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공정’ 없이 미래 없다
  • 김윤태 | 고려대 교수·사회학 ()
  • 승인 2010.09.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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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환 전 장관 딸 특채 파문이 주는 교훈 / 국민 통합하려면 정의의 편이라는 믿음 줘야

15세기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스트’라는 말은 모두가 싫어한다. 마키아벨리즘이 사회의 도덕적 토대를 위협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상당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사용된 불법적 폭력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이 결과에 의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를 세우는 과정에서 형을 죽인 로물로스의 경우처럼 결과가 좋으면 항상 용서받는다. 그렇지만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불법적 행동을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모두가 개인의 사리사욕과 당파심에 빠져 있다면 공동체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선이 아니라 공공선이며, 이러한 공공선은 오직 공화국에서만 중요시된다”라고 말했다. 시민들의 미덕은 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보다 공공선을, 자신의 후손보다 공통의 모국을 앞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공공선을 존중하는 미덕을 갖게 되는 것일까? 마키아벨리는 <로마사론>에서 두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첫째, 어떤 국가라도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가 올바른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위대함을 달성하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1950년대 이승만 시대에 만연된 부패를 생각하면 신중한 건국의 아버지를 갖지 못한 한국은 항상 ‘다소 불리한 위치’를 가진다. 부패의 시작은 미덕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위대한 지도자란 항상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가진 탁월한 미덕을 심어주는 재능을 가진다. 공공선을 존중하는 미덕을 고양하는 방법으로 교육의 역할과 함께 강력한 법과 강제력이 필요하다. 고대 중국의 한비자가 주장한 대로 엄격한 상벌 제도가 필요하다. 한비자는 상과 벌을 주는 데 공정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 이명박 대통령이 9월8일 중소기업 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조찬 간담회를 갖기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되새겨라

어느 기업체 임원에게 들은 말이다. 서울대 졸업생의 ‘질’이 달라졌다고 했다. 학생들의 학업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지역 균형 선발제 인원을 대폭 늘리면서 ‘집안 배경’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기업에서는 대학 졸업생을 개인의 능력만으로 선발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모 직업이 회사에 도움이 될지 고려할까? 모든 회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은 연줄이 취업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유명환 전 외교부장관의 딸이 외교부 특별 채용을 거쳐 임용되면서 커다란 논란이 일었다. 역시 집안 배경이 더 중요한가? 민주공화국에서 ‘현대판 음서제’가 공직 사회 곳곳에 만연했다는 의혹이 커졌다. 당연히 국민의 공분이 하늘을 찔렀다. 유명환 전 장관은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공정사회’를 망친 사람으로서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데 대해 외교부에서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외교부의 보수적 분위기와 패거리 문화가 ‘내 식구 감싸기’가 되었다는 비난이 커지고 있다.

한국의 상류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는커녕 본인과 자식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위장 전입, 병역 기피, 재산 도피는 상류층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처럼 보인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에서 자녀 교육을 위한 위장 전입은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인다. 청와대에서도 인사 검증을 거쳤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위장 전입으로 처벌받아 전과자가 된 사람은 5천명도 넘는다.

개인 역량 키워주는 ‘기회의 공평’ 지향해야

어떤 이들은 “자식 위해 못할 것이 없다”라고 거리낌없이 말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위장 전입, 스폰서 유학, 병역 면제, 탈세도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자세이다. 그러나 자녀 사랑과 이기심의 확대는 구분해야 한다. 지나친 탐욕은 결국 사회적 격차와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 지도자의 노력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건국 당시 미국은 공정한 사회가 아니었지만 계속 변화했다.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령을 선언했고,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기업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공정거래법을 제정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는 사회보장법을 추진했다. 존슨 대통령은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공민권 법안을 제정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돈이 없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의료보험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미국도 완벽하지는 않다. 아직도 인종 차별은 남아 있다. 엔론과 월드컴의 분식 회계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의 부정부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상위 10%의 사람들은 하위 10% 사람들보다 시간당 5.8배를 더 번다.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 등 명문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 가운데 가난한 가정의 자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주장했다. 공정한 사회는 출발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라고 했다. 그러나 비리 사범 전과자에 대한 사면권 남발,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내각 후보자의 낙마, 유명환 전 장관 딸의 특채로 인해 빛이 바랬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공정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1980년대 민주정의당은 가장 비민주적이고 가장 정의롭지 못한 정당이었다. 수사의 모순에 빠진 것이다. 불공정한 정부가 공정한 사회를 외친다면 정말 ‘굴레’가 될 뿐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방법론을 보자.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기회 평등만으로 시장의 불평등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옛 소련식 기계적 평등은 실패했다. 그러나 적극적 재분배 장치가 없다면 사회 형평성을 확대하기 어렵다.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새로운 평등주의’를 위한 방법으로 개인 역량을 강화하는 국가, 기업을 감시하는 시민 경제, 시민과 국가의 책임 공유, 부유층과 빈곤층의 사회 협약, 사회 불평등의 대물림을 축소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시장이 만든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기보다 개인의 능력을 키워주자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의 말대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사회적 역량’을 키우자는 방법과 일맥상통한다. 국가는 세금을 올려 복지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에 더 투자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을 당장 절반으로 낮추고 국가의 장학금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지방의 가난한 학생들이 명문 대학에 더 많이 입학할 수 있도록 할당해야 한다. 그래야 집안 배경이 아니라 실력에 따른 공정한 출발이 이루어질 수 있다.

국민 대다수가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미래가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마이클 샌들이 말한 대로 사람들이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사회는 더 이상 결속력과 통합성을 가질 수 없다. 어느 사회도 완벽하게 공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원칙은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공자의 “백성이나 토지가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균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라는 격언은 지금도 정치인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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