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과 유럽 통화 통합은 ‘한통속’이었다
  • 조명진│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0.10.18 16: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슈피겔> 보도 ‘독일 외무성 공개, 통일 독일 비사’에서 통독 전 유럽 국가 대다수가 반대 목소리 낸 정황 밝혀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 동·서독이 1년 안에 통일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독일 외무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극적인 협상이 동·서독이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부터 독일 외무부는 1898년에서 1990년 사이의 독일 통일 과정과 관련된 서류들을 비밀 서류에서 일반 서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 서류들을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이 기사화했다. 

▲ 지난해 11월9일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광장에서 펼쳐진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 불꽃놀이. ⓒEPA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6주 전에 모스크바 크렘린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영국의 대처 총리와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 독일군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처 총리는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고향이 20여 차례 폭격을 당했고, 10대였던 그녀는 식탁 밑에서 숙제를 한 적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이보다 더 심한 경험을 했다. 할머니는 독일 점령군에 의해서 심문당했고, 그는 독일군이 집단 학살을 한다는 소문 때문에 마구간에 몸을 숨긴 적이 있었다.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과 영국 총리 간의 만남에서 누가 먼저 민감한 통일 독일 문제에 대해서 말을 꺼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만남에 대한 공식 의사록을 남기지 않기로 양국 간에 합의한 상태에서 만남이 성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측근들의 증언을 통해서 누가 먼저 통일 독일에 대해서 언급했는지가 밝혀졌다. 바로 대처 총리였다. 문제는 그녀가 독일 통일에 대해서 확고부동하게 반대했다는 점이다. 대처 총리는 아울러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모든 서유럽 국가가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 고르바초프는 자신도 영국처럼 독일 통일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동독의 붕괴가 다가올수록 2차 대전 승전 4개국 중에 두 나라인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 통일에 대해서 더욱더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 같았다.

독일 통일을 반대하는 것은 유럽 국가들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샤르미 총리는 공개적으로 “독일이 통일되면, 한때 대다수의 독일인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이기로 결정했었기에,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어 다시 과거로 회귀할 것이다”라며 독일 통일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탈리아의 주올리오 안드레오티 총리도 ‘새로운 범게르만주의(new pan-Germanism)’에 반대를 표명했고, 네덜란드의 루드 버버스 총리도 독일의 자결주의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은 독일 통일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게다가 폴란드조차도 독일 통일에 대해서 비관적 입장이었다. 따라서 1989년 시점에서 독일 통일은 아무리 빨라야 1995년은 되어야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냉전 시절 서독과 동독은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간 최전방으로서 아홉 개국의 1백50만 병력이 이곳에서 대치하고 있었고, 양측이 모두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10월3일 독일 통일 20주년 공식 기념식에 참석해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AP연합

미국, 나토 안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에 찬성

대처 총리는 소련의 독재 체제를 경멸했지만, 소련군이 동독 진영에 가능한 한 오래 주둔해야 한다는 것을 지지하며 “우리는 언젠가 통일된 독일의 견제 세력으로서 소련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의 입장은 나토(NATO) 안에서 이루어지는 통일 독일은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즉, 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하는 독일인들에게 대한 일종의 경고적인 태도였다.

독일 통일을 위한 포커 게임은 1989년 11월21일에 시작되었다. 소련 중앙위원회 독일담당비서관인 포르투갈로프는 크렘린에서 지시하는 내용들을 서방측에 건네는 역할을 맡아왔는데, 이날 콜 총리의 외교정책보좌관인 호스트 텔치크를 방문했다. 포르투갈로프에게 있어 소련의 목표는 불가피한 베를린 장벽 붕괴 과정을 소련에 유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만남에서 포르투갈로프는 독일 문제를 해결할 장기적인 계획은 독일이 나토로부터 탈퇴해, 독일 영토에 있는 서방의 핵무기를 철수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독일은 어떤 형태로든 통일된 국가 형태를 갖추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서독 정부에 알렸다.

