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가 몸소 누에를 쳤던 그 자리
  •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08.30 12:5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덕궁 서향각의 ‘친잠권민’ 편액에 얽힌 순종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일화

 

▲ 창덕궁 후원에는 어수문을 통해 오를 수 있는 주합루가 있다. 그 돌계단길 왼편에는 서향각이 있다. 아래 작은 사진에 서향각의 세 가지 편액이 한꺼번에 보인다. ⓒ시사저널 유장훈


창덕궁 후원에 들어가 어수문을 거쳐 주합루가 자리한 언덕에 오르면 그 서쪽으로 ‘서향각(書香閣)’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글자 그대로만 놓고 보면 ‘책 향기가 그득한 집’이라는 뜻이다. 조선 순조 때의 문헌 자료인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이곳은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을 옮겨다가 포쇄(책 등을 햇빛에 말리거나 바람에 쐬는 일)하는 장소로 이안각(移安閣)이라고도 부르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의 글씨라고 적고 있다.  

가만히 보아 하니 이곳에는 서향각의 편액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처마 안쪽에는 ‘친잠권민(親蠶勸民)’이라는 편액이 하나 더 있고, 전면의 기둥에도 ‘어친잠실(御親蠶室)’이라고 쓴 간판이 붙어 있다. 책 향기로 넘쳐나야 할 곳이 난데없이 누에 치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매일신보> 1911년 6월4일자에 수록된 기사는 이 편액의 정체를 이렇게 알려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왕비 전하’는 순정효황후 윤씨를 가리킨다. ‘창덕궁 비원 내 서향각 정면에는 ‘친잠권민’이라 하는 대서(大書)의 편액을 걸었으니 이는 작년 봄에 친잠을 행하신 후 왕비 전하께서 친서(親書)하사 그 당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씨에게 하사하신 기념인데 금년에도 역시 그 서향각을 양잠실로 정하시고…’. 운운.

<고종실록> 1864년 11월6일자 기록에는 ‘왕후가 친잠하는 것은 종묘(宗廟) 제사 때에 입을 제복(祭服)을 만들기 위한 것이고, 임금이 친경하는 것은 종묘 제사에 올릴 곡물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서 이는 모두 조종(朝宗)을 공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하지만 예로부터 임금과 왕비가 몸소 밭을 갈고 누에를 치는 것은 백성들의 근본이 되는 의식(衣食) 문제 해결을 일깨우고 이를 장려하는 데 그 일차적인 뜻이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역대 국왕과 왕후들은 이따금 친경과 친잠의 의식을 벌여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왼쪽). 오른쪽은 1909년 7월11일자 에 실린 순종 내외 관련 기사. ⓒ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일제 강점기 일본 천황 내외에게 ‘헌상’하는 비애로 이어져

1909년 4월에 순종 황제가 동대문 밖의 동적전(東籍田)으로 나아가 옛 전통에 따라 친경의식(親耕儀式)을 벌인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이 친경식은 그해 7월과 이듬해인 1910년 5월에도 이어져 이례적으로 세 차례나 연속으로 거행되었다.

이 무렵인 1909년 6월1일 대한제국의 황후 또한 수원의 권업모범장에 있는 양잠 시설을 순시한 것을 계기로 창덕궁 서향각에 잠실(蠶室)을 설치하고 몸소 누에 치는 일에 모범을 보였다. 물론 여기에는 일본인 기술자의 세심한 지도가 뒷받침되었다.

이로부터 황족과 귀족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고관 대신들의 집집마다 잠종(蠶種)이 분양되어 어느 사이엔가 누에치기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주요 관리들의 누에 수확량을 가구별로 일일이 집계해 주기적으로 ‘관보’에 수록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이러한 누에 치기는 통감부 시절부터 일제가 조선의 식산 진흥을 위해 적극 추진하던 산업 장려 정책과도 맥을 같이하는 일이었다. 가령 경술국치 이후 이른바 ‘은사금’을 재원으로 하여 각 지역에 설립된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은 여러 업종 가운데 특히 ‘양잠 기술’을 널리 보급하는 강습소의 수단으로 줄곧 활용되고는 했다.

그런데 <대한민보> 1909년 7월11일자에는 다소 엉뚱한 내용의 기사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기보(旣報)와 여(如)히 대황제 폐하께옵서 통감저(統監邸)에 어림하실 때에 이토 공작에게 위탁하시어 동적전 친경하신 맥(麥; 보리)과 황후 폐하께옵서 친잠하신 제사(製絲)를 일본 양 폐하께 봉증(奉贈)하라 하옵셨다더라.’

말하자면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자 몸소 밭을 갈고 누에를 친 황제와 황후의 수확물은 퇴임하는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손을 거쳐 일본 천황 내외에게 고스란히 건네졌던 것이다. 이것까지는 한·일 양국 간 우호 선린을 위한 답례품의 교환 정도라고 이해한다 치더라도, 대한제국의 명운이 막을 내린 1910년 이후의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매일신보> 1913년 12월13일에 수록된 ‘이왕비 전하 어친제 수건헌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그러한 풍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왕비 전하께서는 황태후 폐하 및 황후 폐하의 휘지(徽旨)를 받들어 창덕궁 여관(女官)을 거느리시고 해마다 봄·여름에 양잠을 친행하심은 일반이 전해듣는 바인데 올해의 수견(收繭; 고치 따기)으로 정량(精良)한 생사(生絲)를 얻으셨으므로 이를 미려(美麗)한 수건(手巾) 여러 매를 직조(織造)하시어 양 폐하께 헌상코자 테라우치 총독을 거쳐 지난 9일 그 절차를 종료하였더라.’

그리고 이러한 일은 일제 강점기가 이어지는 동안 그대로 지속되었다.

한편, 누에치기를 백성들에게 권장하는 일에 앞장선 이는 윤황후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테라우치 총독의 부인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에 대해 <매일신보> 1911년 6월8일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보아 하니 총독의 부인이 마치 황후의 역할을 은근슬쩍 넘겨받은 모양새이다.

‘이왕비 전하께서도 재작년 이래로 창덕궁 내 서향각에서 친히 양잠을 행하시어 하민(下民)에게 모범을 보이시거니와 이제 테라우치 총독 부인이 또한 열심으로 양잠에 진력하여 녹천정(綠泉亭)의 일실(一室)을 잠실(蠶室)로 하고 열심히 사육하는 중인데…. 부인은 내객(來客)이 없는 날은 종일토록 이 잠실에 머물러 친히 뽕잎을 꺾고 젓가락을 집어 잠좌(蠶座)의 교대를 행하는 등 조금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운운.

여기에 나오는 ‘녹천정’은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부임하면서 옛 유래에 따라 남산 통감 관저의 뒤편 언덕에 새로 건립한 정자의 이름이다.

그 공간에서 테라우치 총독의 부인은 식민지 조선에 대해 식산 흥업을 장려하고자 그 가운데 일부를 양잠실로 전환해 열심히 누에를 기르는 일에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수확한 누에고치는 실을 뽑아 비단을 짠 다음 천황의 부인에게 헌상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곳에서 기르는 누에의 먹이인 뽕잎은 당초 용산 모범장에서 가져다 먹였지만, 1912년에는 총독 관저의 후원에다 아예 5백주나 되는 뽕나무를 직접 심었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