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인내로 키운 ‘영웅 본색’
  • 서호정 | 스포탈코리아 기자 ()
  • 승인 2010.06.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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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차두리·‘대기만성’ 이정수·‘연습 벌레’ 정성룡의 인생 역전 드라마

2002년 월드컵. 우리는 박지성이라는 여드름투성이 젊은이의 인간 승리에 감동했다. K-리그 입단 테스트조차 통과하지 못했던 그는 강인한 심장과 능숙한 양발로 월드컵에서 골을 터뜨리며 한국 축구의 히어로로 떠올랐다. 2010년 여름 다시 5천만 국민을 웃고 울리는 태극전사들의 유쾌한 도전 속에도 곳곳에 영웅기가 숨어 있다. 

▲ 6월12일 한국과 그리스의 경기에서 차두리가 문전을 돌파하고 있다. ⓒ연합뉴스

■ 국민들 열광시키는 차미네이터, 차두리

이번 월드컵에서 대표팀 최고의 스타는 주장 박지성도, 제2의 에이스인 박주영·이청용도 아닌 오른쪽 풀백 차두리(30·프라이부르크)이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깜짝 스타로 부상한 차두리는 8년 만에 생애 두 번째 월드컵에 참가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그리스전에서 선발 출장한 그는, 강력한 몸싸움과 시원한 오버래핑으로 팀 승리에 기여했다. 하지만 월드컵의 감격을 다시 맛 보기까지 그가 겪은 시련도 만만치 않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아버지 차범근이 맹활약했던 제2의 고향인 독일의 분데스리가로 진출했지만, 차두리는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오가는 힘든 생활을 반복했다. 원래 공격수였던 포지션도 점점 밀려 풀백으로 전업해야 했다. 결국, 2006년 차두리는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합류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월드컵 개막을 8개월 앞두고 부임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차두리를 평가전에서 단 한 번 테스트한 뒤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축구 선수로서 자신의 재능과 정체성을 의심할 법도 했던 월드컵 엔트리 탈락이라는 시련 속에서 차두리는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아버지 차범근과 함께 월드컵 해설위원으로 나선 것이다. 월드컵 대표팀에서 낙마한 현역 선수가 해설위원으로 나선다는 것에 찬반 양론이 팽팽했지만, 막상 뚜껑을 연 뒤 차두리는 국민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침착한 아버지와 달리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의 해설이 신선하게 다가간 것이다.

특히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스위스전에서 벌어진 오프사이드 골 논란 당시 “저건 사기입니다”라고 외친 차두리의 발언은 분명 방송 사고였지만, 국민들은 오히려 속 시원하다며 박수를 보냈다. 차두리는 지난 독일월드컵과 마찬가지로 이번 남아공월드컵에서도 개막을 8개월 앞두고 본격 테스트를 받았다. 그러나 4년 전과 달리 차두리는 성숙하고 안정된 플레이로 기회를 잡으며 원하던 월드컵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2002년 만 22세의 청년에서 이제는 30세로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차두리는 대표팀에서 늘 웃는 얼굴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맡고 있다. 힘들고 고된 훈련 시간은 물론 긴장감 넘치는 경기 중에도 늘 웃는 그의 축구에 대한 접근 자세는 이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차두리는 이른바 ‘월드컵 놀이’로 불리는 패러디 문화의 중심에 선 선수이다. 인터넷에서는 차두리를 둘러싼 각종 설들이 난무한다. 대표적인 것이 로봇설과 아바타설이다.

로봇설은 유럽의 파워풀한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차두리의 동양인답지 않은 체격 조건에서 기인했다. ‘차미네이터’는 강력한 몸싸움으로 상대 선수를 튕겨버리고 올라가는 그의 호쾌한 오버래핑과 늘 웃기만 하는 표정에서 비롯되었다. 아바타설은 영화 <아바타>처럼 차두리의 몸속에 역대 한국 최고의 선수인 아버지 차범근이 들어가 조종한다는 얘기이다. 모두 네티즌의 엉뚱한 농담이지만, 차두리의 유쾌한 성격이 주는 청량감이 만들어 낸 하나의 현상이다. 차두리는 이번 남아공월드컵을 통해 늘 자신을 가리고 있던 아버지 차범근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차범근의 아들이 아닌 축구 선수 차두리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강화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2010 남아공월드컵은 그에게 대성공이다.

