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는 안 통했던 ‘PD 출신’ 이제야 통했다
  • 라제기│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1.02.1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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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윤 감독, 실패 뒤 <조선명탐정>으로 재기 성공해 ‘눈길’

도전의 연속이었고, 실패의 역사였다. 될 듯하면서도 거푸 쓴잔만 들이켰다. 별 수 없구나 싶을 때를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축배를 들 일이 생겼다. 한 방송 PD의 스크린 도전기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설 연휴 흥행 대전의 승자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었다. 3백만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불러모으며 여유 있게 흥행 왕좌에 올랐다. 김명민의 첫 코미디 연기로 화제를 뿌렸던 <조선명탐정>은 김명민의 첫 3백만 영화로도 기록되었다. 온통 김명민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이 영화에서 숨은 또 다른 승자는 김석윤 감독이다.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와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를 연출한 그는 <올드미스 다이어리: 극장판>(2006년)의 상업적 실패를 딛고 PD 출신으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흥행 성과를 거두고 있다.

▲ ⓒ미디어플렉스 제공

황인뢰·이장수 PD 등 줄줄이 나가떨어져

그동안 적지 않은 안방 극장의 스타 PD가 스크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선두 주자는 황인뢰 PD였다. <마당 깊은 집> 등을 통해 깊이 있는 영상미를 선보이며 큰 사랑을 받은 그는 1997년 <꽃을 든 남자>로 감독 데뷔식을 치렀다. 그러나 관객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평단의 평가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뒤이어 이장수 PD도 고배를 마셨다.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로 영화 못지않은 영상을 선보였던 그는 1999년 <러브>를 만들었으나 황PD의 전철을 되밟았다.

오랜 공백 끝에 2006년 도전이 이어졌다. 드라마 <고개 숙인 남자>와 <장미와 콩나물>로 안방에서 지명도를 올린 안판석 PD가 영화 <국경의 남쪽>을 만들었다. 남녀의 감성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안PD의 연출력이 녹아 있음에도 <국경의 남쪽>은 흥행에서 참패를 기록했다. 같은 해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무도리>의 이형선 PD도 스크린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만 했다. 특히 70억원가량의 만만치 않은 제작비가 들어간 <국경의 남쪽>의 흥행 실패는 충무로의 PD 기피 현상을 더욱 부채질했다.

2009년에는 ‘텔레시네마’라는 이름의 한·일 합작 기획에 의해 PD가 만든 다섯 편의 영화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TV와 스크린을 동시에 공략한다는 기획 의도는 ‘원소스 멀티유스’라는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전략에 따른 것이었지만 결과는 재앙 수준이었다. <파라다이스>와 <트라이앵글> 등 다섯 편 모두가 안방과 극장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조기 퇴장해야만 했다. 지난해에는 드라마 <다모>의 이재규 PD가 광고와 영화를 결합시킨 <인플루언스>로 극장 문을 두드렸으나 별 재미를 못보고 물러나야만 했다.

예능 PD와 다큐멘터리 PD의 약진 ‘눈길’

김석윤 감독의 흥행 성공은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정통 드라마 PD가 아닌 예능 PD가 극영화에서 성공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서사 구조를 지닌 정통 드라마의 PD가 그나마 영화도 제대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것은 충무로와 여의도의 섣부른 ‘편견’이었음이 판명 나고 있다. 

김감독이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영화를 연출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거의 모든 PD가 극장에서의 실패를 맛보고 난 뒤 브라운관으로 컴백했기 때문이다.

극영화는 아니어도 방송사가 극장에 내건 다큐멘터리가 잇달아 흥행에 성공한 것에도 방송계는 고무되어 있다. 지난해 안방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극장에서도 개봉한 <아마존의 눈물>은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10만명 넘는 관객이 찾았다. 고 이태석 신부의 고귀한 희생을 다룬 <울지마 톤즈>는 최근 40만 관객을 돌파하며 장기 상영을 이어가고 있다. 드라마국 소속이 아닌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PD의 영화판 약진은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다.   

 

<바빌론의 아들>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거북이도 난다> <칠판>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처럼 쿠르드족과 관련한 영화이다. 쿠르드족은 이라크, 터키, 이란 등의 국경 고원 지대에서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갖고 사는 3천만명의 민족이다. 근대 국경선은 이들의 땅 ‘쿠르디스탄’을 찢어놓았고, 각국에 흩어진 쿠르드족은 중동 정치의 중요 변수가 되었다.

<바빌론의 아들>은 2003년 이라크 전쟁 직후, 쿠르드 소년이 아버지를 찾는 여정을 담은 극영화이다. 12년 전 걸프 전쟁에 참전한 뒤 소식이 끊긴 아들이 바스 당에 체포된 후 남부의 나시리아 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열두 살 난 손자와 함께 길을 나선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후세인의 바스 당에 저항하다 1988년 종전 후 화학 무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소탕 작전(‘안팔’ 작전)으로 18만명이 살해되었다. 1991년 걸프전 때 미군 편에 서서 이라크군에 맞선 쿠르드족은 휴전 후 유엔 비행금지 구역 조치에 의해 사실상 자치를 누렸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쿠르드족 거주 지역은 미군의 전초 기지였고, 쿠르드 민병대는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앞장섰다.

영화에는 2003년 당시 쿠르드인의 후세인과 미군에 대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후세인을 증오하지만, 미군을 해방군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소년이 쿠르드인 학살에 참여했던 남자와 교감하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라크 여인이 할머니의 슬픔에 공명하듯이, 쿠르드인과 이라크인은 전쟁의 상흔을 함께 나눈다. 시체만이라도 찾으려다 신원 미상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 구덩이에서 정신줄을 놓은 할머니의 얼굴 위로 이라크에서 40년간 100만명이 실종되고, 25만구의 신원 미상 시체가 발굴되었다는 자막이 겹칠 때, 먹먹함이 엄습해 온다. “전쟁 반대!” 우리 시대, 가장 절박한 구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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