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북한군에 피격될 뻔했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11.01.1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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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미가제-인민군-국군 거치며 파란만장 일생 산 윤응렬 예비역 공군 소장 자서전 요약 공개

1945년 8월15일, 수송을 위해 대기 중이던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원 하라누마 아기오는 캄보디아 프놈펜 공항에서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을 들었다. 고향이 평양인 그의 진짜 이름은 윤응렬이었다. 그에게 비행은 삶이었고 꿈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고향에 돌아온 그는, 1947년 봄 인민군 항공대 중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산 정권과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1948년 6월, 해주 앞바다를 통해 목숨을 걸고 월남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공군 용사가 되어 6·25 전쟁 때 1백7회나 출격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가미가제-인민군-국군을 거치며 숱한 생사의 고비를 건넌 드라마틱한 그의 삶은 그 자체가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이다.

공군사관학교장과 공군작전사령관,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차관급)을 지낸 윤응렬 예비역 공군 소장(83)이 최근 <상처투성이의 영광>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윤 전 소장은 1950~70년대 한국 공군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상세히 기록했다. 관련 인물과 사건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인 이야기도 나와 사료적인 가치도 있다. 주요 내용을 요약했다.

▲ 윤응렬 전 소장(오른쪽 두 번째)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 작전 장면 그림을 지난 2002년 미 7공군에 기증했다. 맨 오른쪽은 프로골퍼 미셸 위의 할아버지인 위상규 박사. ⓒ윤응렬 제공


▒ 김일성·김정일 부자와의 만남

평양정치학원 시절 김일성 부부와 김정일 형제를 만났다. 인민군 장교 복장을 한 다섯 살 김정일과 세 살 동생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여러 번 평양정치학원을 방문해 가족과 지내곤 했다. 평양정치학원 졸업식에는 꼭 참석했다. 김일성이 임석하는 평양정치학원 졸업식은 호화찬란했다. 평양 최고의 서양 요리사가 모두 동원된 풀코스의 만찬과 함께, 댄스파티가 밤늦게까지 열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광복 직후에 인민을 위한다던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생활이 그랬다.

▒ 손으로 폭탄 던진 6·25 초기

1950년 6월25일 일요일, 나는 주번사관으로 여의도 비행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북한군의 소련제 YAK-9 전투기 두 대가 여의도와 김포 기지 상공을 정찰하고 북쪽으로 사라졌다. 정오께부터 적의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되었다. 여의도 기지에 기총 사격과 폭탄 공격을 가해왔다. 6월25일 북한 전투기는 여의도를 두 차례 공습했지만, 건국기 T-6 정찰기 한 대를 파손시켰을 뿐, 목표물을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했다. 6월26일 아무런 사전 교육도 없이 우리 동기생들은 T-6 정찰기를 타게 되었다.

전투기가 없는 우리는 T-6 정찰기나 L-4, L-5 연락기로 초저공 비행을 하면서 적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폭탄도 없는 우리 항공기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나중에 육군 병기창에서 시험 제작한 폭탄을 가져와 조종사와 정비사가 폭탄 두 개를 가슴에 안고 날아가 손으로 적 탱크에 투하했다.

▒ 위험천만했던 이승만과 맥아더

1950년 6월29일 오전 10시45분쯤, 북한 야크 전투기가 수원 기지를 습격해 착륙해 있던 C-54 수송기를 불태웠다. 그런데도 일본으로부터 날아온 맥아더 장군은 예정대로 수원 기지에 착륙했다. 전용기 C-54 바탄 호에서 내리는 늠름한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맥아더 장군을 맞이하기 위해 대전으로부터 수원 기지에 나와 있었다. 그 자리에는 김정렬 공군참모총장과 무쵸 주한 미국 대사도 함께 있었다. 이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서로 껴안고 감회 어린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적의 야크기가 비호같이 달려들어 공격해왔다. 주위에는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야크기 조종사는 두 지도자를 겨누는 대신, 착륙해 있는 수송기를 향해 사격을 가해왔다. 만약 그때 북한군 전투기가 두 지도자를 공격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기만 하다.

▒ 평양의 김일성 집

평양 양촌의 양옥 저택에는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최고 간부들이 살고 있었다. 서양 선교사가 살았던 김일성의 집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책이었다. 주로 일본 서적이었다. 우리 일행은 지하 계단을 발견했다. 문을 열자 특수한 구조의 벽과 푹신푹신한 계단이 깊게 이어졌다. 따라 내려가니 30m 깊이에 원자탄 폭격에도 견딜 수 있는 김일성의 대피 시설이 나타났다. 침실, 거실, 회의실 그리고 상당한 기간 동안 거처할 수 있도록 비상 식품과 의약품이 비치되어 있었다. 환기 장치와 조명 장치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이 방공호는 한국전쟁에 미군이 참전하자마자 탄광 굴착 전문가를 동원해 단시일에 완공시켰다는 것이다.

▒ 산돼지에서 빨간 마후라로

전투조종사들은 ‘산돼지’로 불렸다. 나중에 한운사 선생이 쓴 원고에 따라 <빨간 마후라> 영화가 나온 다음부터 빨간 마후라로 불리게 되었다.