 

▲ 6월12일 밤(한국 시간) 포트엘리자베스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B조 첫 경기 한국-그리스의 경기에서 이정수가 슈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B급 공격수에서 특급 수비수로 변신 성공한 이정수

 그리스와의 조별 리그 1차전에서 승리로 이어지는 선제골을 넣은 이정수(29·가시마)는 골 넣는 수비수로서의 존재감을 다시 각인시켰다. 역대 대한민국의 월드컵 최단 시간 골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이정수의 축구 인생은 늘 반듯한 아스팔트 길보다는 비포장도로에 가까웠다. 경희대에 다닐 때만 해도 이정수는 수비수가 아닌 스트라이커였다. 한때 이동국과 함께 청소년대표팀에서 투톱으로 활약한 적도 있다. 하지만 2002년 프로에 입단한 후 그의 인생 항로는 바뀌었다. 이정수를 프로 무대로 부른 조광래 안양 LG 감독(현 경남 FC 감독)이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꾸라고 추천한 것이다. 조광래 감독은 “당시 정수를 공격수로 영입했지만, 득점 능력은 신통치 않았다. 큰 키(1백85cm)에도 스피드가 있고 헤딩력이 좋아서 수비수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다”라고 말했다.

의외로 이정수는 조광래 감독의 주문을 고분고분 받아들였다. 차분한 성격은 수비수로 변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004년에는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해 수비수 출신인 장외룡 감독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수비 수업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풀백과 센터백을 오가며 인천 수비를 이끌었고, 2005년 K-리그에서 인천이 준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2006년에는 K-리그 최고 명문이라는 수원으로 당당히 이적하며 수비수로 변신한 지 4년 만에 최고의 선수로 등극했다. 2009년에는 박지성이 뛰었던 일본 J리그의 교토 상가 FC로 진출했고, 1년 만에 J리그 챔피언인 가시마 앤틀러스로 이적했다.

이정수의 대표팀 데뷔는 그가 만 27세이던 지난 2008년에야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대기만성형이다. 허정무호에서도 이정수는 특유의 성실성과 적응력으로 데뷔한 뒤 두 경기 만에 주전으로 올라서며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리스전에서 터뜨린 선제골은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던 그의 숨겨진 과거 전력과 공격 본능이 발휘된 장면이었다. 이정수는 기자들 사이에서 개그맨으로 통한다. 그라운드 위에서는 침착함과 터프함의 양면을 갖춘 수비수이지만, 인터뷰에서는 재치 있는 멘트로 웃음을 주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이정수가 동명이인인 쇼트트랙 선수 이정수에게 가려지는 사건이 있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2관왕을 차지한 깜짝 스타 이정수가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를 차지하자 자신으로 오인했던 것. 당시 이정수는 인터뷰에서 “검색에서 밀려 아쉽다. 다시 내 자리를 찾고 싶다”라며 투지(?)를 보였다. 결국 ‘축구 선수’ 이정수는 ‘쇼트트랙 선수’ 이정수를 제치고 우선 검색 인물로 올라섰다. 그리스전 전반 7분 기성용의 프리킥을 감각적인 오른발 인사이드슛으로 연결하며 골을 넣자 각종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는 모두 그의 차지였다. 월드컵 첫 골의 가치가 올림픽 금메달 못지않았던 것이다.

 

▲ 6월12일 한국과 그리스의 경기에서 그리스의 크로스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정성룡 골키퍼. ⓒEPA

■ 인내를 곱씹으며 큰 산 차례로 넘은 정성룡

남아공월드컵을 통해 한국은 8년 만에 수문장 교대식을 가졌다. 허정무 감독은 당초 부동의 주전으로 여겨졌던 4강 신화의 주역인 ‘거미손’ 이운재 대신 ‘차세대 골키퍼’ 정성룡(25·성남)을 주전으로 택했다. 정성룡은 그리스전에서 무실점 선방을 펼치며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8년간 권좌를 놓지 않았던 이운재의 시대가 끝나고 정성룡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했다. 이번 수문장 교대는 이운재가 한·일월드컵을 통해 김병지를 밀어내고 대표팀 안방마님으로 앉았던 것과 흡사하다. 당초 정성룡은 경험 면에서 이운재에게 절대적으로 밀리는 No.2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월드컵을 앞두고 이운재가 K-리그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정성룡에게도 기회가 가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허정무 감독은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네 차례의 평가전 중 에콰도르, 일본과의 초반 두 경기에서 정성룡에게 선발 출전 기회를 주었다. 마지막 평가전이었던 스페인전에서는 이운재가 선발로, 정성룡이 후반 교체 멤버로 나섰다. 정성룡은 후반 막판 1실점을 했지만 안정감에서는 무실점으로 전반을 마친 이운재보다 낫다는 평가를 들었고, 결국 본선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1백90cm의 장신에 긴 팔을 이용한 선방 능력이 빛나는 정성룡은 각급 대표팀에서 주목받아온 유망주 출신이다. 하지만 늘 2인자 신세였다. 청소년대표팀 시절에는 라이벌인 차기석에 밀려 벤치만 지켰다. 당시 차기석은 유럽 팀들의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지만, 정성룡은 관심 밖에 있었다. 서귀포고를 졸업하자마자 2004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지만, 그의 앞에 버텨 선 것은 김병지라는 거대한 산이었다. 2년간 단 한 경기에도 나서지 못하던 정성룡은 2군 경기를 통해 꾸준히 경험을 쌓았고, 김병지가 2006년 이적하면서 기회를 얻었다.

