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계에 뻗은 지역 수재 ‘힘의 원천’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2.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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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시 초량동에 위치한 부산고등학교


부산고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김하득 교장과 육군사관학교로부터 풀어나가야 될 것 같다. 1950년 5월 부산고가 설립되고 김하득 선생이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김교장은 ‘학생들을 사람답게 기른다’를 학교 운영의 목표로 삼았다. 그의 월요일 조례 훈화는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짤막하면서도 논리 정연한 내용이 학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곤 했다. 월요일 아침이면 훈화를 듣기 위해 학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자발적으로 운동장에 모였다.  

지금까지도 그 시절 부산고를 다닌 사람들은 ‘선생님’ 하면 김하득 교장을 떠올릴 만큼 그는 부산고 출신들에게 두고두고 스승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김교장이 공부를 열심히 시킨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서울대 입학률이 전국 랭킹에 들었다.

교통수단이 기차밖에 없었던 시절에 부산고는 초량역 가까이에 위치해 경남 각지의 인재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다. 시골 출신들이 많이 다녔기에 부산고 학생들은 자기네 학교를 ‘초량농고’라고 부르기도 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10회 졸업생들이 재학했던 시기가 부산고의 절정기였다. 학교의 우열을 가리는 지표의 하나인 서울대 입학생 숫자에서 부산고가 경남고를 앞질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김하득 교장이 경남 지역 각 중학교를 돌며 우수 학생의 부산고 진학을 권유한 공이 컸다. 이 10회 동기들이 김진영 전 육참총장, 이상희 전 과기처장관, 정구영 전 검찰총장,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장관, 허삼수 전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작고한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다. 허문도 전 장관과 허삼수 전 사정수석비서관은 허화평 전 국회의원과 함께 5공화국 시절에 권력의 실세로 통했던 ‘3허씨’ 중 2인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소용돌이를 겪으며 ‘우국충정과 구국 일념’에 대한 생각이 깊이 들었던 것일까. 김교장은 학생들에게 육사 진학을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부산고에서 많은 학생이 육사에 입학했다. 그리고 후일 육군 참모총장 세 명을 배출했다. 김진영(육사 17기)·윤용남(육사 19기)·박흥렬(육사 28기) 대장이 그들이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이희원 대장도 부산고 출신이다. 김진영 대장은 하나회원이었다는 점을 비판받기도 하지만, 멋있는 군인이었다는 평도 듣는다. 이희원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육사 27기)과 박흥렬 전 육참총장(육사 28기)은 부산고 20회 동기로서 육사 입교에 1기 차이가 나고 별 네 개를 이대장이 먼저 달았지만 총장 자리에는 박대장이 올라갔다.

부산고 출신들은 이처럼 군을 비롯해 관계·법조계에 다수 포진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중 한 사람인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이동관 대변인과 함께 청와대 내에서 최장수 참모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상희 국립과천과학관 관장은 다채로운 경력을 자랑한다. 부산고를 중퇴한 후 대입 검정고시로 서울대 약학과에 진학한 그는 연이어 약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5공 출범 이후 11대 국회에 진출했고 당 정책위의장, 과학기술처장관, 각종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당·정을 넘나 들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친형인 이진희 전 문공부장관과는 다른 부드러운 이미지를 풍기며 큰 활약을 한 그는 2009년 말에 교육과학기술부 산하의 2급(이사관) 자리인 국립과천과학관 관장으로 부임해 또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동기생들끼리 맞부딪친 강정구 교수 사건

