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일해도 늘 그 자리”
  • 조현주 기자 (cho@sisapress.com)
  • 승인 2010.10.2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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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20대 워킹푸어족의 ‘밑 빠진 독에 꿈 붓기’ 일상 / 학자금 대출 상환까지 엎친 데 덮쳐

 

ⓒ시사저널 임준선

 “9월30일, 일하던 곳이 문을 닫았습니다.” 지난 10월5일 늦은 오후, 서울 건대입구역에서 만난 이승원씨(27)가 처음 건넨 말이다. 일자리를 잃은 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씨는 꽤 덤덤해 보였다. 그는 말문을 열면서 자신의 다이어리를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다이어리의 일정표에는 ‘고용지원센터’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명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씨는 “실직자와 구직자가 되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런 일에 대응이 빨라지는 것 같다. 오전에는 실업급여를 신청하려고 고용지원센터에 다녀왔다. 가보니 나처럼 젊은 또래의 사람들이 꽤 많았다”라며 다이어리를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이씨는 원래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하며 학문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취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 것은 지난 2008년이다. 당시 작은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몸져 눕게 되고, 어머니 역시 함께 병석에 앉았다. 이씨는 “외동아들이라 부모님을 간병할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당장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급히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이삿짐을 나르기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라고 말했다.

  4년제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음에도, 이씨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대학원을 다녔다는 사실부터가 걸림돌이 되었다. 이씨는 “원래 대학원 정도 다니면 ‘기사 자격증’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격증이 없다 보니 입사 원서를 쓸 때마다 안 좋은 평가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취업에 실패하자 이씨는 지난해 1월부터 7개월간 청년 인턴제의 일환인 행정인턴으로 일했다. 지난해 9월부터는 서울의 한 건축 관련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직원이라고는 이씨 한 명뿐인 작은 회사였다. 이씨는 “원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싶었다. 건축 관련 회사에 지원한 것도 대학교 때 환경공학을 전공한 것을 활용하고 싶어서였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1년간 열심히 다녔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서울에서 건축회사에 다닐 때만 해도 1백30만원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데도 가계부는 적자일 때가 많았다. 먼저 집세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지방 출신이다 보니 주거비로 드는 돈이 만만치 않다. 고시원에서 생활할 때에도 매월 방세로만 30만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거기에 교통비와 통신비, 식비, 부모님께 보내 드리는 생활비 등을 합치면 아무리 아껴 써도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

“더 벌겠다고 취직한 곳이 알고 보니 다단계”

지난달만 해도 수입은 1백30만원이었지만 지출은 1백42만원으로 결국 적자였다. 이씨는 “한 번은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다단계 회사에 취직한 적이 있었다. 물론 취직하고 나서야 다단계임을 알았지만, 골방에 갇혀 기숙 생활을 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암울해진다”라고 말했다. 
 

▲ 워킹푸어 이승원씨가 자신의 다이어리와 병원 진료 진단서 내역을 보여주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이제 다시 구직자 신세가 되어버린 이씨는 자신의 나이를 떠올리면 종종 울적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이씨는 생계 문제, 취업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까지 앓았다. 그는 “최근 몇 달 동안은 병원을 다니면서 약을 복용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 곧 서른이 될 텐데 아직 아무것도 해놓은 것도, 가진 것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괴로워질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학만 졸업하면 어디든 들어가 사회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저 치기였을 뿐이다”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된 이씨는 다시 이곳저곳에 입사 원서를 넣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씨는 “내 전공을 살리고 안정적으로 소득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최근 알아본 인턴직이 있는데, 그곳은 월급이 90만원 수준이었다. 전공과도 연관이 있고 또 당장 돈을 벌수도 있으니 월급이 얼마인지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라고 했다.

