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스타리그’에 빠져들다
  • 상하이·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0.09.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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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까지 달군 e스포츠 열기에 ‘후원’ 경쟁도 후끈…올해 대한항공이 참여하면서 규모 더 커져

지난 9월11일 오후 6시 중국 상하이 둥팡밍주(東方明珠) 앞에 한국인과 중국인 1천명가량이 모여들었다. 야외 특설 무대에서 벌어지는 스타리그 시즌2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둥팡밍주는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황푸 강의 동쪽 강변에 높이 4백68m로 솟은 건축물이다. 둥팡밍주 앞에서 외국 업체가 게임 이벤트를 주최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e스포츠가 중국에서도 인기를 끌다 보니 스타리그 주관사 온게임넷은 상하이 시의 허락을 얻어 해외 첫 결승전을 둥팡밍주 앞에서 개최할 수 있었다. 스타리그 결승전 동영상(VOD)은 한국 못지않게 중국에서도 다운로드 횟수가 높다.

ⓒ대한항공

동풍밍주 앞 특설 무대에 설치된 게이머 부스 안에서는 ‘최종 병기’라고 불리는 이영호와 ‘폭군’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이제동이 우승을 다투고 있었다. 중국 관객 상당수는 응원 구호를 담은 스크랩북을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기가 응원하는 선수가 게임을 유리하게 이끌면 환호했고, 아깝게 세트를 잃으면 탄성을 쏟아냈다. 게임이 끝나자 우승자 이영호 주변에는 중국 취재진과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중국 매체 소속 사진기자뿐만 아니라 관객이 소지한 카메라마다 플래시가 터졌다. 중국 상하이미디어그룹 산하 SiTV 게임 채널은 스타리그 시즌2 결승전을 생중계했다. 대회 주관사인 온게임넷은 중국 시청자 1억명가량이 스타리그 시즌2 결승전을 시청한 것으로 추산했다. 중국 시청자는 결승전과 함께 행사장 곳곳에 걸려 있는 대한항공 로고와 TV 광고를 보았다. 대한항공은 스타리그 시즌2 후원사 자격으로 자사 로고와 TV 광고를 행사장 곳곳에 노출할 수 있었다.

스타리그 주관사 온게임넷은 지난 10년 동안 20개 업체를 스타리그 후원사로 끌어들였다. 온게임넷은 지난 2000년 투니버스 채널에서 중계한 하나로통신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기점으로 e스포츠 시대를 열었다. 당시 통신업체 하나로통신과 스타크래프트 배급사인 한빛소프트가 후원에 나섰다. 스타리그가 e스포츠의 대명사로 떠오른 결정적 계기는 코카콜라가 후원사로 참여한 2001년 시즌1이었다. 당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결승전에는 관람객 7천명이 몰렸다. 이 대회에서 ‘테란의 황제’ 임요환 선수가 우승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코카콜라는 당시 1억원을 후원하면서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스타리그 후원사, 10년 동안 20개로 늘어나

시즌1 성공에 힘입어 시즌2에서는 SK텔레텍(나중에 팬텍으로 합병)이 후원하는 스카이 스타리그가 열렸다. 후원금 규모도 2억2천만원으로 두 배 이상 올랐다. 2002년서울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결승전에는 경찰 추산 1만5천명이 몰려들었다. e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관람객 1만명을 넘긴 것이다. SK텔레텍은 스카이 단말기 소지자들에게 관람하기에 더 좋은 좌석을 제공했다. 이 덕분에 SK텔레텍의 휴대전화 단말기 브랜드인 스카이는 15~30세 브랜드 인지도에서 삼성전자 애니콜을 제쳤다. 15~30세는 스타크래프트 마케팅 타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마케팅 효과가 입증되자 KT테크가 2003년 에버 스타리그를 후원하면서 후원금 5억원를 지출했다. 당시 스타리그에 첫 출전하는 선수가 우승컵까지 거머쥐는 일이 일어났다. 게임 마니아들은 첫 출전해 우승하는 선수를 ‘로열로더(Royal Loader)’라고 일컫는다. 로열로더의 출현은 스타리그의 흥행성을 배가시켰다.