보수 우파의 대표적 논객으로 꼽히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김만복 전 국정원장,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부산고 18회 동기이다. 강교수는 “후삼국 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이 모두 삼한 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6·25 전쟁은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 전쟁”이라는 논리를 펴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학자이다. 그의 구속 문제를 둘러 싸고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부산고 18회의 졸업 40주년이 되는 2005년, 한 언론사의 기자가 기념식장에 세 사람이 모인 장면을 찍으려고 대기했다가 불발로 그친 에피소드도 있다.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무부에서 잠시 근무한 후 경찰에 투신했다. 허준영 전 경찰청장(현 코레일 사장)과 같은 경로를 밟았다. 각지의 경찰서장을 거쳐 경찰청 외사관리관과 경비국장, 부산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서찬교 서울 성북구청장은 1962년 부산고를 졸업하고 막바로 9급 서기보 시험을 쳐 건설부에서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에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국무총리실을 거쳐 서울시에 몸담았다. 구청 국장-부구청장을 거쳐 민선 구청장(3-4기)에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이해성 전 조폐공사 사장은 MBC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청와대에 들어가 홍보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변양균 전 대통령 비서실 정책실장은 5년 후배인 성경륭 한림대 교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밑에서 대통령 비서실의 2인자 자리를 정권 말기까지 채웠고, 변양균 전 실장은 신정아 전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과 연계된 사건으로 2009년 1월 법원 최종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던 박정규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과 동향(김해)이었다. 김해 장유암이라는 암자에서 사법고시 준비를 함께한 사이이다. 노 전 대통령보다 5년 늦게 합격했지만, 공부를 함께하면서 쌓은 인간적 신뢰가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에서 주목되는 부산고 출신으로는 임채진 전 검찰총장이 있다. 임 전 총장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지난 2007년 11월26일,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BBK 사건이 문제가 되고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검찰총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권이 바뀐 뒤 임기를 다 채우기 어려울 것이라는 세간의 시각과는 달리 총장직을 잘 유지하다가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재임 중 “딸이 <월간중앙> 기자인데도 워낙 보안이 철저해 기자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입이 무거운 것으로 유명했다.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하동이 고향인 정구영 전 검찰총장과 초량동의 학교 부근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산청 본가에 가지 못하는 주말이면 서면에 있던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집에 찾아가 하숙 생활에 주린 배를 채웠다고 한다. 정구영 전 총장의 부친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사범학교 동기로 하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최 전 대표는 “실력과 의리 있는 친구들을 만나 사귄 것은 평생의 축복”이라고 회고한다. 김진재 전 의원은 부산 지역에 어마어마한 땅을 가진 갑부였으며, 그가 타계한 후 그의 아들 김세연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정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부 재정 지원 기관인 국방과학연구소에 황경창 개발본부 실장(21회)을 비롯해 15명의 부산고 출신 연구원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도 11명의 부산고 출신 교수가 몰려 있다.

 

 

부산고 출신 기업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이다. 지난 2월26일 포스코 이사회 의장으로 전격 선임되어 눈길을 끌었던 그는 <시사저널>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설문조사 순위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각계에서 두루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지난해 조사에서는 전체 15위를 차지했으며, ‘우리 시대 진정한 영웅’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최연소 의학박사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국내 최초의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안업계에 뛰어들었으며, 잘나가던 자신의 기업 ‘안철수연구소’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긴 뒤 유학을 떠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산고는 경남고 못지않게 전통이 강한 야구 명문이기도 하다. 구수한 야구 해설로 한때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었던 김소식씨가 ‘원조 스타’ 격이고, 양상문 현 롯데 자이언츠 코치(32회)를 비롯해 46회 동기생인 손민한(롯데 자이언츠)·진갑용(삼성 라이온즈),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추신수(54회), 역시 미국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는 백차승(21회) 등 많은 스타 선수를 배출했다.

부산고 출신들은 청마 유치환 시인이 작사하고 윤이상 선생이 곡을 붙인 교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편이다. 통영 출신으로 세계적 작곡가 반열에 오른 윤이상 선생은 한때 부산고에서 음악 선생으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수학한 부산고 출신 문화예술계 인사 중에서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한 시인 겸 방송작가 김민부씨. 시인이자 수필가인 강영환씨, 김광일 마산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와 SBS 기자 출신 방송인이자 시인인 유자효씨 등이 눈에 띈다.

고등학교는 다른 곳을 다녔으나 부산중학교를 졸업한 연고로 부산고 동창에 포함되는 몇몇이 있다. 김두희 전 법무부장관, 박관용 전 국회의장(동래고), 이철 전 코레일 사장(경기고) 등이 그런 경우이다. 이같은 동문 대우의 이면에는 외연을 넓힌다는 뜻이 담겨 있다. 경남고가 경남중 졸업생을 같은 식구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PK(부산·경남) 지역 인맥의 양대 줄기인 부산고와 경남고 출신들은 지금도 각계각층에서 서로 돕고 끌어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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