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의 사람들’ 학맥의 기원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2.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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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에 위치한 경남고등학교. ⓒ경남고등학교 제공


부산·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고교는 단연 경남고와 부산고이다. 고교 평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태어난 수많은 인재들이 이 두 학교에서 청운의 꿈을 키우며 성장했다.  

대개 어느 지방에서 명문 고등학교라고 하면 특정 학교 하나가 우뚝 서 돋보이게 마련인데, ‘PK(부산·경남)’ 지역의 이 두 학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때로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두 학교는 야구 실력도 백중이다. 두 학교 간에 야구 경기가 열리면 치열한 응원전이 펼쳐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출향(出鄕)한 이들은 하나로 뭉쳐지곤 한다. ‘동향(同鄕)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두 학교의 재경 동창회가 서로 여의도 소재 동북빌딩 내 4층과 5층에 의좋게 들어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경남중·부산중을 교차해서 다닌 경우도 종종 있고, 초등학교 선후배 관계로 얽혀서 형님·아우 하며 가까이 지내는 사례도 많다. 중학교만 현지에서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한 이들도 모두 동창으로 받아들인다. 김석동 전 재정경제부 1차관(경기고)이나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경기고)이 그런 경우이다. 경남중과 부산고를 다닌 허태열 의원은 경남고와 부산고 동창 명부에 모두 이름이 올라 있다.

두 학교는 나름의 강점과 특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력으로 볼 때도 백중지세·용호상박이다. 따라서 두 학교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부질없는 일로 보인다. 이렇게 쌍벽을 이루는 두 학교의 위상을 감안해 편의상 가나다 순으로 경남고를 먼저 소개하고 부산고는 다음 호에 싣기로 한다.

1942년 4월 ‘부산제2공립중학교’로 개교한 경남고등학교가 터를 잡은 동네인 부산 서구 동대신동은 부산 지역 부(富)의 축이 신시가지로 옮겨가기 전까지만 해도 고급 주택가로 꼽히던 곳이다. 그러다 보니 경남중·고는 부잣집에서 성장하고 얼굴에 윤기가 도는 머리 좋은 아이들이 많이 입학하는 학교로 알려져왔다. 경남 각처의 시골 수재들이 모여든다는 부산고와는 이런 점에서 대비되곤 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경남고 출신들은 비교적 세련되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보이며 사업가나 교수, 의사 같은 자유 직종에서 많이 활동하고 재계에 인물이 많다.

경남고 출신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작지 않다. 1992년 대선을 며칠 앞둔 12월11일 오전 7시. 부산 시내 대연동 소재 초원복집 별실. 이른 아침 서둘러 집을 나온 지역 기관장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김기춘 법무부장관을 필두로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룡 부산지방경찰청장, 정경식 부산지검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부산지구 보안대장, 우명수 부산시 교육감,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장. 이들이 민자당 후보였던 김영삼(YS)씨를 당선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지역 감정을 앞세워 정주영·김대중 씨 등 야당 후보들을 흠집내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것. 그런데 이 조찬 회의 내용이 정주영 후보의 통일국민당측에 도청당해 그만 언론에 폭로되고 말았다. 정후보측이 민자당의 치부를 폭로하기 위해 전직 안기부 직원들을 매수해 도청 장치를 몰래 숨겨서 대화 내용을 녹음한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후보측은 이 사건을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당시 주류 언론은 “재벌이 권력까지 장악한다면 나라가 큰일 난다”라는 기조로 ‘관권 선거의 부도덕성’보다 ‘주거 침입과 도청의 비열성’에 초점을 맞춰 부각시켰다. 그 결과 통일국민당이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김후보에게는 영남 지지층이 집결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 위해 앞장선 후배들

당시 여기에 관여했던 인사들 중 상당수가 김영삼 후보(3회)와 경남고 선후배 사이였다. 김기춘 법무부장관(12회), 박일룡 부산지방경찰청장(13회), 우명수 부산시 교육감이 그들이다. 우교육감은 경남고 교장과 경남고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대책회의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우리 모두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왔다. 이들이 동문 대통령을 탄생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통령까지 지냈고 씀씀이가 후하다는 평을 듣는 YS 밑으로 정치 문하생들이 모여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2001년 9월11일, 박종웅 전 의원이 김대중 정부의 ‘언론 탄압’에 항의하며 벌인 20일 간의 단식 농성을 끝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날 국회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오래 끌다 보면 죽을 수도 있다”라며 박의원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조선일보·동아일보 양사 사주가 탈세 혐의로 구속되고 1주일이 지난 8월23일, 박의원이 단식을 시작하자 김 전 대통령은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박의원의 안부를 걱정했다. 3선의 박의원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민추협 공동의장 공보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이후 경남고 22년 선배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치 행로를 같이하면서 주로 대언론 홍보를 담당했다. 존경하는 인물로 김 전 대통령을 꼽고 매일 아침 조깅으로 건강 관리를 할 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깊었다.  

 2007년 대선을 전후해 ‘민주연대21’의 회장 자격으로 모임을 이끈 그는 이명박(MB) 대통령이 당선하는 데도 일정 부분 공헌했다. ‘민주연대21’은 YS 측근인 민주계 인사들의 모임으로 이명박(MB) 대통령을 지지했다. 이들은 2007년 11월 남대문 단암빌딩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사무실을 찾아가 이 전 총재의 대선 출마를 반대하는 서한을 전달했는가 하면, 12월1일에는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의 BBK 수사가 잘못되었다며 촛불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MB가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 된 2008년 1월16일에는 ‘이명박 특검’ 사무실 앞에 모여 “특검 수사 조속히 끝내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는 2008년 총선 과정에서 부산 사하 을 선거구 공천을 받지 못했다. 정형근·권철현 전 의원 등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두 사람은 나중에 건강보험공단 이사장과 주일 대사로 기용되었다.

