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진 예비 청문회 이대통령이 직접 했다”
  • 김종대│ 편집장 ()
  • 승인 2010.12.1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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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정국에서 군 지휘 중책 맡은 신임 국방부장관 인물 탐구 / 1992년 ‘평시작통권 환수’ 주역으로 국방 개혁안 마련에도 관여

 

▲ ⓒ연합뉴스

 

‘국군의 날’이었던 1992년 10월1일 오후 3시30분. 합참 전략본부 산하 군사전략과장을 맡고 있던 김관진 대령은 우리 군의 대변혁의 서막을 알리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아 쾌재를 불렀다.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리스카시 한미연합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담판한 끝에 “1994년까지 평시작전통제권을 한국이 환수한다”라고 합의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바로 그 시각이었다. 당시 평시작전권 환수를 방해하려는 각 군의 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의 방해 공작은 매우 집요했다. 이들 방해 세력은 리스카시 사령관의 사주를 받아 평시작전권 환수의 반대 논리를 개발해 노태우 대통령의 자주 국방 의지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김희상 청와대 국방비서관과 연계해 평시작전권 환수 논리를 개발하고 자주 국방 태세 정립을 위한 조직적 활동을 펴온 중심 부서가 바로 합참 전략본부였다. 당시 합참 전략본부장인 천용택 중장 그리고 그 산하 미주전략과장인 권안도 대령과 함께 김관진 대령은 평시작전권 환수의 논리를 개발하는 군사전략과를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민주화와 통일을 추구한다’라는 외교·안보의 좌표 위에서 한국군에게 요구되는 장기적 안목의 군사 전략을 준비하는 일종의 전위대였다. 한국군 내부적으로는 ‘8·18 군제 개편’이라는 군의 혁신 운동을 촉발시키면서 밖으로는 한·미 동맹의 조정을 통한 ‘자주적 방위 태세 구축’이라는 국군통수권자의 의지를 구현하는 사상적 요람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합참 전략본부는 ‘미래의 눈으로 현재를 개혁’하는 국방 개혁의 논리를 정립했고, 이를 통해 각 군을 설득함으로써 자주적 방위 태세를 구축하려는 한국군의 역량을 결집시켰다. 이것이 결국 리스카시 사령관을 굴복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06년 11월. 김관진 대령은 어느새 네 번을 더 진급해 대장으로서 3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 김대장이 뜻밖에 합참의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전임 이상희 합참의장이 사사건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의지에 반대 목소리를 내다가 임기를 6개월이나 남겨 놓고 낙마한 데서 비롯되었다. 김대장이 합참의장으로 발탁되기 직전인 10월20일에 윤광웅 국방부장관은 미국의 럼스펠드 국방부장관과 ‘2012년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으로 전환한다’라는 합의를 성사시켰다. 윤장관은 이 합의를 끝으로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났고, 새로 부임한 김장수 국방부장관과 김관진 합참의장은 새로운 국방 수뇌부를 형성하는 ‘투 톱’을 이루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호남 출신이다.

전임자들이 전작권 전환과 관련된 모든 정치적 짐을 지고 떠난 자리에서 새로운 수뇌부들은 또다시 우리 군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국군 내부적으로는 ‘국방 개혁 2020’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밖으로는 한·미 동맹 조정을 통해 자주적 방위 태세를 구축한다는 전략적 목표는 노태우 정부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군의 역사에서 ‘미래 기획’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호남 군맥’은 항상 그 전위대 역할을 도맡아온 셈이다. 어쩌면 보수적인 영남 군맥의 기득권자들과는 숙명적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무렵 김관진 합참의장은 미래 전시작전권 전환을 준비하는 한국군의 개혁 청사진을 마련하는 데 깊이 몰입했다. 합동군사령부 창설, 각 군 사관학교 통합과 군 구조 및 부대 구조 개편 등 거시적 개혁안을 차곡차곡 구상해나갔다. 더불어 미래 한국군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합동 전장의 운영 개념도 이 시기에 최초로 구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군의 근원적 변혁을 초래할 핵심 의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안들은 대부분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2007년 당시 10·4 남북 정상회담과 뒤이어 벌어진 송전각에서의 남북 국방부장관 회담 등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당시 국방 수뇌부는 국민적 사랑을 폭발적으로 받은 인기의 주역이 되었다. ‘꼿꼿 장수’ 김장수 장관의 소신 행보, 그리고 김관진 합참의장의 조용한 뒷받침이 조화를 이룬 ‘삼각지’에 국민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결국 두 사람의 이런 기반은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현 정부에서도 계속 이어지게 된 셈이다.

청와대 내 ‘영남 세력’의 견제 있을 수도

2010년 12월4일. 이명박 대통령은 김관진 예비역 대장을 국방부장관으로 발탁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이미 국방부장관으로 유력시되던 이희원 안보특보를 물리치고 난국을 헤쳐나갈 적임자로 낙점된 것이다. 영남 인맥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특보를 물리치고, 이대통령이 김대장을 낙점한 데에는 정치적 성향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군만 바라보는 그의 과거 이러한 전력이 바탕이 되었으리라는 것이 군 안팎의 짐작이다. 신임 국방부장관을 인선할 때 이대통령이 무엇보다도 “진짜 장수다운 장수를 찾아내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임 김관진 국방부장관을 뒤에서 소리 없이 밀어준 인물이 한나라당 김장수 의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는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대통령은 김장관 내정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를 청와대로 불러 오랜 시간 면담했다. 청와대 안팎에서 “김관진 장관에 대한 예비 청문회는 이대통령이 직접 했다”라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이다. 이 면담을 통해 이대통령은 그동안 자신에게는 부족했던 위기관리와 안보 역량을 상당 부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 결국 정치 논리보다는 능력과 자질이 요구되었던 시기에 국군통수권자는 ‘김관진’을 필요로 했던 셈이다. 

이로써 제43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김관진 예비역 대장은 군심을 다잡으면서 안보 위기를 관리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미 청와대 국방선진화위원회는 과거 김관진 의장 시절에 연구된 것을 거의 베끼다시피 한 국방 개혁안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터였다. 전략가이자 개혁가인 김관진 신임 장관의 영향력은 이명박 정부에서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취임 직전에 진행된 국회 청문회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김관진 내정자를 장관 적임자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김장관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많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청와대 주변에는 여전히 김장관의 발탁을 견제했던 영남 세력들이 계속 안보 라인의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벌써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김장관이 이번 연말의 군 정기인사에서 “대장급 인사는 없다”라고 공언한 상황에서 갑자기 황의돈 육군 참모총장의 재산 관련 의혹이 일부 언론을 통해 불거져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김장관을 견제하며 육군의 대장급 인사를 도모하려는 쪽에서 흘렸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일의 진원지로 청와대가 의심받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쩌면 취임 초기에 김장관을 궁지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인사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관측도 김장관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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