원회관 내 한 의원 사무실을 방문했다. 여기서 해외 42개국에 근무 중인 66명의 무관들에 대한 정보가 기재된 ‘주외 무관 명단’을 몰래 가지고 나왔다. 이씨는 같은 해 7월부터 민주평통 지역협의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2006년 3월 국가정보원(국정원) 청사 내에서 민주평통 수도권 지역 자문위원 76명을 대상으로 개최된 ‘안보정세설명회’에 참석했다. 이날 설명회 내용은 국정원이 3급 비밀로 분류해 관리하는 자료였다. 이씨는 직원으로부터 일체의 장비를 반입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듣고도 미리 숨겨온 휴대용 녹음기로 강연 내용 등을 녹음했다.

이 자료들은 이듬해인 2006년 6월 태국에서 만난 리씨에게 건네졌다. 이씨는 노트북에 저장해 온 각종 문건 파일과 GPS 지형도 데이터 등을 리씨의 USB 메모리로 옮긴 후 전달했다. 앞으로 실시간으로 자료를 전달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달라는 요청에 이씨는 자신의 웹하드 ID와 비밀번호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주어 자료를 공유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번에는 1만 달러의 활동 경비를 받았다.

 이후 이씨는 GPS 기기를 이용해 군부대 시설을 포함해 국회의사당, 미국 대사관, 수원 공군비행장 등 주요 국가 시설의 좌표값을 입력해 저장했다. 청평댐 전경 등도 촬영했다. 2007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리씨를 만난 그는 청와대 국정홍보실, 민주평통 등에서 입수한 문건 파일과 GPS 좌표 자료 파일을 전달했다. 활동 경비는 역시 1만 달러였다.

마지막 만남은 2009년 2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씨는 북측 공작원으로부터 국회의원이나 시장 등 정계로 진출할 방법을 모색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 보라는 요청이었다. 미화 5천 달러를 활동 경비 명목으로 받은 그는 이틀간 캄보디아에서 더 머무른 후 귀국했다.

이후 연락은 주로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졌다. 새로운 연락책과 신변 안전을 묻고 답했다. 그러던 중 2009년 8월 이씨는 더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날씨가 덥다. 나는 감기에 걸렸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연락책에게 발송했다. 17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감추어 온 간첩 생활을 마침내 마감하게 된 것이다. 이때쯤 이씨는 자신에게 수사망이 좁혀 오고 있음을 눈치챘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정보원이 이씨를 검거했다고 발표한 것은 지난해 10월23일이었다. 이씨에 대한 변호를 맡고 있는 임 아무개 변호사측 관계자는 “이씨 사건과 관련해 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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