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으로 단련된 ‘강철 그물’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0.06.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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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팀 포백 4인방, 고질 털어내고 맹활약…“영표형 덕에 자신감 생겼다”

 

▲ 6월17일 아르헨티나전에서 한국 대표팀의 맏형 이영표가 리오넬 메시와 1 대 1 경합을 벌이고 있다. ⓒAFP

■ ‘작은 철인’ 이영표, 클래스는 영원하다

“도대체 왜 저런 선수가 사우디에서 뛰는 거야?” 코트디부아르·스페인 등 강팀과의 평가전에서 한국의 왼쪽 수비수는 ‘영리’했고 또 ‘견고’했다. 여전히 유럽에서 뛰어도 손색없는 실력이었다. 월드컵 16강 길목을 앞두고 맞붙은 나이지리아는 줄기차게 한국 수비진의 오른쪽을 괴롭혔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훨씬 뚫기가 쉬웠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많은 기회를 오른쪽에서 만들었다. 보통 ‘벽’이라고 불리는 수비수는 피지컬이 좋다. 그러나 한국의 왼쪽 수비수 이영표(33·알힐랄)는 작은 키(1백76cm)로도 ‘벽표’로 불린다. 이영표는 K리그 안양 LG(현 FC 서울)를 시작으로 네덜란드(PSV 아인트호벤), 잉글랜드(토트넘 핫스퍼), 독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을 거쳐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알힐랄)에서 뛰고 있다. 사우디 리그로 갔다고 해서 그의 실력이 퇴보했다고 보는 것은 편견이다. 억측에 불과하다는 것을 월드컵에서 증명했다. 그는 알힐랄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이며, 수년 동안 알힐랄의 골칫거리였던 오른쪽 수비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준 선수이다. 2009-2010년 팬 인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이슬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랑받는 기독교인이다. 알힐랄 팬들은 매번 그를 위해 경기장에 태극기를 들고 나온다.

그가 처음 태극 마크를 달 기회를 잡은 때는 1999년 2월, 건국대 재학 시절이었다. 그것도 테스트용 선수였다. 당시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 대표팀은 부족한 윙백 자원을 테스트할 요량으로 그를 불렀다. 명지대를 상대로 한 연습 게임 전반전, 이영표의 패스 미스는 바로 실점으로 연결되었고, 1-0으로 뒤진 채 하프타임을 맞았다. 첫 기회가 그대로 물거품이 되는 듯했지만 후반전에도 출장 기회를 잡은 이영표는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장기인 드리블을 선보이며 골까지 기록했고, 사로잡힌 허심(許心)은 이영표에게 정식으로 빨간 유니폼을 선물했다.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도 겸하고 있던 허감독은 그를 국가대표팀으로 끌어올렸다. 1999년 6월12일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멕시코와의 코리아컵 경기는 이영표의 A매치 데뷔전이었다. 이 새내기는 ‘헛다리 짚기’를 하며 관중들을 열광시켰고, 기민하게 움직이며 볼을 따냈다. 공격수를 반칙으로 끊거나 볼을 뺏더라도 앞으로 뻥 내지르는 수비수만 보던 축구팬들은 드리블로 치고 나가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수비수, 볼을 미리 끊어내 정확한 패스로 공격을 전개하는 수비수를 보게 되었다.