이때 텔치크는 포르투갈로프의 방문 의도와 메시지를 잘못 해석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불과 2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소련 지도부가 이미 독일 통일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고 전율하며 이 사실을 콜 총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콜 총리는 총선이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집권 기민당의 지지율이 저조해 걱정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텔치크는 포르투갈로프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통일에 관해서 독일 계획(Germany Plan)을 내세워 새로운 리더십으로써 여론을 기민당에 유리하게 돌리자고 제안했다. 콜 총리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며 상기되었다.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콜 총리와 겐셔 외무장관은 한때 좋은 사이였고 서로 친구라고 여긴 적이 있었지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콜 총리는 국민적 인기를 받고 있는 겐셔 장관이 통일 논의가 본격화되면 역사책에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던 차였다.  콜 총리는 독일 통일을 위한 10가지 계획안(10-Point Plan for Reunification)을 작성하는 일로 주말을 보냈다. 콜 총리의 부인이 직접 그 계획안을 타이핑했다. 11월28일 국회에서 그 계획안을 제안했을 때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어떤 독일 총리도 2000년 안에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 총리의 제안은 서독 밖 모든 관련 당사국의 분노를 자아냈다. 독일 통일은 서독 단독으로 결정하거나 진행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콜 총리가 국회에서 통일 계획을 제안하기 전에 적어도 2차 대전 승전 4개국과는 의논을 하거나, 통보를 했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듀마 외무장관은 독일이 점점 더 거만하게 처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듀마 장관의 아버지는 2차 대전 동안 나치 독일군과 싸워 목숨을 바친 레지스탕스 멤버였다.

독일식 6자회담인, 통일을 위한 4+2 회의는 수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1990년 2월13일에는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이 영국의 허드 외무장관과 프랑스의 듀마 외무장관뿐만 아니라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 소련의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과 다섯 차례 협상을 했다. 허드 외무장관은 겐셔 장관과 듀마 장관을 1990년 상반기에 1주일에 한 번꼴로 만났다.

겐셔 외무장관은 통일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다는 사실이 문서에서 나타났다. 콜 총리는 겐셔 장관이 심장부정맥에 시달리고 있어서, 1990년 총선 전에 사망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었다. 실제로 그는 통일 협상 중에 상태가 악화되어 회담을 중단하고 군 의료관의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독일 통일 협상에 관련한 미국측 실무진 가운데는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소련 전문가 콘돌리자 라이스와 현 월드뱅크 총재인 로버트 졸릭 같은 젊은 외교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시 미국 대통령조차 당시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결정을 못하고 있던 차였다. 국가안보이사회(NSC)의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의 자문에 따라 일단은 현상 유지(status quo)에 만족하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상황이 안정되는 한 양분된 독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새로 짓고 있는 유럽중앙은행(ECB) 본사 건물. ⓒAP연합

마르크화를 희생하고 산 통일?

미국이 바라는 독일 통일의 우선 조건은 통일 독일이 나토 안에 잔류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독에 10만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던 상황과 연관된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콜 총리는 1990년 2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나 서로 합의한 사항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콘돌레사 라이스는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당시 동독에는 35만명의 소련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달 콜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주저 없이 “독일은 어떤 길을 택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라는 말로 콜 총리에게 가장 강력한 트럼프 카드를 쥐어주었다. 만일 고르바초프가 당시에 통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1천억 마르크를 요구했다면 우리는 지불했을 것이라고 콜 총리를 수행했던 텔치크 보좌관은 회고했다. 하지만 소련은 독일로부터 차관을 기대했다. 차관에 대한 협상은 1990년 8월에 시작되었다. 소련은 당초 3백60억 마르크를 요구했다. 하지만 서독 정부는 30억 달러를 제시했다. 협상이 진전됨에 따라 소련은 1백85억 마르크로 요구 금액을 낮추었고, 독일은 60억 마르크로 금액을 높였다. 이 협상에는 양국 지도자들이 직접 관여해 9월7일 전화 통화에서 콜 총리는 80억 마르크로 올렸지만, 고르바초프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3일 후 콜 총리는 1백20억 마르크로 차관 금액을 최종 제시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만족하지 않으며 협상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자고 하자, 콜 총리는 무이자로 30억 마르크를 추가해서 차관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통일 협상 과정에서 소련에 지불된 총액은 5백50억 마르크에 달했다.

서독 마르크가 통일을 위해 희생한 것인가. 독일 국민들 전체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고 있을 무렵, 서독 정부와 프랑스 정부 간에 유럽 통화 통합에 대한 비밀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 정부 내부 문서에 따르면 이 협상은 거의 무산될 지경이었다. 그러면 독일은 통일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자국 화폐인 마르크를 희생한 것이란 말인가.