부산 남구 을을 지역구로 둔 김무성 의원은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고로 진학했다. YS에게는 21년 후배가 된다. 그는 친박근혜계의 좌장으로 불린다. ‘좌장’이라는 말은 박 전 대표가 붙여주었다고 한다.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잠깐 동안 기업체 경험을 한 후 정치에 입문해 1987년 통일민주당 13대 대통령 선거대책본부 재정국장과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기조실 차장을 지냈다. 통일민주당은 1979년 12·12와 1980년 5·17을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 세력이 만든 ‘정치 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 활동이 규제되었다가 해금된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고 창당했다. 그러나 양김의 분열로 김영삼 후보는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고, 1990년 1월 통일민주당은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해 민주자유당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흐름 속에 김무성 의원은 14대 김영삼 대통령 후보 보좌역과 당선 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을 거쳐 대통령 비서관과 내무부 차관을 지냈다. 그리고는 15대 국회에 진출해 16-17-18대까지 4선을 기록했으며, 2007년에 이르러 박근혜 후보 경선 대책본부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았다. 그는 1987년 <왜 김영삼이어야 하는가>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문정수 전 의원은 정계 입문 당시 김영삼 의원 비서관을 지냈고, 12-13-14대 의원과 초대 민선 부산시장을 역임했다. 판사 출신 김광일 변호사는 YS 집권 중반에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치 담당 특보를 지냈다. 박찬종 전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정계에 나섰는데, 박대통령 서거 후에는 민주화 세력 쪽으로 돌아섰다가 나중에는 독자 노선을 걸은 경남고 출신 정치인이다.

7대 총동창회장에 취임한 김택수 민주공화당 의원은 김한수 한일합섬 회장과 형제간으로 6-7-9-10대 의원, 원내총무를 지냈고 대한체육회장, KOC 위원장, IOC 위원으로도 활동한 선이 굵은 인물이었다. 1962년부터 작고한 1983년까지 무려 21년 동안 동창회장을 맡아 모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에 앞선 5대 총동창회장이었다.

경남고 출신 법조계 인물 가운데 정치근 전 장관의 경력은 매우 호화롭다. 정치근 변호사는 검사 생활을 주로 서울, 부산, 대구에서 했으며 대검 공안부장과 춘천·부산 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 법무부장관까지 지냈다.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경남고 9년 후배인 김기수 서울고검장을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안우만 법무부장관이 경남고 7년 후배였기 때문에 총장까지 경남고 출신을 기용하겠느냐는 말들이 세간에 나돌았지만, YS는 집권 중반 사정(司正)의 핵심 자리에 후배를 앉혔다.  

 재계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동문들도 많다. 경남고 출신들이 가장 많이 포진하고 있는 기업은 단연 GS그룹이다. 허창수 GS홀딩스 회장을 필두로 상당수가 그룹 계열사를 진두 지휘하고 있다. 허회장의 1년 선배인 서경석 ㈜GS 부회장을 비롯해 김갑렬 GS건설 부회장, 우상용 GS건설 플랜트 총괄사장, 정택근 GS 글로벌 사장(27)의 위치가 탄탄하다. 허회장의 막내 삼촌으로 GS리테일을 이끌고 있는 허승조 부회장과 허회장의 동생인 GS네오텍의 허정수 회장도 있다. 박종구 ㈜삼구 회장과 천신일 ㈜세중 회장이 10년 선후배 간으로서 고려대 교우회장을 대물림했고, 구본홍 전 YTN 사장에서 배석규 현 사장으로 바통이 이어졌다. 천신일 회장은 14대 재경 경남고 동창회장도 지냈다.  

 

 문화예술·체육계에서 두각을 보인 인물 가운데 매우 특이한 경력을 자랑하는 몇몇이 있다. 20회 동문으로 받아들여져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가수 한대수씨는, 경남중을 졸업하고 경남고에 진학한 후 2년 만에 중퇴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롱아일랜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뉴햄프셔 대학 수의학과를 잠시 다녔다. 이후 뉴욕사진학교를 이수했다. 1968년에 가수로 데뷔한 그는, 코리아헤럴드 기자로도 일했고 국전 사진 부문에서 입선도 했다. 사진집을 포함한 몇 편의 저서와 음반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 앨범 재킷에 스물두 살 연하 러시아인 아내의 누드 사진을 싣는 등의 기행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연희단거리패’의 예술감독인 이윤택씨(25회)는 방송 극본, 소설, 시집, 희곡 등 다방면에 걸쳐 엄청난 다작을 남겼다. 체육인으로는 구수한 말솜씨로 야구 팬들을 사로잡는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이 유명하다.

야구의 도시로 불리는 부산 지역의 고교답게 경남고의 야구 전통은 깊다. 경남고 야구부는 2003년 33회 봉황대기대회와 2006년 61회 청룡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팀으로 YS도 모교 야구부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덕형포럼’이라는 경남고 동문들의 모임이 있다. 2007년 12월 발족한 덕형포럼은 성상철 서울대병원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데 “부(산)고에 비해 우리가 너무 결속이 약한 것 아니냐”라는 반성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울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동문 모임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식사를 함께한다. 여기에는 부산고 출신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도 초대되어 강연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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