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갈라놓는 ‘병맛 돋는’ 말
  • 김세희 기자 (luxmea@sisapress.com)
  • 승인 2010.08.30 13: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성세대, 청소년들의 은어 사용 때문에 ‘소통 불능’ 고충 토로…‘우리말 훼손·사회성 결여’ 비판 안 통해

“개학하니까 벌써부터 야자크리 쩐다.”
“나 어제 야자 쨌다가 엄느님한테 걸렸어.”
“레알 엄느님 돋네. 시망.”

학교를 나서는 고등학생들의 대화이다. 풀어보면 ‘개학하니까 벌써부터 야간자율학습(야자)이 몰려온다. 최악이야’ ‘나 어제 야자 안 하고 도망갔다가 엄마(엄느님=엄마+하느님)한테 걸렸어’ ‘진짜 엄마는 다 알아, 소름 돋는다. 시원하게 망했네’라는 내용이다. 이 대화를 온전히 해석할 수 있는 기성세대가 얼마나 될까. 고등학생 아들을 둔 김지선씨(45·주부)는 “예전에는 어느 정도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줄임말을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아들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들을 때가 종종 있다”라고 말하며 ‘소통 불능’의 고충을 토로했다.

 

ⓒ일러스트 허경미

청소년의 은어 사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짭새’ ‘꼴통’ ‘호구’ 같은 은어는 세대마다 통용되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심각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사회적 일반화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특정 시대나 세대에 한정되지 않고 일반화된 언어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세대 간 언어 사용의 불협화음을 증폭시키고 있다. 중학교 교사인 박선영씨(32)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말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이어질까 봐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상담할 때 학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던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입장은 다르다. ㅅ중학교에 다니는 이지민양(14)은 “우리가 험한 욕설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어른들의 입이 더 거칠 때도 있다. 이것(은어)은 우리들만의 문화이다. 왜 무조건 비난만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드립’ ‘병맛’ ‘돋네’ ‘레알’ ‘잉여인간’ ‘덕후’ ‘일코’ ‘쩔다’ ‘현시창’ ‘크리’ ‘설리’(각 단어의 의미는 오른쪽 <표> 참고) 등 처음 보아서는 의미를 짐작하기조차 힘든 이 단어들의 기원은 일부 게임 사이트나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유명 홈페이지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하루에도 수천, 수만 건의 글이 올라온다. 글을 쓰거나 채팅을 하며 쓰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가 ‘채택’이 된다. 채택하는 주체도, 기준도 없고 정확한 기원을 따지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들만의 문화로 이해해야” 주장도

어떤 방식에 의해서든 일단 채택된 단어는 인터넷이 지니는 신속함이라는 속성을 매개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한다. 익숙해진 단어는 인터넷은 물론 학교, 학원 등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또래집단들 사이에서 일상 언어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변형·확장이 일어난다. ‘돋네’는 확장 정도가 넓은 사례 중 하나이다. ‘소름 돋는다’는 의미의 ‘돋는다’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단어는 주로 명사 뒤에 붙어 ‘○○돋네’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널리 확산됨과 동시에 변형이 시작되어 ‘링딩돋네’(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노래 <링딩동>에서 파생), ‘정형돋네’ ‘설운돋네’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각각이 특정한 의미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어원이라 할 수 있는 ‘돋네’의 일종의 응용 버전인 셈이다.

단순한 오타가 그들만의 언어로 자리 잡은 경우도 있다. ‘젭라’ ‘빠릴’ ‘미’는 ‘제발’ ‘빨리’ ‘뭐임’을 잘못 입력한 사례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넷상에서 빠르게 키보드를 누르다가 생긴 오타가 본래의 단어를 제치고 하나의 언어로 정착했다. ‘넹버’(네이버), ‘당므’(다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역전 현상을 학술 이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ㄷ고등학교에 다니는 유진오군(17)은 “일종의 재미있는 놀이이다. 많이 쓰이는 말에 이것저것 말을 붙이다가 재미가 있으면 확산되는 것이다. 엄마가 가끔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시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농담도 설명하기 시작하면 재미없어진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만 이런 말들이 쓰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세대 간 문화 차이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단순한 재미 추구를 넘어서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은어도 청소년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8월24일 오후 서울 은평구 구산사거리 부근 한 버스 정류장에는 여고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한 학생이 “나 어젯밤에 로또 1등 되는 꿈 꿨어”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그럼 뭐해. 현시창”이라고 답했다. ‘현시창’은 ‘현실은 시궁창’의 줄임말이다. 노래 가사에서 차용된 이 단어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낄 때 주로 사용된다.

확대 재생산을 거듭하는 은어들은 청소년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청소년의 은어 사용이 우리말을 훼손하고 사회성 결여로 이어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그들만의 강한 집단의식으로 인해 폐쇄적 사고가 형성되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회성 상실을 겪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이 시기 청소년 세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과거에도 언어의 변형은 엄연히 존재했다. 성남청소년지원센터 상담지원팀 김영환 팀장은 “기성세대에도 은어나 비속어 사용이 존재했지만 당시에는 가족의 일원이 적절히 제재할 수 있었다. 현재는 그런 역할을 해줄 어른이 없다. 따라서 청소년들의 은어 사용 수준이 허용치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청소년 문화에 대한 이해도 병행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는 은어가 일상적인 언어이고 ‘소통’을 위한 언어 발달의 한 과정이기 때문에 은어를 사용하는 현상 자체를 그들만의 문화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