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전 부총리, “교회, 커질수록 예수와 멀어진다”
  • 정락인 기자·김새별 인턴기자 ()
  • 승인 2011.01.1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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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인터뷰 / “권력이 아닌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 되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완상 전 부총리(75)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린다. 부총리(통일·교육)를 두 번 역임했고, 대학 총장만 세 번이나 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도 맡았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낮은 곳에 있었다. 숱한 인생의 격랑을 겪으면서도 ‘나눔’과 ‘비움’에 앞장섰다. 그는 또 ‘참 종교인’으로 불린다. 기독교 장로이면서도 권력화 된 지금의 교회 현실을 앞장서 비판해왔다. 그의 저서 <예수 없는 예수 교회>(김영사)와 <한국 교회여 낮은 곳에 서라>(포이에마)는 지금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1월1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한 전 부총리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시사저널 유장훈

최근 들어 대형 교회들에서 권력 다툼과 파벌 싸움, 폭행, 성추행 등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일부 대형 교회에서 회계 비리, 폭행 등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기본적인 뿌리는 바로 예수 없는 거대화에 있다. 큰 교회는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유혹’을 받기 쉽다.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받은 세 가지 시험은 모두 ‘거대화’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은 물질적 힘과 권세, 종교적 카리스마를 주겠다고 한 유혹을 모두 이겨냈다. 예수가 거부한 것을 오늘의 대형 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추구하고 있다. 교회를 대형화하려는 ‘맘모니즘’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다. 사탄의 시험에 드는 것이다. 진정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목사라면 일부의 보도처럼 1년에 연봉을 수억 원씩 받을 수 없다.

그동안 한국 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날카롭게 비판해왔다.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직접 찾아다니면서, 씨알들과 동고동락했다. 한국 교회가 커질수록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한국의 교회는 거대화되면서 특권이 있는 곳으로 높이 올라가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 없는 교회’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선교’나 ‘전도’ 방식은 예수님이 한 것과 거꾸로 된 방식 아닌가?

요즘의 ‘전도’는 불신자들을 기독교화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공인된 종교를 찾아가서 ‘네 종교 버리고 기독교 믿어라, 안 그러면 지옥 간다’ 하는 식이다. 개종에 초점을 둔 전투적 선교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거대한 종교 조직을 만들어서 호전적으로 군림하지 않았다. 예수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을 때 예수는 혼자 산으로 가서 조용히 기도했다.

그렇다면 대형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낮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보는가?

교회 안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중산층 교회(신도 수 3백~4백명 정도)는 예산의 50%는 교회 밖에 있는 억울한 꼴찌들이나 자본주의 경쟁에서 탈락한 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 신도 수가 수만 명이 되는 대형 교회는 더 낮은 곳으로 나가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 교회 교인들 소득의 평균 이상을 받지 않는 것이 좋다. 신도 수가 1만명이 넘는 대형 교회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 인력이 있다. 예컨대 의사들만 하더라도 수백 명씩 있을 것이다. 그들의 협조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무상 치료를 한다면 교회가 얼마나 좋겠나. 그게 바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한 전 부총리께서는 ‘닫힌 신앙이 닫힌 정치와 힘을 합하여 민주 정치를 후퇴시키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다’라고 진단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어떤 뜻인가?

‘닫힌 신앙’은 원리주의적 신앙을 말한다. 닫힌 신앙에서는 ‘나는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다’ ‘나는 항상 옳고 상대는 주적이므로 적을 초전에 박살내야 한다’라는 단순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다. ‘닫힌 정치’도 이와 비슷하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항상 ‘선’이고, 반대자는 ‘불순’으로 규정한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한국에는 냉전 문화가 있다. 이로 인해 ‘색깔 칠하는 정치’ ‘닫힌 정치’가 만연하고 있다. 기독교의 닫힌 신앙과 냉전 산물인 닫힌 정치가 결합하면 무서운 결과가 나온다. 지금이 그렇다.

지금의 대형 교회에서는 ‘당회장’이나 ‘담임목사’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대형화되면 세속적 조직보다도 더 심각한 ‘반민주적 독선적 리더십’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 잘못을 덮는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Abba’(아빠)라고 불렀다. 무시무시한 신권이 아니고 어린아이들에게 친근한 엄마, 아빠 같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신도가 어떻게 공존해야 한다고 보는가? 

ⓒ시사저널 유장훈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나는 주의 종이니 나에게 복종하라’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가 바라는 바람직한 목회자상은 ‘자기 신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의 목회자’이다. 남의 발을 씻어주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입장에 서는 ‘역지사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겸손한 자세로 신도들을 대하고 그들을 진정한 교회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가장 낮고 어려운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도 의미가 있다. 그것이 목회자와 신도가 공존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대형 교회들이 ‘승리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 전 부총리께서도 승리주의를 비판했는데, 교회의 ‘승리주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국 신자들은 ‘소의 꼬리보다는 닭의 머리가 되게 해달라’라고 기도한다. ‘오늘도 승리하게 해주십시오’ 같은 기도는 잘못된 것이다. 지금의 교회는 ‘교인의 수’를 축복과 승리의 증표로 삼는다. 승리주의의 근본은 상대방을 꺾는 오만이다. 예수는 이웃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라고 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증오심을 불태우게 하는 선교 활동을 많이 했다.

최근 기독교와 불교계가 갈등하고 있다. ‘종교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낳고 있다.

기독교 신자로서 부끄럽다.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배타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 불교를 비롯한 타 종교인들을 ‘불쌍한 사람들’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로 본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을 근본적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라고 했다. 나는 길이니 나를 밟고 남을 자유케 하는 진리로 가라, 그래야 함께 생명에 이른다는 것이 예수의 참뜻이다. 예수가 말하는 ‘길’ ‘진리’ ‘생명’은 자기 비움에서 온다. 자기 비움이 없이 하나님께 갈 수 없다. 배타성은 예수가 말하는 ‘사랑’과 가장 반대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대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는 돈이, 권력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고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이다. 사랑보다 더 진보적인 힘은 없다. 스스로 낮추어서 남에게 좋은 것을 서로 주려고 하면 거기에 참 평화가 생긴다. 한국 교회는 피스키핑(peace keeping; 안보)이 아니라, 피스 메이킹(peace making; 평화 만들기)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우아한 패배, 그것이 진짜 강자의 아름다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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