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물결’ 드높이 흐르다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8.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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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시리즈 - 한국의 신 인맥 지도 |인천①

 

▲ 인천 송도 ⓒ시사저널 유장훈

제물포는 현재의 인천 중구 지역에 위치했던 조선 시대의 포구이다. 제물포가 개항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백27년 전인 1883년이다. 개항이 이루어질 즈음 구미 열강과 일본의 함선이 제물포로 입항해 조선과 개국 협상을 벌였다. 1882년(고종 19년) 7월 임오군란에 대한 사후 처리 문제로 이유원, 김홍집과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사이에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다. 급기야 1883년 1월 개항이 이루어졌다. 부산항이 주로 일본을 상대했다면 제물포항은 구미 여러 나라를 상대하는 문호의 역할을 하여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제물포가 급격히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사의 여명을 가장 먼저 맞이한 인천은 대륙의 문물이 한반도로 전파되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 이곳에 많다.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은 1899년 9월18일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다. 우체국도 그렇고 전화도 이곳에서 처음 등장했다.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형인 비류(沸流)가 이곳에 정착해 미추홀(彌鄒忽)이라 부른 것이 기록에 남은 최초의 명칭이며, 여러 변천을 겪은 끝에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함께 인천시로 개칭되었다. 1981년 7월1일 직할시로 승격하며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했고, 1995년 1월 광역시로 재편되었다. 8개 구와 강화·옹진 2개 군을 포함하는 인천광역시의 2007년 기준 인구는 2백71만명이다.

인천은 근대 도시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들 가운데 충청남도와 황해도 출신들이 주류를 차지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호남에서도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 인천 토박이가 20% 미만일 것으로 추산하는가 하면 아예 미미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인천을 두고 미국의 경우처럼 ‘유나이티드 시티(United City; 연합 도시)’라느니, ‘멜팅 폿(Melting Pot; 용광로)’ ‘샐러드 볼(Sallad Bowl)’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인천광역시 12개 선거구 현역 의원의 분포를 보면 박상은·이학재·황우여 의원만이 지역에서 출생한 경우이고, 신학용·이윤성 의원은 제물포고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출생지는 각기 부산과 청진이다. 이 밖에 윤상현·이상권·조진형·홍일표 의원은 충남, 조전혁 의원은 광주, 홍영표 의원은 전북이 고향이다.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이윤성 의원은 인천 지역 수재들의 정통 코스라고 불리는 인천중-제물포고를 거쳐 한국외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했다. KBS 기자와 밤 9시 뉴스 앵커로 얼굴이 알려진 이의원은 인천 남동 갑구에서 당선해 15대 국회에 진출했다. 18대까지 4선을 달성한 이의원은 18대 국회 전반기 부의장을 지냈다.

같은 4선의 황우여 의원은 인천 토박이이다. 강화 출신으로 인천중-제물포고-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각급 법원 판사로 재직했으며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회창 전 감사원장이 취임하면서 파격적으로 그를 감사위원에 발탁했고, 그가 정계에 입문한 것도 당시 이원장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황의원은 17대 국회 때 당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주위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천 출신으로 강화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이경재 의원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직되는 아픔을 겪었다. 4년 만에 복직해 정치부장을 지낸 뒤에 김영삼 민자당 총재 공보특보로 기용된 후 청와대 대변인, 공보수석비서관, 공보처 차관을 역임했다. 15대에서 18대까지 4선을 기록했다.  

 인천중-제물포고로 이어지는 ‘수재 인맥’ 두드러져

신학용 의원 역시 인천중-제물포고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2선 의원이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 보좌역을 지낸 적이 있고, 생활체육협의회와 벤처기업 등에 관여하다가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18대에 연임하고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비서실장이던 유정복 의원(김포)은 이번 8·8 개각에서 농림수산식품부장관으로 내정됨에 따라 초선인 이학재 의원에게 새 비서실장 역할이 맡겨졌다.

인천에서는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가 수재들의 집합처로 확고한 위치를 굳혀왔다. 어느 명문 학교이든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열정에 불타는 교장의 노력이 큰 힘이 되었음을 자주 보게 된다. 제물포고 역시 1945년 부임해 1961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인 길영희 초대 교장의 신화가 전해 내려온다. 제물포고가 공립학교임에도 불구하고 길교장은 마치 자신이 설립한 학교인 것처럼 애정과 정열을 쏟았다고 한다. 길교장에게 다른 학교로 옮기라는 전근 발령이 나면 인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발령을 취소시켰을 만큼 그에 대한 지역민들의 애정도 각별했다.

제물포고는 오랜 전통인 ‘무감독 시험(honour system)’에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시험 감독 없이 학생들 스스로 시험을 보는 방식인데, 1956년 1학기 중간고사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와 함께 개가식 도서관 열람실 운영 방식도 학생들에게 양심을 일깨우고 자부심을 키워주고 있다.

