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이 남북 관계에 시사하는 것은 국가 간 화해를 위해서는 당사국 지도자들의 만남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대외적 여건을 마련하는 데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대통령의 관계가 그랬고, 대내적으로는 분단 독일의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의 지도자들의 공감대 형성이 있었다. 그 시작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 간의 만남이었다. 1957년부터 1966년까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분단이 갖는 의미를 누구보다 깊게 경험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최장수 총리(1982~1998)로 기록되는 기민당의 콜 총리는 집권 후 사민당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을 계승했다. 콜 총리는 동독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고, 재임 중 동·서독 정상회담을 열었으며, 인적·물적 교류를 확대해나갔다. 이처럼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당적과 관계없이 콜 총리가 이어가면서 일관성을 보였다.
겐셔 서독 외무장관에 대해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겐셔 장관 스스로가 동독 출신임에도 1952년에 서독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즉, 겐셔 장관 스스로가 공산 체제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유에 대한 갈구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가 동독 외무장관을 만날 때 더 허심탄회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겐셔는 외무장관직을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역임했다. 오랜 세월 외무장관 자리에 있었던 만큼 정책의 일관성과 전문성을 지닐 수 있었다.
정권 아닌 정부 차원 통일 전략 세워야
이와 비교하면 한국의 경우는 매우 대조적이다. 1945년 한반도 분단 이래 1994까지 김일성 주석과 첫 화해 무드를 연출한 것은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권력을 승계한 뒤 나온 화해 제스처는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과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었다. 2회에 불과한 정상회담에 장소도 두 번 모두 평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북 접촉의 실무진도 정권에 따라 바뀌었으며 한 정권 내에서도 단명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임동원 국정원장 그리고 김만복 국정원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독일인들에게 다시 하나의 독일로 합치기를 희망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까지 염원하게 만들었다. 반면, 서독의 동방 정책과 비슷한 시기인 1972년에 나온 7·4 남북 공동성명은 정권 유지 차원에서 필요했었고,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연속성을 띠지 못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 사항도 집권당이 바뀌면서 그대로 이행되지 않고 혼선을 빚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의 대통령 임기가 김영삼 정부 이래로 5년 단임제를 취한 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새로운 대북 정책이 나오는 등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펴지 못하는 맹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에서 보듯이, 국가 간 대화 상대와 대화 채널의 일관성은 신뢰 회복과 신뢰 구축 면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독일처럼, 통일의 여건은 위로부터의 변화 추진과 민초들의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갈망이 합치될 때 무르익는다. 그런데 북한은 개방적이었던 동독 사회와 크게 달라 북한 인민들 스스로의 변화 시도는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게다가 3대 세습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왕권 같은 권력은 복잡성을 더하고 있다, 즉, 남한의 시한부 국가 원수가 북한의 왕족을 만나는 형국이니 정상회담은 일회성에 그치는 양상이다. 결국 정상 간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통일의 물꼬를 트는 독일 통일 방식을 한반도에 적용하기는 힘들어지고 있다.
처음부터 독일의 통일을 찬성했던 주변 강대국이 없었던 것처럼, 한반도 주변 강대국 즉 6자회담 참여국도 남북한 간의 현상 유지를 선호하고 있다.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에 대비해서 군과는 별도로, 독일처럼 다자간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독 정부가 기민당과 사민당의 당략을 떠난 일관된 외교 정책을 추진한 것처럼, 한국도 정권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의 전략이 필요하다.
동독 지역의 ‘살림살이’ 좀 나아졌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