2005년 들어 스폰서십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신한은행이 연간 후원사로 참여한 것이다. 이전까지 후원사로 참여한 곳은 정보기술(IT)업체나 통신업체가 다수였다. 신한은행 이전에는 올림푸스·파나소닉·아이큐브 같은 업체들이 후원사로 주로 참여했다. 브랜드의 역사나 업종이 오래된 업체가 후원사로 참여한 것은 신한은행이 처음이었다. 신한은행은 기존의 보수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깨고 젊은 층에게서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후원사로 참여했다. 이른바 역마케팅이었다. 신한은행은 스타리그 체크카드까지 발행하면서 스타크래프트에 열광하는 젊은 층을 공략했다. 그 이후 동아제약이 박카스라는 이름을 걸고 후원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대한항공이 스타리그 후원사로 참여한 것은 올해 초부터다. 규모나 흥행성 면에서 기존 후원사들을 압도한다. 후원금 액수는 10억원 안팎으로 알려졌다. 조현민 대한항공 IMC팀장은 “스타리그 시즌1 후원만으로 거둔 홍보 효과가 55억원가량으로 추산한다”라고 말했다. 김현호 온게임넷 사업국장은 “대한항공은 국적항공사로서 브랜드 이미지나 의사 결정 체계가 보수적이라는 인상이 강했으나 스타리그 후원사로 나서면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스타리그 마케팅을 통해 청소년들 사이에 브랜드 인지도를 높였다.


▲ 스타리그 시즌2 우승자 이영호씨.
사상 최초로 해외인 중국 상하이에서 결승전을 연 대한항공 스타리그는 약간은 뒤숭숭한 시기에 벌어졌다. 일단 블리자드의 국내 e스포츠 방송 사업권을 가진 그레텍과 한국e스포츠협회가 스타크래프트의 지적재산권 문제에 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해 향후 스타리그 운영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스타크래프트2가 출시되면서 벌어진 ‘글로벌 스타크래프트2 리그’는 협회가 아닌 그레텍이 주관하고 있는데, 결승전 하루 전날 ‘투신’으로 불리며 많은 팬을 보유했던 저그의 박성준 선수가 스타1을 포기하고 스타2 전향을 선언했다. 

 반면에 매치업은 최고였다. 최후의 라이벌인 랭킹 1위 이영호(KT)와 2위 이제동(화승)이 맞붙은 ‘리쌍록’(임요환·홍진호의 대결인 임진록을 이어받은 이(李)씨 라이벌 간 대결이라 붙은 명칭)이 성사되었다. 2010년 이전까지는 이제동이 이영호보다 반 발짝 앞서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상대 전적에서도 이영호가 16 대 13으로 앞서기 시작했고, 최근 맞붙었던 두 번의 결승전에서도 역시 이영호가 승리했다.

이번 대한항공 스타리그 결승전에서도 이영호 선수가 3 대 1로 승리했다. 이번 결승전은 네 경기를 모두 합해도 한 시간이 채 안 될 정도로 단기전이 벌어졌다. 모든 경기의 승패는 초반 빌드(기본적인 전략을 정형화시킨 것) 싸움에서 갈렸다. 심리전을 바탕으로 한 빌드 선택은 치열했다. 선택한 빌드가 통하려면 상대방의 빌드까지 예상해야 한다. 묵찌빠 놀이와 비슷하다. 특히 두 선수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정도 차이에 불과해 초반 빌드 선택에서 지고 들어간다면 뒤집을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결승전의 백미는 이제동 선수의 빌드였다. 1경기에서 패한 이제동 선수는 2경기에서 ‘4드론 저글링 러쉬’라는 올인 전략으로 승리를 거둔 뒤 3경기에서 또다시 4드론 저글링 러쉬를 택했다. ‘2경기에서 했는데 3경기에서 또 하겠어’라고 방심한 틈을 찔렀지만, 이영호 선수는 소수 병력과 일꾼을 동원한 컨트롤로 저글링 러쉬를 막아내면서 승리했다. 이제동 선수의 연속적인 4드론 기습 러쉬와 이영호 선수의 기막힌 방어가 오고 간 3경기가 결승전의 분수령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중국 관중들에게 화끈한 물량전이나 화려한 고급 유닛의 향연을 선보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고도의 심리전과 순간적인 컨트롤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또 다른 의미에서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원래 고수들 간의 대결은 찰나의 순간에 겨루는 ‘일합’에 갈리는 법 아니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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