▒ 내가 겪은 동베를린 사건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공사 14기 생도들을 격려하고 있다. ⓒ윤응렬 제공

파리 주재 한국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1967년 6월13일 밤이었다. 이수영 파리 주재 한국 대사와 일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식당으로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나, 본부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오를리 공항으로 나와 주시오. 대사는 물론 누구에게도 비밀로 해야 합니다.” 급히 가보니 오를리 공항에는 육사 출신 중앙정보부 요원 백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 활동 중인 고암 이응로 화백 부부를 직접 압송해 오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독일 본에 급파된 중앙정보부(중정) 제3국 황부국장의 지시를 받으라는 것이다.

백대령은 내게 수면제 주사기와 가루로 된 수면제를 건네주었다. 소환에 반항하면 주사기로 찔러 강행하든가, 가루를 음료수에 몰래 타 마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백대령을 공항에서 차도 한 잔 나누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황부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방법에는 일절 관여하지 말고 내가 필요로 하는 일에 대해서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화백이 취임식에 초청된 것으로 꾸미기로 했다. 일은 이렇게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이화백은 아들도 동행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일단 동의한 뒤 중정을 설득했다. 이화백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자신의 대표작을 선물하겠노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마음의 갈등을 느껴야 했다.

나는 중정 이철희 3국장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우리가 타는 항공편에 다른 소환자들은 일절 태우지 말 것, 김포공항에 환영하는 가족과 친지들이 나올 테니 공항에서는 체포하지 말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자수 형식을 취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국장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코펜하겐에서 일본으로 가는 JAL기에 올라 도쿄에 도착했다. 이화백이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생질을 만나고 싶다고 해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모험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화백의 방을 감시하기 위해 마룻바닥에 엎드려 출입문 밑바닥 틈새로 방안의 기척을 살피며 밤을 세웠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해 문이 열리니 검정 지프가 다가와 다짜고짜 이화백 부부와 아들을 싣고 가버렸다. 나는 이철희 국장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이화백은 서울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중정 본부에서 이화백 부부가 간첩 활동에 사용한 송수신기와 난수표 등의 증거물을 수거해 보내라는 지시가 왔다. 파견 나온 중정 요원 정소령과 베테랑 수사관 김준위를 데리고 대사관을 나와 유리창 한 장을 부순 뒤 이화백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을 다 뒤졌지만 난수표나 세포 조직 명단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순간 “찾았습니다” 하는 김준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한 간첩들의 난수표를 보았다. 난수표는 특수 처리된 아주 얇은 용지의 넓이 3.5cm, 길이 30cm 정도 크기였다. 직경이 담배보다 약간 가늘게 둘둘 말려 프랑스 고루아 담뱃갑 안에 담배와 같이 숨겨져 있었다. 난수표에는 확대경으로 읽어야 할 정도의 작은 활자로 4단위 숫자가 가득 인쇄되어 있었다. 이제 세포 조직 명단을 찾아야 했다.

거실에 주간 잡지 <파리마치>가 1m 높이 정도의 두 줄로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했다. 이화백 부부는 프랑스어를 못했을 뿐 아니라 잡지를 살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몇 권을 넘겼을까. 잡지에 끼워져 있던 세포 조직 명단이 발견되었다. 우리는 자살용 청산가리까지 발견했다. 지금도 이화백을 그런 방법으로 데려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당시 내 행위는 국가를 위한 대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 사건’은 임석진 교수(명지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1967년 5월 독일 유학 중 북한측과 접촉했던 사실을 박대통령의 처조카인 홍 아무개씨에게 털어놓은 뒤 중정에 자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임교수는 자수하기 전 홍씨와 함께 박대통령을 만나 유럽 유학생들의 대북 접촉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으며, 박대통령은 중정에 철저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 뒷문으로 들어온 전두환 대통령

▲ 지난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1981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힐튼호텔에서 리셉션을 열었다. 나는 당시 미국 굴지의 방위산업체 에이전시를 하고 있었다. 손장래 공사는 미국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손공사의 부탁으로 나는 GD·GE·LTV 회장 등 방위산업계 유력 인사들이 참석하도록 했다. 이들은 미국 장관보다 위상이 더 높았기에 보통 이런 장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헤이그 국무장관이 주최한 리셉션장에 신변 보호 문제로 뒷문을 통해 들어와야 했다.


현재 미국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는 윤 예비역 소장은 청력이 좋지 않았다. 전화로 인터뷰를 하기가 원활하지 않았다.

사실만 쓴 것인가?

그렇다.

내용이 상세하던데 기억에만 의존한 것 같지 않다.

기억도 있고, 갖고 있는 기록도 참고했다.

책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전쟁 당시 공군의 공적은 공식 기록에는 있으나 출판물에 나와 있는 것은 없다. 나라도 그런 분들의 업적을 국민과 후세에 남기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최근 남북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유비무환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남북한 모두에 큰 비극이다. 이것을 억제하려면 국방을 튼튼히 해 북한이 오판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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