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 큰 산맥 이룬 ‘재능의 요람’
  • 이춘삼│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0.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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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 인맥 지도 | 서울고①

 

▲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고등학교. ⓒ시사저널 윤성호

서울고는 8·15 광복 후에 개교한 학교이다. 예전 그 자리(옛 신문로 서울교 교정)에는 일제하에서 일인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경성중학교가 있었으나 서울고와는 관련이 없다. 다른 학교와 비교해 짧은 역사를 지녔음에도 한 시대에 수위를 다투는 고등학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는 그럴 만한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는 우수한 학생과 교사가 많이 모였다는 점이다. 공산 치하를 등지고 월남한 우수한 학생들의 상당수가 신생 서울고로 모여들었다. 입학생들의 대부분이 이북 지역의 명문 학교인 평양의 제1·제2·제3중, 광성중, 신의주동중, 해주동중, 원산중, 함흥중 등에 다니던 학생들이었다. 서울고 학생들 사이에는 이북 사투리가 표준말처럼 통용되다시피 했다. 자연히 학생들의 반공 의식이 누구보다도 투철해 뒷날 6·25 전쟁이 터지자 어느 학교보다 많은 학도병이 자원 입대해 희생도 그만큼 컸다. 자신을 던져 부하들을 구한 강재구 소령이 서울고 출신이다.

초대 교장 김원규 선생은 북에서 내려온 우수한 교사들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우수 교사진을 초빙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렇게 하여 서울고에 자리 잡은 교사는 문자 그대로 제제다사(濟濟多士)였다. 비록 혼란기였지만 중등학교에 재직하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교사진이었다. 서수준(전 경희대 음대 교수)·음악평론가 이성삼(전 경희대 교수)·문단의 중진인 황순원·조병화(전 인하대 부총장, 시인)·김광식(전 경기대 교수)·안병욱(전 숭실대 철학 교수)·고광만(전 문교부 차관)·남광우(전 인하대 교수)·조영식(전 경희대 총장)·안현필(전 EMI 원장)·신상초(전 성균관대 교수) 선생 등 훗날 교육계·학계·정계에 이름을 남긴 많은 스승들이 이 학교에서 오래 머무르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동문들이 또 하나 잊지 못하는 기억은 김원규 교장의 열정적인 가르침이다. 명문 학교마다 전해 내려오는 열성 교장의 전설이 있다. 부산고의 김하득 교장, 익산 남성고의 윤제술 교장, 제물포고의 길영희 교장이 그러했듯 서울고의 김교장 역시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교육 방침은 영국의 이튼스쿨을 지향했다. 사관생도식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성실과 근면을 가르쳤다.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라는 교훈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라는 훈화는 서울고인들의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았다. 이같은 교육은 외국의 어느 교육 관계자가 서울고 교정을 둘러보고 ‘티끌 하나 없는 학교(spotless school)’라고 찬탄해 마지않았을 만큼 학생들의 자세를 가다듬게 했다.

이런 전통 속에 교육받고 단련된 서울고인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훌륭한 몫을 해냈다. 그런 가운데 분야별로는 강한 분야, 다소 약한 분야의 차이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랜 역사에 비해 정계·관계 등의 진출이 다소 약하다거나 재계·금융계·언론계·학계·문화예술계 등에서는 상대적으로 괄목할 활약상을 보인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정치권에서 서울고 출신 현역 정치인을 살펴보면 7선의 기록을 세운 조순형 의원이 우선 눈에 띈다. 유석 조병옥 박사의 자제인 조의원은 ‘쓴소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시비곡직을 분명히 가리는 중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국회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의원으로 꼽히며 무게 있는 언행으로 ‘백봉신사상’을 수차례 수상했다. 검사 출신의 4선인 최연희 의원은 당 사무총장, 법사위원장을 역임한 중진으로 지역구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와 국회 안팎에서 폭넓은 신망을 얻고 있다. 언론인 출신인 문학진 의원은 국회 진출에 성공하기 직전 총선에서 당시 당선자에게 3표 차이로 아깝게 져 ‘문세표’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국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최재성 의원은, 최근 치러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고배를 마시기는 했지만 뚜렷한 소신과 강한 추진력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육사 출신의 예비역 대령인 김성회 의원은 18대 총선을 통해 여의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김의원은 지난해 7월 이른바 ‘미디어법’이 상정되었을 때 뜻하지 않은 장면에서 눈길을 끌었다. 민주당이 손잡이를 묶어 봉쇄했던 국회 본회의장 옆 출입문의 쇠사슬을 뜯어내 한나라당 의원들이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육사 재학 시절 럭비 선수를 했다는 그는 상대 당 의원들과의 몸싸움에서도 ‘괴력’을 발휘해 화제가 되었다. 비록 다섯 명이라는 소수이기는 해도 이들은 서울고 동문이라는 유대감으로 소속 당을 떠나 선후배 간의 우의를 두텁게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 수준의 명문 학교를 지향해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서울고의 노력은 대학 합격률에서 그 진가가 드러났다. 개교한 지 3년이 되는 1949년, 이 신생 학교의 졸업생에서 1~2명을 제외한 1백35명 중 98%가 서울대에 합격하는 이변을 낳아 주위에 충격을 주었다. 그 후로도 줄곧 전국 학력고사와 대학 입시에서 전체 수석의 기록을 낳는 등 화제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관계에 진출했던 동문들 중에 발군의 실력으로 주목을 받았던 인물들이 적지 않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주미 대사를 역임한 김경원 사회과학원 원장은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도미 유학길에 올라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뉴욕 대학과 고려대에서 강의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국제정치 담당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5공이 출범할 즈음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기용되었고 유엔 대사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뛰어난 영어를 구사하는 그는 지금도 영어사전을 곁에 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정부 고위직에 있는 동문으로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에 재임할 당시 부시장으로서 보좌한 인연으로 현 정부 들어 행정안전부장관을 거쳐 현직에 올랐다.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임채민 국무총리실장, 정창수 국토해양부 1차관, 노대래 조달청장, 윤영선 관세청장, 이태용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이현구 청와대 과학기술특별보좌관, 김용환 금감원 수석부원장을 비롯해 정부 부처 고위직에 몇몇 동문들이 눈에 띈다.