도르트문트의 미드필더 플로리안 크링에는 이영표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영표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필립 람(현 독일 대표팀 주장·좌우 모두 소화 가능한 풀백으로 이영표와 체구가 비슷하다)을 연상시키는 선수이다. 람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 뿐이다. 수비 라인의 문제에서도 의사소통을 중요하게 여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의사소통으로 수비진을 조율하는 이영표의 ‘가치’는 월드컵을 전후로 빛을 발했다. 한국 국가대표 수비진은 무적 함대 스페인의 공격을 상대로 1실점만 하며 막아냈다. 아르헨티나전 4실점을 제외한다면 월드컵에서도 당초의 우려보다는 견고하게 버텼다. 나머지 젊은 수비수들은 하나같이 “영표형이 이렇게 말했어요”라고 말한다. 스페인과의 평가전이 끝난 뒤 이정수는 “영표형이 경기 전 ‘미드필드와 수비진의 간격을 좁혀 밀도 있는 플레이를 펼치자’라고 주문했는데 100% 이행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월드컵 그리스전에서 2-0 승리를 거둔 뒤 조용형은 “영표형이 경험이 많아 수비수들이 자신감과 믿음이 생겼다. 소통이 잘 되었다”라고 밝혔다.

2005년부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핫스퍼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이영표는 유럽에서 몇 안 되는 준수한 왼쪽 수비수이다”라며 든든히 뒤를 봐준 마틴 욜 감독이 경질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후임 후안데 라모스 감독 체제에서는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그를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영입한 것도 이영표의 ‘경험’과 ‘존재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월드컵과 UEFA 챔피언스리그를 거치며 쌓은 관록은 젊은 도르트문트 수비진을 이끄는 데 제격이었다. 독일 언론들도 이영표가 도르트문트 팀에 합류한 뒤 수비진이 안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토트넘 시절 두 번이나 어긋난 이탈리아 명문 구단 AS 로마의 영입설이 최근 다시 불거질 정도로 이영표의 가치는 높다. 지난 2006년 8월, AS 로마가 처음 영입을 시도했지만 계약 직전 단계에서 이영표가 거절하며 무산된 바 있다. 그는 “안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밀려들었다”라며 종교적 목소리에 귀 기울여 거절했음을 스스로 책을 통해 밝힌 바 있다. AS 로마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했을 법한데도 33세의 선수를 여전히 원한다는 사실에 우리 축구팬들은 뿌듯해하고 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축구계 격언이 비단 외국 유명 선수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을 이영표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6월12일 그리스전에서 이정수(왼쪽)·조용형(오른쪽)이 그리스 공격수를 상대로 수비를 하고 있다. ⓒAFP

 

■ ‘이영표의 아이들’ 조용형·이정수의 도약

부상으로 합류 여부가 불투명했던 이동국을 제외한다면 조용형(제주 유나이티드)·이정수(가시마 앤틀러스)만큼 대표팀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선수는 없다. 한국에서 센터백은 항상 논쟁거리이다. 한국 국가대표팀은 2002년 스리백 시스템으로 4강에 올랐지만, 당시에는 홍명보라는 걸출한 스위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수비의 경쟁력은 홍명보를 중심으로 한 세 명의 스리백 시스템에서 나왔다. 

‘홍명보’는 사라지고 세계 축구의 흐름도 스리백에서 포백으로 변했다. 두 명의 센터백을 두고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는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서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남아공 그라운드에서 중앙 수비수로 서 있는 이 두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에게 세 골이나 헌납하며 공한증이 처음으로 깨진 지난 2월 동아시아선수권대회 때도 이들은 국가대표였다. 조용형과 이정수는 ‘함량 미달’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엄청난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조용형은 1백82cm, 72kg으로 체구가 작다. 수비수에게는 약점이다. 몸싸움과 공중 볼 경합이 잦은 중앙 수비수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경험이 그렇게 풍부한 편도 아니다. 밖에서는 “조용형은 아니다”라고 난리였다. 불안하다는 이유에서다. 축구계 내부는 정반대였다. 조용형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다. 부평고 시절부터 ‘센스 있는 수비수’로 알려졌고, 아드보카트나 베어벡 등 전임 외국인 감독도 그를 명단에 종종 포함시키며 주시했다. 축구 꿈나무들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U-20월드컵 8강에 오른 한국 청소년대표팀을 대상으로 국내 현역 선수 가운데 누구를 우상으로 삼는지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조용형은 청소년대표팀 수비수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청소년대표팀 중앙 수비수를 보는 김영권(전주대)과 홍정호(조선대)는 조용형을 선택한 이유로 “생각하는 축구를 하고, 본받을 점이 많다” “키는 작지만 영리하고 센스 있게 볼을 찬다”라고 밝혔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조용형을 “스위퍼 스타일의 4요소라 할 수 있는 조율·커버·마킹·피딩에 고루 능하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중학교 때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고등학교에 와서야 중앙 수비수로 자리를 잡은 것도 도움이 되었다. 조용형의 장점 중 하나가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 정확한 볼 배급을 하는 것인데, 강팀과의 경기에서 얼마 안 되는 공격 기회를 살려야만 하는 한국 대표팀에는 중요한 무기이다.

