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시대’는 어떻게 시대의 총아가 되었나
  • 김진령 기자·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0.11.0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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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이돌 걸그룹 ‘소녀시대’가 한국과 일본 가요 차트를 석권하며 새로운 ‘황금 시대’를 열고 있다. 일본에서 이룬 소녀시대의 성공은 시들어가던 한류 붐을 되살리고 한류를 한 차원 더 높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소녀시대의 일본 열도 정복은 이전과 달리 ‘한국식 모델’을 그대로 적용해서 이룬 결과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우뚝 선 소녀시대의 ‘성공 방정식’과 신한류의 미래 등을 짚어보았다.

 

#1

30대 이상의 성인이 주로 활동하는 국내 최대의 클래식 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의 한 게시판에 클래식 박스 세트에 대한 질문이 올라왔다. 베스트 음반으로 구성된 ‘DG111’의 어느 음반이 제일 좋으냐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답변이 이어졌다. ‘좋은 음반을 고르라는 것은 소녀시대 멤버 가운데 가장 예쁜 멤버를 고르라는 것과 같다’라는 답변이 달리자 여기에 댓글의 댓글이 이어졌다. ‘참 공감가는 덧글이군요. 윤아가 제일 예쁘죠’ ‘서현 짱’ ‘타파니가 제일’ 등의 글이 잇따랐다. 아저씨들도 소녀시대 멤버를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이다.

#2

지난 10월 말 일본의 유력 경제 주간지 <닛케이 비즈니스>의 표지 모델은 소녀시대였다. 10월 초 일본에 정식으로 음반을 발매하고 10만장에 달하는 판매고를 보이며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자 경제지 표지에 등장하고, NHK 메인 뉴스에 등장하는 등 순식간에 일본 아저씨의 관심사로 소녀시대가 떠오른 것이다.

일본에서의 소녀시대 성공은 시들어가던 한류 붐을 되살리고 한류를 한 차원 더 높이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가 이전에 일본에 진출시킨 보아나 동방신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소녀시대 이전에는 일본 음악 시장의 생태계에 적응하기 위해 일본식으로 다시 다듬고, 일본 현지 매니지먼트사인 에이벡스의 협력으로 성공했다. 즉, 우리가 듣고 보는 보아와 동방신기의 모습에서 한국판과 일본판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소녀시대는 한국식 모델을 그대로 들고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데뷔곡 <Gee>나 후속곡 <Genie>는 모두 국내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곡이다. 게다가 SM과 에이벡스가 결별한 이후 첫 번째 작업으로 소녀시대를 런칭하면서 음반 유통을 기존의 에이벡스가 아닌 유니버설 계열사가 맡은 후 오히려 더 큰 성공을 얻었기에 SM으로서는 위기를 큰 기회로 만든 셈이고, 소녀시대 9인방에게는 새로운 성공 시대가 열린 것이다. 

‘퇴보 논란’ 딛고 다시 열풍의 주역으로

소녀시대의 출발은 2007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SM은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걸그룹 소녀시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8월 첫 싱글인 <다시 만난 세계>가 발매되었다. 이 노래는 곧바로 1위에 오르며 소녀시대라는 이름을 알렸다. 당시 가요계는 핑클과 S.E.S가 사라진 뒤 ‘남자 아이돌과 소녀팬’의 독주 시대였다. 일반 국민은 소녀들의 괴성 밖으로 피신했고, 한국 가요계는 완전히 ‘그들만이 리그’가 되었다. 남자 아이돌은 대중이 전혀 모르는, 따라 부르기도 숨 가쁜 노래로 가요계를 휩쓸었다.

그런 형국에 소녀시대가 등장했다. 첫 싱글이 히트했지만 누구도 오늘의 성공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당시 소녀시대는 남자 아이돌에 지친 남자팬들을 위한 마니아적 기획 그룹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가요계의 주류는 아니었다. 소녀시대는 곧바로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2007년 9월에, 원더걸스의
<텔미>가 등장했던 것이다. 원더걸스는 이미 활동하던 그룹이었으나 내부 문제로 혼란을 겪다가 멤버를 재정비하고 <텔미>로 출사표를 던졌다. 이것은 핵폭탄이었다.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학생부터 군인, 경찰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텔미> 춤을 따라 추었다. 원더걸스에 의해 걸그룹의 인기는 국민적 신드롬으로 확대되었다. 소녀시대는 2인자였다.

2008년은 ‘원더걸스의, 원더걸스에 의한, 원더걸스를 위한 해’였다. 이들은 <So Hot>과 <Nobody>의 연속 히트로 가요계를 평정했다. 원더걸스는 국민 아이돌이 되었다. 소녀시대는 귀엽고 밝은 노래들로 남성팬 층을 넓혀가고 있었지만 아직 국민적 인기는 아니었다.

2009년에 이르러 운명이 갈렸다. 원더걸스는 미국으로 갔다. 그 공백기에 소녀시대는 역작 <Gee>를 발표한다. 이 노래는 걸그룹 시대를 확정한 두 번째 핵폭탄이 되었다. 한국 사회는 <Gee>의 게다리 춤으로 또 한 번 발칵 뒤집힌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노래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이 노래는 ‘올해의 노래’ 상을 수상했다. 음악성 위주로 선정되는 이 상에서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올해의 노래 상을 탄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상의 의미는 각별했다. 아이돌에게 따라붙는 가창력과 음악성 시비에서 자유로워졌고, 걸그룹도 비주얼이 아닌 음악 평론의 평가 대상으로 격상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이런 소녀시대의 성취는 걸그룹을 가요계의 대세로 만들었다. 2009년부터는 걸그룹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심을 소녀시대가 꿰찬 것이다. 남성들은 열혈 삼촌팬으로 가요계에 돌아왔고, 그들을 중심으로 남녀노소 모두가 소녀시대를 사랑했으며, 이들은 ‘걸그룹류 최강’이 되었다.

