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깨어나는 ‘추억의 명화’들
  • 라제기 |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0.06.2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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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리메이크 작품들 개봉 잇따라…원작의 향수 살리면서 현실 반영해 ‘리웨이크’라 불리기도

추석 연휴 개봉을 겨냥해 한창 제작 중인 한국 영화 <무적자>는 탈북자 형제의 우애와 친구들의 핏빛 우정을 다룬다. 경찰인 동생과 뒷골목을 전전하는 형의 갈등과 화해가 드라마의 씨줄을 이루고, 의형제와도 같은 암흑가 남자들의 뜨거운 사연이 이야기의 날줄이 된다. 30대 후반의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낯익은 설정이다. <무적자>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도래를 알린 <영웅본색> (1986년)을 리메이크했다.

■ 리메이크의 세계화

<영웅본색>을 리메이크한 것은 <무적자>가 처음이다. 할리우드와 홍콩 등에서 수년 동안 여러 차례 리메이크가 거론되던 <영웅본색>이 한국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시아 영화나 유럽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새롭게 다시 만들어진 경우는 허다하지만 한국에서 외국 유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은 이례적이다. <파이란>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으로 이름을 알린 송해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송승헌·주진모·조한선·김강우 등 출연진도 남다르다. 주윤발·장국영 등 당대 최고의 홍콩 남자 배우들이 집합한 오리지널에 비길 만하다.

유명 원작과 화려한 진용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문제는 지나치게 향수를 자극하는 것과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제작사는 지금 이곳의 이야기와 얼마나 잘 맞게 원작을 변용시키느냐에 승부를 걸고 있다. 액션도 있지만, 송감독 특유의 드라마에 관람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 이 영화의 홍보 관계자는 “쌍권총 장면 등 원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 꽤 등장할 것이다. 제작사는 리메이크 대신 ‘전설을 깨운다’는 의미로 리웨이크(Rewake)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단순 리메이크는 원치 않는다”라고 밝혔다.

8월 방영 예정으로 촬영에 들어간 TV 드라마 <러브송>(가제)은 1990년대 뭇 연인들의 가슴을 적신 홍콩 영화 <첨밀밀>(1996년)을 밑그림으로 삼는다. <겨울연가>의 오수연 작가, <오 필승 봉순영>의 지영수 PD, 한류 스타 박용하 등이 참여한다. 국내 시장뿐 아니라 중국어권 시청자까지 아우르려는 러브 스토리이다. 제작사 베르디미디어 관계자는 “한국적인 요소가 들어가기는 해도 내용은 원작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해외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멜 깁슨, 헬렌 헌트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왓 위민 원트>는 베이징을 배경으로 삼은 공리와 유덕화 주연의 중국판 <왓 위민 원트>로 거듭난다. 바야흐로 리메이크도 국제화를 넘어 세계화하고 있는 것이다.

 

 

■ 리메이크 아닌 리메이크도 등장

할리우드의 최근 리메이크도 새로운 경향을 띠고 있다. 리메이크를 하되 원작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려는 모순적 형태의 리메이크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 외톨이 흑인 아이가 쿵푸를 배우며 새로운 삶을 맞게 되는 내용을 다룬 <베스트 키드>는 1984년 동명 원작에서 비롯되었다. 액션 스타 성룡이 쿵푸를 전수하는 스승으로 출연한 이 영화의 할리우드 제목은 <가라테 키드>(<베스트 키드>는 1984년 당시 한국의 반일 감정을 고려해 만든 국내 개봉 제목이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청춘 스타였던 랄프 마치오가 가라테를 배우는 고등학생으로 출연한 원작과 달리 가라테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영화이다.

지난 6월23일 개봉한 <여대생 기숙사>도 1983년작 <공포의 여대생 기숙사>를 원조로 삼고 있지만, 내용은 닮은꼴이라 할 수 없다. 여대생 기숙사라는 야릇한 공간에 새로운 사연을 채우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원작이 기숙사에서 파티를 준비하다 사감을 살해하게 된 여대생들이 연쇄 살인의 희생양이 되는 내용을 다룬 반면, 새로운 <여대생 기숙사>는 여대생들에 의해 감추어진 1년 전 살인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영화의 지명도에 의지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로 호객을 하는 것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일단 검증된 내용을 다시 만든다는 점에서 리메이크 영화는 흥행에서 유리하다. 최근에는 옛 영화의 유명세에 기대면서도 좀 더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분석했다.

 




새로운 종을 탄생시켜 세상을 놀라게하고 싶었던 부부 과학자 엘사(사라 폴리)와 클라이브(애드리언 브로디)는 제약회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새로운 실험에 착수한다. 인간 여성의 DNA와 조류, 어류, 양서류, 파충류, 갑각류의 유전자를 결합해 새 생명 ‘드렌’을 탄생시킨 엘사와 클라이브. 비밀리에 ‘드렌’을 키우기에 이른 그들은 급속한 생장을 보이는 새로운 생명체 앞에 혼란스러워하고, 마침내 과학자로서의 윤리적 고민을 내던진 이들 앞에 파국이 찾아온다. 

폐쇄 공포를 극대화한 영화 <큐브>로 충격적 상상력을 선보였던 감독 빈센조 나탈리의 신작 <스플라이스>는 경이적 생명체 앞에 무력화해가는 인간을 그린 일종의 크리처(creature) 호러물이다. 이형(異形)에 대한 불안을 근거로 유전자 조작 생명체로 인한 파국을 그린다는 면에서
<프랑켄슈타인> <스피시즈>와 같은 기존 장르 영화와 공통점을 보이지만, 장면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이를 위해 신화적 설정을 더해 이야기를 비틂으로써 기존 장르 영화와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영화는 과학과 인간의 오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인류의 파멸이 아닌 한 커플이 맞는 파국에 집중한다. 전형적으로 오만해 보이던 과학자 엘사에게 모성애적 집착과 트라우마를 심은 것이나, 크리처의 생장 과정에서 보이는 두 과학자의 모습을 양육의 매 단계에서 실패하는 초보 부모처럼 그린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스플라이스>는 프로이트적 시선의 부모-자식 관계를 발판 삼아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영화적 장치로 이용함으로써, 기존의 크리처물이 가졌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도가 흥미로울 만큼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근친 관계를 연상시키는 충격적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도 비명이 아닌 실소가 먼저 터져나오고 만다. 낭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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