제물포고가 개교하기 전에는 인천중 졸업생이 인천고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제물포고가 개교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인천고가 제물포고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음에도 신생교에 뒤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두 학교 교장을 겸직했던 길교장이 인천중의 우수 졸업생들을 제물포고로 대거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인천고도 오랜 전통에 걸맞게 이승윤 금호아시아나그룹 고문(전 재무부장관), 심정구 전 의원, 서정화 전 의원 같은 유명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이고문은 서강대에서 화폐금융론을 가르치다 금융통화운영위원, KDI 연구자문위원을 거쳐 9대 유정회 의원으로 국회에 들어갔다. 재무부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고 13, 14대 총선에서는 인천 북 을 지역구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인천 출신들이 한때 중앙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은 적이 있다. 바로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들어섰을 때이다. 국무총리에 오른 장면 박사와 곽상훈 5대 민의원 의장이 인천 출신 인물이었다. 장면 박사의 동생은 장발 전 서울대 미술대 학장이다. 곽의장은 본래 부산 출신이나 인천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에 들어간 후 5대까지 내리 5선을 기록했다. 자유당 시절에 법무부장관을 지내고, 5·16 쿠데타 직후 대법원장에 취임해 3, 4대를 역임한 조진만 원장도 인천 출신이다. 김은하 전 민한당 의원은 1963년 6대부터 11대까지 6선을 기록하고 11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인천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흐름이 저변에 흐르고 있어 언젠가 표면으로 불거질 것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 말고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여럿 있다.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김영국 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김성진 전 체신부장관, 김정만 전 서울대공원 동물부장이 그들이다.

김활란 총장은 일찍이 인천으로 들어온 기독교를 접했고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 선각자로서, 그녀가 이화여대를 가꾸고 키운 공적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김성진 전 장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로서 수석 입학과 졸업 등 내내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이 그를 체신부장관으로 기용하고 임명장을 주면서 “학교 시절 공부를 잘해 몹시 부러웠는데 내 손으로 임명장을 주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서울대 사학과에서 위탁 교육을 받고 미국 플로리다 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진보당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진 비운의 조봉암 전 국회 부의장과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던 중 의문사한 최종길 전 서울대 법대 교수가 모두 인천 사람이다. 바다와 연한 데다 황해도와 개성이 가까운 지리적 특성상 인천에는 항상 ‘사상적 질풍노도’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회림·조중훈 등 지역 대표하는 기업인 다수 배출

인천에서 기업을 일군 이회림 전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은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인이었다. 개성 출신으로 전형적인 ‘개성 상인’의 면모를 보였던 이명예회장은 1959년 인천에 동양화학을 세운 뒤 이 지역을 중심으로 기업을 경영했다. 그는 평생 모은 8천여 점의 문화재와 이를 전시하고 있는 송암미술관 전체를, 작고하기 2년 전인 2005년 인천시에 무상 기증했다. 이명예회장은 “회사가 있기까지 인천시와 인천 시민들로부터 받은 성원에 보답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많은 사람이 보고 즐길 수 있는 공공의 재산으로 남기고 싶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가 해외 출장 때마다 찾아낸 우리 문화유산과 국내에서 미술품 경매 등을 통해 수집한 문화재 중에는 걸출한 예술품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문화재를 인천시에 쾌척한 것은 그의 인천 사랑을 잘 드러내준다. 인천 남구 학익동에 위치한 송암미술관은 약 1만4천5백㎡(4천4백여 평) 터에 연건평 7백65평(약 2천5백30㎡) 규모로 지은 프랑스식 건물로서 국내 사립미술관 중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다.  

 이명예회장의 세 아들이 다섯 달 전에 경총 회장을 그만둔 이수영 OCI(동양제철화학의 후신) 회장, 이복영 삼광유리공업 회장, 이화영 유니드 회장이다. 셋째딸 이정자씨가 이병무 아세아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일찌감치 운수·물류에 눈을 뜬 기업이 한진그룹이다. 조중훈 한진그룹 전 회장은 1945년 트럭 1대를 가지고 한진상사를 설립해 육·해·공 종합 수송 그룹으로 키워내기까지 수송 외길을 걸었다. 6·25 전쟁 통에 미군 군수 물자 수송을 맡았고 이때 다져둔 신용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어 사업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가업을 이어받은 장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차남 조남호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 삼남 조수호(사망), 사남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이 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미국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태희 변호사(한진그룹 고문)가 맏사위이다. 대한항공(KAL)을 갖고 있는 조양호 회장이 ‘항공기 제작사’의 꿈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업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세계 주요 항공사 가운데 여객·화물 운송과 완제(完製) 항공기 제작 사업을 동시에 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연계시키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심정구 선광 회장은 1985년 민정당 공천으로 12대 국회에 발을 들여 15대까지 4선을 하면서 민정당 재정위원장, 민자당 인천시 위원장, 국회 재무위원장, 재정경제위원장, 예결위원장을 지내는 등 활약했으나 이후 정치에서 손을 떼고 본업인 사업가로 돌아갔다.

인천 출신 법조인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김영수 전 문화체육부장관은 상당히 다채로운 경력을 갖고 있다. 서울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서울지검 등 각급 검찰청에서 검사와 부장검사로 재직하고 안기부 1차장을 역임해 정보에 밝다. 14대 국회에 잠깐 몸담았다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때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문화체육부장관에 기용되었다. 한국농구연맹(KBL) 4, 5대 총재와 서울고 총동창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장남 김재훈씨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 대구지검 공안부장을 거쳐 현재 대검찰청 범죄정보2담당관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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