운명의 전환점은 2007년에 나타났다. 일명 ‘파리아스 매직’으로 불리며 포항이 극적으로 리그 우승을 하는 과정에서 정성룡은 골문을 굳게 지켰고, 치열한 플레이오프 싸움에서 한 단계 올라섰다. 우승 후 성남으로 이적한 정성룡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며 차세대 골키퍼로서 입지를 굳혔다. 영원한 라이벌 차기석이 신부전증으로 인해 선수 생활에 위기를 겪자 그 사이 주전 골키퍼로 나선 것이다. 이후 국가대표로 자연스럽게 선발되었고, 김영광을 제치고 2인자로 올라섰다.

얼핏 보면 행운이 잇달아 겹친 성공 같지만, 오랜 2인자 생활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틴 정성룡의 성실함은 지도자들이 늘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다. 골키퍼는 주전과 비주전의 격차가 가장 뚜렷한 포지션이다.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라도 기회는 주전에게만 집중된다. 그 힘든 시기를 인내하지 않는 자에게 1인자의 자리는 오지 않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명실상부한 1번이 된 정성룡은 불우한 가정사를 딛고 일어난 인간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가난한 집안 환경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했던 정성룡은 “돈 걱정 없이 운동시켜주겠다”라는 약속 하나에 경기도 광주를 떠나 제주도의 서귀포로 유학을 갔다. 당시 정성룡의 아버지는 입학 당시 서귀포고의 설동식 감독에게 “성룡이 좀 많이 먹게 해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남기고 그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홀어머니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선수 생활을 이어간 정성룡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에 입단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중증 장애를 갖고 태어난 누나를 보살펴야 하는 그에게 대학 생활 따위는 사치였다. 또래 친구들이 놀기 바쁠 때에도 그는 골키퍼 장갑을 끼고 훈련장으로 나가 홀로 연습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연습 벌레’이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한 것도 안정된 가정을 꾸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미스코리아 경남 진 출신의 임미정씨와 2008년 백년가약을 맺은 정성룡은 이후 한층 성숙한 플레이를 펼쳐 보였고, 결국 마지막 큰 산인 이운재마저 넘으며 마지막에 웃었다.


▲ 한국 K-리그에서 뛴 적이 있는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백업 공격수 그라치테. ⓒAP연합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 국가대표팀에는 국내 팬들에게 낯익은 인물이 있다. 주전 공격수 루이스 파비아누의 백업 공격수인 그라치테(31·볼 프스부르크)는 지난 2003년 안양 LG(현 FC 서울)에서 바티스타라는 이름으로 뛰었던 전직 K-리거이다. 당시 그라치테는 6개월 동안 단 아홉 경기에 출전해 공격 포인트 하나 기록하지 못한 채 돌아간 퇴출 용병이었다. 하지만 브라질로 돌아간 뒤 자신의 진가를 선보인 그라치테는 2006년 프랑스 무대를 거쳐 2007년 독일 분데스리가의 볼프스부르크에 입단했다. 볼프스부르크에서 맹활약하며 2008-2009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끈 그는 2009년 3월 브라질 대표팀 둥가 감독의 부름을 받으며 ‘삼바 군단’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스페인의 주전 수비수 헤라르드 피케의 인생 역전도 극적이다. 피케는 2008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당시 박지성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스페인이 배출한 최고의 수비 유망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와 2군에서 보냈다. 당시 함께 출전 명단에서 제외된 박지성은 설움을 참고 버티는 길을 택했지만, 피케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했다.  

▲ 스위스와의 경기에 나선 스페인 수비수 피케(오른쪽).Iker Casillas and ⓒEPA

유소년 시절 자신이 성장한 바르셀로나로 돌아간 피케는 1백92cm, 85kg의 우월한 체격 조건과 뛰어난 공격 가담력을 활용해 주전 수비수로 우뚝 섰고, ‘무적 함대’는 그를 수비 라인의 조타수로 불러들였다. 피케는 1년 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바르셀로나의 주전 선수로 당당히 출전해 친정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뼈아픈 0-2 패배를 안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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