조용형은 이탈리아의 단신 중앙 수비수인 파비오 칸나바로(1백75cm)를 롤모델이라고 말한다. 지난 2006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탈리아는 칸나바로의 약점인 하드웨어를 또 다른 센터백인 마르코 마테라치(1백93cm)가 보완하며 수비진의 안정을 꾀했다. 마테라치 역할은 1백85cm인 이정수가 해야 한다.

‘골 넣는 수비수’로 유명해진 이정수는 원래 골을 넣기 위해 프로팀에 입단했다. 안양 LG(현 FC 서울)에 입단했을 때 그는 ‘공격수’였다. 프로에 와서 수비수로 전향한 늦깎이이다. K리그는 기본적으로 외국인 용병을 공격수 위주로 뽑는다. 어지간한 토종 공격수는 살아남기 힘든 구조이다. 수비를 뚫는 역할에서 공격을 막아야 하는 역할이 낯설었겠지만, 일단 수비수로 살아남는 데 성공하면서 오히려 장점이 부각되었다. 공격수로서 다져온 순간 스피드는 ‘스피드가 뛰어난 수비수’를 매번 아쉬워하던 한국 축구계에 ‘이정수=희소 자원’이라는 공식을 만들어주었다. 공격 본능으로 뽑는 골은 덤이다.

 

▲ 16강 길목에서 맞붙은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차두리가 은완코 카누와 공중 볼 경합을 벌이고 있다. ⓒAFP

■ ‘차미네이터’ 차두리, ‘묵언 수행’으로 이룬 성공적 변신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변신’ 하면 떠오르는 또 한 명의 선수가 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차두리(30·프라이부르크)는 윙포워드였고, 2010년 월드컵에서는 풀백이었다. 2006년 월드컵 이후 국내 팬들은 열심히 웹서핑해가며 찾지 않는 한 차두리의 소식을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오른쪽 수비수로 변신하며 기량을 갈고 닦는 데 전념했다. 우리만 잘 몰랐을 뿐이다. 때로는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독일의 권위 있는 축구 전문지인 <키커>의 베스트 11에도 여러 차례 선정되었다. 한때는 2부 리그에서 활동했지만 1부 리그 팀으로 이적하는 등 실력도 인정받았다. 한국과의 단절은 ‘차범근의 아들’에서 ‘차두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일종의 ‘묵언 수행’인 셈이었다.

차두리는 오른쪽 수비수로 자리를 바꾼 뒤 현대 축구의 과제인 압박과 빠른 공수 전환에서 측면 수비수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수비수로 늦게 전환한 탓인지 수비 라인을 형성하는 것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공격수를 놓치기도 한다. 그러나 부친에게 물려받은 훌륭한 신체 조건과 스피드는 1 대 1 수비에서는 강점이며, 공격수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폭발적인 오버래핑과 날카로운 크로스라는 무기도 보너스로 장착하고 있다. 차두리는 이제 국가대표 오른쪽 수비수의 첫 번째 옵션으로 탈바꿈했다. 조별 라운드에서는 반드시 1~2개 유럽팀을 만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뛰고 있는 서구형 선수 ‘차두리’는 이제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도 좋을 만큼 그 효용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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