현 재무장관인 볼프강 쇼이블레는 당시 핼무트 콜 총리 밑에서 내무장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독일 통일을 설계한 사람이다.  쇼이블레 장관은 자신의 전임이었던 사회민주당의 피어 스타인부르크 의원이 쓴 책에서 독일 마르크를 포기한 것은 독일 통일을 위해 취한 양보 중 하나라고 표현된 것에 심기가 불편했다. 소이블레 장관은 그런 타협은 없었으며, 통화 문제는 통일을 위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작은 부분이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스타인부르크 의원은 프랑스 정부 대표자들이 하나같이 자기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인정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 통일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독일인들은 통일을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던 동독의 민주화 운동, 소련 연방의 해체, 서독 콜 총리의 단호함 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었다. 그러나 독일 경제 성공의 상징인 도이체 마르크를 포기한 것이 자본주의 서독과 공산주의 동독의 통일을 일구어내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새로운 관점이다. 사실 유로화 지폐와 동전이 통용되기 시작한 때가 통일된 후 10년이 넘게 지난 2002년이었기에 이 문제는 쟁점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정책 고문이었던 우베르 데드랭에 따르면 미테랑 대통령은 서독이 통화 통합에 양보하지 않으면 독일 영토가 확장되는 것을 승낙할 용의가 없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즉, 미테랑 대통령은 유럽 통합의 진전이 담보되지 않는 독일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데드랭의 독일측 카운터파트인 서독 정부의 프랑스 담당관 요아힘 비터리히는, 유럽 통화 통합은 독일 통일 없이도 탄생했을 것이라며 이면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당시 통화 통합에 이견이 팽팽하게 대치

이렇게 팽팽하게 이견을 보이는 상황은 정치인들과 해당 부처 담당관들 간 논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결국 프랑스의 주장이 맞다면 통일을 자축하는 독일 국민들에게는 먹구름을 드리우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로화에도 타격을 줄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유럽연합이 그리스와 경제적으로 난관에 봉착한 다른 유로존 국가들에게 억지로 구제 금융을 제공하기 전에 독일의 입장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유로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여온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인 슈레더 전 독일 총리는 유로를 ‘병든 미숙아’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유로에 비판적인 독일 인사들도 독일은 강제로 유로를 선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의 데이비드 마쉬 같은 사학자는 독일 통일과 통화 통합은 1989년에 서로 얽혀 있었던 중대 사안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일 외무부의 기밀 서류로 분류되었던 문서들을 입수한 <슈피겔>은 이전에 알려졌던 것보다 이 두 중대 사안이 서로 훨씬 더 연관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 내부 문서들에 따르면 서유럽 국가들 전체가 통일에 반대한 만큼 프랑스·독일 관계도 관계 단절의 위험한 상황까지 치달았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독일 정부가 1913년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과 맞선 것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배경이 된 것처럼 독일이 유럽에서 다시 고립된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만일 서독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독일 통일과 통화 통합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신속히 진행되었다. 급기야 1990년 여름 동·서독의 대표들은 통일 조약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0월3일 공산 독일민주공화국(DDR)을 이루었던 동쪽의 주들은 독일연방공화국(FRG)으로 합류했다. 같은 해 12월 유럽경제공동체(EEC)의 회원국 정상들은 로마에 모여 유럽 통화연맹에 대한 정부 간 회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1992년 유로의 도입에 관한 마스트리트 조약이 체결되던 그 순간은 겐셔 독일 외무장관으로 하여금 긍지를 느끼게 만들었다. 겐셔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마스트리트 조약은 독일 통일 과정에 내가 공약한 것들을 이행하는 상징성을 지닌 것이었다. 통일 독일은 유럽 통합을 확고한 의지로 추진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독일 마르크화의 포기가 통일의 대가였는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렇다고 답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유로에 대한 중요한 결정들은 독일 통일 이후에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독 공산 정권의 붕괴가 유럽의 공동 화폐 도입으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기 힘들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에 유럽 통화 통합은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머물렀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통화 통합은 통일 독일을 유럽공동체에 묶는, 정치적으로 중차대한 수단이 되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