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명하복’ 투철한 군인, 군기 빠진 행동 왜 할까
  • 전우영 |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
  • 승인 2010.08.2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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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민간인 군부대 총기 탈취 사건에서 엿보는 복종의 심리학

1997년 1월3일 밤 10시50분께에  경기도 화성군에 위치한 한 육군 사단의 위병소에 자칭 백소령이라는 40대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백소령은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초병들에게 자신이 상급부대에서 나왔는데, 오는 도중에 암구호를 까먹었으니 암구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는 초병들로부터 암구호를 알아낸 후, 위병소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안 초소로 향했다.

그가 해안선에 설치된 철조망을 따라 밤 11시20분께에 해안 초소 후문으로 들어가자,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사병이 힘차게 경례를 했다. 야간 근무일지를 작성하던 소대장은 경례 소리를 듣고 뛰어나갔다. 백소령은 15명이 자고 있는 내무반을 둘러보고 “수고 많다. 나는 수도군단에서 전입한 백소령인데 지형을 숙지하기 위해 해안 순찰을 하러 왔다”라고 말했다. 소대장이 대접한 인삼차를 마시면서, 그는 20여 분간 소대의 현황에 대해 브리핑을 들었다.

이어 그는 “중대 행정관인 A하사를 잘 안다” “간첩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니 총과 실탄을 빌려달라”라고 했다. 소대장은 부소대장의 K2소총과 실탄 30발을 넘겨주면서 “저희가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백소령은 “근무 교대 시간 아니냐. 이 지역은 전에 근무한 적이 있어 괜찮으니 병력을 교대한 뒤 천천히 따라와 순찰로에서 만나자”라고 말한 뒤 유유히 초소를 벗어났다.

다음 날인 1월4일 새벽 수도권에는 군부대 총기 탈취 사건으로 비상이 걸렸다. 백소령이 만나자고 했던 순찰로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상급 부대에 확인해본 결과 백소령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인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더구나 당시 초병 특별 수칙에 따르면, 자신에게 지급된 총기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초병은 총기를 점검하기 위해서 직속 상관이 총기를 달라고 명령하더라도, 멜빵을 자신이 붙잡은 상태에서 상관이 총기를 점검하는 것을 주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아무리 불가피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지급된 총을, 자신의 두 손을 모두 땐 체로, 타인에게 완전히 넘겨주지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날 벌어진 백소령 사건은 군대 내의 규정은 매우 엄격하되, 이러한 규정들이 또한 얼마나 쉽게 무시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선, 소초장을 맡고 있던 장교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40대의 남자에게 상급 부대에서 온 백소령이라는 말만 듣고, 자신의 총도 아닌 부소초장의 총과 실탄을 순순히 내주었다.

위병소 초병들의 행동도 사람들을 어이없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암구호의 경우에도 지휘 계통으로만 전달되게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위병소에서는 이러한 철칙을 무시하고 처음 보는 백소령이라는 40대의 사내에게 친절하게도 암구호를 알려주었다.

1997년 당시, 군기가 강하기로 소문났던 우리 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매우 커다란 놀라움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의 여론은 우리 군의 기강이 해이하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말 그대로 군기가 빠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정말 군기가 흐트러져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것일까?

복종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소초장과 초병이 군기가 빠졌다기보다는 오히려 군기가 너무 꽉 잡힌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암시한다. 즉, 당시의 군대는 국민들의 기대대로 강한 군기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데, 특히 군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투철한 상명하복 정신이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과연 우리 중 누군가가 위의 사건에 나오는 초병이나 초소장이었다면, 단호히 백소령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를 검문하거나 조사할 수 있었을까?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복종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윗사람의 요구를 군말 없이 수행하는 사람을 철이 든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이들이 결국 조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심지어 윗사람이 비합리적인 지시를 한 경우라도, 이에 의문을 제기했다가는 조직 생활을 하기 힘든 사람으로 찍혀서 삶이 고달파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복종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문화가 존재하는 한, 백소령 사건과 유사한 일들은 군대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집단과 조직에서 쉽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honeypapa@naver.com

페레스 전 이스라엘 총리와 경호원이 보여준 ‘건강한 복종’

백소령 사건이 일어난 같은 해에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페레스 총리의 최종적인 안전은 총 일곱 명의 수행 경호원들이 맡았다. 이들은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한 번 갔던 길을 두 번 다시 반복해서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동선을 파악하고 길목을 지켰다가 공격하는 전형적인 테러 수법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경호에 관한 한 경호 대상인 페레스 전 총리는 물론 그 누구의 지시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총리의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도 모든 점검 사항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총리가 차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했다. 총리가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도 경호원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심지어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점검하는 경호원들을 기다리다 지친 페레스 총리가 건물 안으로 그냥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물리적으로 총리를 제지하기도 했다.

페레스 총리의 경호원들에 대한 기사는 권위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전문가들의 힘찬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위계상으로만 본다면 총리보다 한참이나 낮은 위치에 있음에도, 총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총리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경호원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은 경호원들이 아니고 바로 경호 대상자였던 페레스 총리이다. 사실 총리의 입장에서 경호원들이 제시한 계획을 조금 변경하기는 매우 쉬울 수도 있다. 총리가 다른 길로 움직이기를 고집하면서 언성을 높이면, 경호원들에게 남은 선택은 총리가 원하는 길로 가되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해 총리를 보호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페레스 총리는 철저하게 경호원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가인 부하의 합리적 요구에 따르는 페레스 총리의 행동은 우리가 기억해둘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페레스 총리의 행동은 건강한 복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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