하지만 소녀시대는 그 이후 <Gee>의 열풍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소원을 말해봐>는 음악적으로 더 성숙했지만 대중성이 조금 떨어졌고, <Oh!>에 이르러서는 퇴보 논란까지 일었다. 이때쯤 소녀시대 위기론이 등장한다. 아이돌로서의 수명이 끝나간다는 얘기였다. 귀여움에서 시작해 성숙한 섹시미까지 다 보여주었으므로 더 보여줄 것이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2009년에 소녀시대는 방송 예능 프로그램을 거의 도배하다시피 했다. 팬들은 소속사가 소녀시대를 너무 내돌린다고 비난했다. 어차피 수명이 다 되어가므로 일부러 혹사시킨다는 음울한 소문까지 돌았다.

이 대목에서 SM은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일본 진출이었다. 일본에서 소녀시대는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일본 방송의 정규 뉴스 첫 소식으로 다루어질 정도였다. 여태까지의 한류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건이었다. 이것으로 소녀시대 위기론은 일축되었고, 열도의 소녀시대 열풍은 소녀시대에게 또 다른 존재감을 부여했다.

김봉현 대중음악평론가는 “일본에서의 활동상이 국내에 역수입되면서 주춤거리던 소녀시대의 국내 활동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라고 평했다. 열도의 소녀시대 열풍은 역수입되어 한국의 뉴스와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나서서 소녀시대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아이돌의 아이콘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소녀시대는 한국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격상되었다. 소녀시대를 빼놓고는 2009년, 2010년 한국 사회를 말할 수 없다. 일본에서 실력까지 인정받았고, 수출 상품(?)으로서 경쟁력까지 확인되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소녀시대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다. <다시 만난 세계>에서 <Gee>를 거쳐 <훗>에 이르기까지,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야말로 창대한 지금이 되었다.

쉬운 노래·고른 실력 등으로 이룬 개가

▲ 새 앨범 을 내놓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소녀시대 멤버들.

소녀시대는 어떻게 ‘걸그룹류 최강’이 될 수 있었을까? 원더걸스가 미국으로 떠난 것도 호재로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소녀시대 자신의 능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소녀시대 구성원들의 실력은 압도적이다. 태연, 제시카, 서현, 티파니, 써니 등 다수의 멤버가 보컬 능력을 가지고 있고, 춤 실력도 상당하다. 미모나 신체적 우월함도 걸그룹 중에서는 단연 최고 수준이다. 개인적인 매력도 다채롭다. 예를 들어 유리는 손담비와 함께 공연했을 때 손담비를 능가하는 섹시함으로 큰 화제를 모았었다. 제시카와 써니는 예능에서 대활약을 했고, 윤아는 예능뿐 아니라 드라마까지 다방면에서 재능을 뽐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능의 시대에 이들은 최적의 엔터테이너였다. 소녀시대가 있으면 분위기가 산다. 이런 다양한 장점이 그들을 수많은 걸그룹 중에서 단연 돋보이도록 했다.

소녀시대가 한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사랑을 받기에까지 이른 것은 이들의 노래가 쉬웠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돌은 이해하기도, 따라 부르기도 힘든 노래를 격렬한 춤과 함께 들려주었었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각각 터뜨린 핵폭탄은 모두 쉬운 노래, 쉬운 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돌 그룹 안무가인 배정윤 핫칙스 단장은 “남자는 부수고 화려한 동작을 하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포인트 안무가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댄스 클럽에서 원더걸스의 <Nobody>나 소녀시대의 <Gee>가 흘러나오면 클럽 안의 남녀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따라 추는 장관이 생겼고, 유튜브를 통해 이들의 춤을 따라 추는 코스프레가 동남아는 물론 남미와 유럽에서까지 올라올 정도로 이들의 춤 동작은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세대에 상관없이 따라 부르기 쉽고, 따라 춤추기 쉬운 일종의 ‘국민 동요’로 이들은 사랑받았다. 늘 어수선하고 힘든 민생고로 고민하기 마련인 대중은 이런 생기발랄함을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국내 시장에서 아이돌 걸그룹이라는 한계점에서 주춤하던 소녀시대에게 돌파구 역할을 한 일본에서의 성공도 단순히 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침 일본에는 소녀시대 같은 한국 걸그룹의 콘셉트에 상응하는 걸그룹이 없었다. 일본 걸그룹은 귀여움 일변도였고, 한국처럼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통한 실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 블루오션에 소녀시대가 진입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멋지다’며 호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녀시대는 시대의 총아가 될 수 있었다.

소녀시대는 말하자면 한국 주류 대중음악 산업의 정화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이 재능 있는 아이를 뽑고, 훈련시켜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인 것이다. 마침 ‘제작비 절감과 최대의 광고 유치’라는 이율배반적 목표를 갖고 있는 지상파 방송에서도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 그룹을 프로그램에 투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이 이들로 채워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 뒤에는 빛을 보지 못하는 자생적 아티스트가 있다. 힙합과 록의 젖줄이 없었다면 아이돌 그룹의 음악적 스펙트럼이나 K-POP의 자산은 너무나 빈약해진다. 대규모 기획사가 정성 들여 세공한 아이돌 그룹의 성공도 의미와 가치가 있지만, 아이돌에 쏠리는 관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골이 깊어져 가는 양극화 문제도 따져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 음악계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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