네일아트 손 모델, 물류센터에서 물건 나르기, 제과점 판매사원, 영어학원 사무 보조, 플라스틱 승차권 안내원, 행정인턴,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까지. 한미희씨(26·여)는 나이에 비해 경험이 다양했다. 그녀는 지난 2008년부터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가까이 아르바이트와 임시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이다. 기자와 인터뷰하는 도중 한씨는 “새벽에 아주머니들과 함께 짐을 나르던 기억, 방과 후 교사로 일하면서 코피를 쏟을 정도로 힘들었던 일 등을 돌아보면 앞으로 무서워서 못할 일은 없을 것 같다”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처럼 한씨가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씨는 “빚을 갚기 위해서 당장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1년 경기도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한씨는 여느 꿈 많은 대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절망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한씨의 집에서 한씨의 대학 등록금과 학비, 생활비 등을 지원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씨는 입학과 동시에 학자금 대출을 받기 시작했다. 총 여섯 번 대출을 받으니 졸업할 무렵 한씨가 갚아야 할 빚은 2천8백만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초부터 대출금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씨는 처음 대출을 받을 무렵에는 빚은 빨리 갚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대출금 상환 기간을 짧게 잡았다고 한다. 빚을 갚기 시작한 2008년도 초반에는 대출금 상환 시기가 겹쳐서 매월 60만원씩 빠져나가기도 했다.
 
한씨는 “대출금 상환이 한 번이라도 밀리면 생활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피곤해진다. 은행 쪽의 잦은 연락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동안 나에게 일이란 그저 ‘빚을 갚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라고 토로했다. 한씨는 2~3개월에 한 번씩 일자리를 바꾸었다.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찾아 지원을 하다 보니 단기·임시 계약직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씨는 “물론 계약 기간이 길어 제과점 판매사원으로 일할 때처럼 1년 이상 근무한 곳도 있었다. 1년이라고는 하지만 임시직에 불과했고, 다른 직장에 지원할 때 경력으로 쓰지도 못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 한씨의 가계부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한씨가 작성한 한 달 가계부 내용을 보면 소득은 70만6천원인데 지출은 82만6천원을 넘어 12만원가량 적자였다. 한씨는 “가계부에 적자가 날 경우 대개 카드로 막고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그녀가 일을 시작하면서 벌어들인 소득은 일정하지 않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대학 4학년 1학기 무렵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로 당장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소득 액수를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물론 한씨가 정규직에 지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씨는 “틈틈이 중소기업 정규직에 지원서를 내곤 했는데 아직 한 번도 서류 전형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입사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청년실업해결네트워크는 지난 10월6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정부의 조속한 청년 고용 종합 대책 발표와 청년 고용과 관련한 입법을 촉구했다. ⓒ시사저널 유장훈

“다시 구직자 될 때에는 나이가 큰 골칫거리” 

다행히 지금 한씨의 형편은 조금 나아졌다. 공기업의 1년 계약직 사무 보조 자리에 지원해 합격했다. 앞으로 1년간은 월 1백20만원가량을 벌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한씨는 “내년 5월에 재계약을 할 때까지는 계속 불안할 것 같다. 게다가 다시 구직자 신분이 될 때에는 나이도 큰 골칫거리이다. 요즘 지원자들의 나이를 제한하는 곳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계약 임시직의 경우에는 경력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가장 큰 고민일 수밖에 없다”라며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한씨는 이제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신없이 일하며 지내왔지만 정작 ‘일’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씨는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직업상담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내가 가진 다양한 경험들이 앞으로 직업상담사로 일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직업상담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도 결국 ‘일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새롭게 정의하고 싶어서였다”라고 말했다.

한씨와 이씨처럼 서른이 채 되지도 않은 청년들이 돌아본 지난 시간은 그야말로 ‘절망의 늪’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적자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보다 메뚜기처럼 일터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니 자신의 생활에서 안정감을 찾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씨는 “일을 하더라도 내년은 어떻게 될지 늘 불안하다. 곧 옮겨야 할 직장이라는 생각에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언제쯤 ‘77만원 세대’라는 어두운 수식어를 벗어던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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