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끝없는 ‘B·C급 전범’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08.2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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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감시원으로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 일제 패망 후 연합군 재판받고 처형되거나 수형 등 비참한 생활

 

▲ 강도원 한국동진회 회장이 B·C급 전범으로 처형당한 부친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1942년 6월15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강태섭씨는 일제에 의해 포로 감시원으로 끌려갔다. 이때 나이 열아홉. 강씨는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3개월간 혹독한 포로 감시원 교육을 받은 후 그해 9월 태국의 포로수용소 왕야이 지역 4분소에 배치되었다. 그곳에는 연합군 수백 명이 포로로 잡혀 있었다. 포로들은 인근의 태면 철도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는데, 강씨는 포로들을 건설 현장으로 이동시키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일을 했다.

당시 포로 감시원들의 증언을 보면 포로 감시원은 군견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다. 식량과 의료품 등이 부족해 제대로 먹거나 입지 못했다. 병에 걸리거나 전염병이 돌아도 속수무책이었다. 또 온갖 잡무와 잡역에 시달리면서 포로와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지냈다.

1946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조국은 광복의 기쁨을 맞았다. 강씨는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으나 곧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는 일본이 패전한 후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전범 재판에 넘겨졌다. 싱가포르에 있는 영국 군사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1946년 11월22일 장기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강씨의 유해는 일본 혼문사에 봉안되어 있다가 1967년에 가족이 인수해서 지금은 예산 선산에 묻혀 있다. 강씨의 아들 도원씨(72·한국 동진회 회장)는 “내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이 전혀 없다. 동네 어른들의 말로는 ‘예의 바르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일본인이 시키는 대로 포로 감시원을 했을 뿐인데 전범으로 사형시킨 것은 말도 안 된다”라며 분노했다. 도원씨는 지난해 7월 영국 기록보관소(아카이브)에서 아버지의 재판 기록과 처형 장면을 담은 영상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박일준씨(70)도 기가 막힌 사연의 주인공이다. 박씨의 아버지 박윤상씨도 일제의 강요에 의해 포로 감시원이 되었다. 일준씨의 나이 세 살 때였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박윤상씨는 네덜란드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14년4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그날 저수지에서 투신해 자살했다. 오매불망 남편을 기다리다가 징역형을 받았다는 소식에 더 이상 살 희망을 갖지 못한 것이다. 박윤상씨는 일본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54년 만기 출소했다. 그는 1984년에 귀국했고, 1997년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박일준씨는 “내 가슴에는 커다란 응어리가 있다. 일제는 내가 어릴 적에는 아버지를 빼앗아가고, 또 어머니를 죽게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사과 한마디도 없다. 이런 뻔뻔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라며 울분을 토했다.

경남 창원에 살고 있는 김석기씨(87)는 국내에 살고 있는 B·C급 전범자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김씨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감시원을 했다. 말이 포로 감시원이지 밥이 없어 죽으로 배를 채우는 날이 더 많았다. 김씨는 전쟁이 끝난 후 15년형을 선고받고 인도네시아와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50년 석방되었다. 김씨는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62년에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시사저널>은 부산 포로 감시원 훈련소였던 노구치 부대의 부대원과 훈련 교관들을 촬영한 사진을 단독 입수했다. 또한 1946년 10월 싱가포르 장기 형무소에서 죽은 조선인 사형수들의 유언장도 확보했다. 유언장에는 자신의 억울한 심정과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담겨 있었다. “천지신명이 야속할 뿐 이 억울한 심정을 누구에게 전할까”(강재선), “조국이 독립하는 데야 그 외의 무슨 원이 있을까. 원 없이 천국으로 나는 갑니다”(장수업). 전주부씨의 경우 한반도 모양을 그림으로 그리고 고목으로 표현했으며 그곳에서 새싹이 피어나는 그림을 유언장으로 남기기도 했다.

‘한국인 B· C급 전범’은 태평양 전쟁 때의 포로 감시원들이다. 일본은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포로 감시원들을 조선인과 타이완인 등으로 충당했다. 조선인만 3천3백23명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태국·인도네시아·싱가포르 등 주로 동남아시아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활동했다.

 

▲ 조선인 포로 감시원 훈련 부대인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일본군 교관들과 조선인 훈련병들이 함께 찍은 사진. ⓒ한국동진회 제공

귀국한 뒤에도 ‘일본군 앞잡이’로 손가락질받아

패전 후 열린 연합군의 군사 재판에서 포로 감시원 1백48명이 포로 학대 혐의가 적용되어 B·C급으로 분류되었다. 이들 중 23명이 사형을 선고받은 후 처형되었고, 나머지 1백25명은 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

최후의 조선인 B·C급 전범자가 형무소에서 출소한 것은 1957년 4월이다. 이 중 두 명은 형무소에서 나온 후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현재 생존자는 확인된 사람만 일곱 명이다. 일본에 여섯 명이 있으며 국내에 한 명이 있고, 북한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B·C급 전범들과 그 후손들은 경계인이나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피해자이면서도 ‘일본군의 앞잡이’와 그 후손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실제로 고국으로 돌아온 포로 감시원들 중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다가 지난 2006년 국무총리실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동진회)’가 한국인 B·C급 전범자에 대해 전범이 아니라 ‘강제 동원 피해자’라고 인정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우리 정부는 B·C급 전범자에 대한 보상책을 마련해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2천만원, 그리고 생존자(김석기씨)에게는 연간 80만원의 의료비를 지원해주고 있다.

한국에 있는 B·C급 전범과 유족들은 2007년 2월25일 ‘동진회 한국 지부’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에 정착한 B·C급 전범들도 1955년  ‘동진회’를 구성하고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강도원 한국 동진회 회장은 “일본인 전범들은 연금 혜택 등을 받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2001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보상 여부는 입법부의 판단에 달린 문제’라며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결했다. 일본 민주당이 ‘연합국 B·C급 전범들에 대한 피해 보상’을 발의하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다. 앞으로 일본 정부와 국회를 계속 압박해나갈 생각이다. 우리 정부도 적극 나서주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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