최근 새로 부각된 임채민 총리실장은 현 정부의 초대 지식경제부 1차관으로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의 조직 통합 작업을 이끌었다. 서울 출신에다 서울고-서울대 출신이라는 학력으로 지역색이 없고, 정·관계와 언론계를 막론하고 인적 네트워크가 탄탄하다는 평을 듣는다.

언론계에 윤세영·김대중 등 거물들 우뚝

현역 외교관으로는 박명준 주사우디 대사, 변종규 주시카고 총영사, 서석숭 주슬로바키아 대사, 신각수 외교통상부 1차관, 이정관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전비호 주불가리아 대사, 조성환 강원도 국제관계 대사가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전직 외교관으로는 신두병 외교문제연구모임 회장,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장관, 이규형 전 주러시아 대사, 임성준 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주철기 유엔글로벌콤팩트 사무총장이 있다. 김관진 전 합참의장은 서울고 출신으로 처음이자 유일한 4성 장군이고, 이정린 성우회 정책위 의장을 비롯한 예비역 장성이 배출되었으나 사관학교에 진학한 동문 숫자에 비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법조계에서는 김용준 법무법인 율촌 상임고문이 헌법재판소장을 지냈다. 이시윤 현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변호사는 감사원장을 역임했다. 국내 민사법 학계의 원로인 이 전 원장은 서울대 법대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각급 법원 판사를 거쳐 춘천·수원지법원장을 지낸 후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했다. 현재 민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민사소송법의 대가로서 그의 저서는 법학도의 필독서로 꼽힌다. 그 밖에 대법관을 역임한 법조인으로 김용담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변재승 법무법인 화우 고문이 있다.

검찰에서는 검찰총장을 역임한 송광수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가 두각을 보였고 ‘영원한 수사 검사’ 심재륜 전 대구 고검장은 특별수사통으로 이름을 떨쳤다. 대검 중앙수사부장 시절 YS의 아들인 김현철씨를 구속시키는 등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사건을 처리하는 뚝심이 돋보였던 검사이다. 김영수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은 검사와 안기부 차장, 국회의원,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문화체육부장관을 역임하고 한국농구연맹 총재를 지낸 다채로운 경력을 지니고 있다. 이재후 김&장 대표 변호사는 국내 대형 로펌의 효시를 이루어냈고, 신영무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역시 굴지의 대형 로펌을 이끈 변호사로 유명하다. 유언 제주지법 서귀포시 법원 판사는 부산·수원·서울에서 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내고 변호사 개업을 해 10년 동안 활동한 뒤 다시 ‘시·군 법원 판사’라는 조촐한 자리로 돌아가 잔잔한 화제를 일으켰다. 정성복 현 KT 윤리경영실장은 검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각급 검찰청 검사와 부장검사, 대검 감찰과장 등을 역임한 그는 2009년 1월부터 KT라는 거대 조직의 내부 감찰을 담당하는 윤리경영실장을 맡아 내부 자정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서울고 출신들은 대체적으로 언론계에서 강세라는 평을 들어왔다. 신동호 전 스포츠조선 사장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두 차례 맡은 언론인이다. 주필, 편집인, 대표이사를 지냈으나 약관 33세에 사회부장으로 발탁된 ‘영원한 사회부통(通)’이다. 그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서울고 출신들이 편집국 부장단의 다수를 점했고 후배들은 그를 ‘신 두목’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따랐다. 김동익 전 중앙일보 대표이사 역시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자리를 옮긴 중앙일보에서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한 원로 언론인이다. 언론계를 떠난 후에는 정무장관과 송담대 총장을 지냈고, 저술 활동도 활발하다.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그의 칼럼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의 자리를 굳혔다. 그 밖의 현역 언론인으로는 윤세영 SBS 이사회 의장, 이병규 문화일보 사장, 변용식 조선일보 편집인, 문창극 중앙일보 대기자 등이 있다. 한국일보 출신의 이성준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용식 21세기방송통신연구소 이사장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해 KBS 보도국장, 보도본부장을 지냈으며, 3선의 국회의원과 국회 사무총장까지 기록한 다채로운 경력의 ‘재주꾼’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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