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째 흔들흔들 ‘전세 제도’ 무너질라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11.02.1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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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전세난으로 세입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전세금은 치솟지만 금리는 오를 기미가 없자 임대인들은 전세가 아닌 반전세, 깔세, 매매조건부 전세 계약으로 바꿔 잇속을 챙기고 있다. 임대인들의 막무가내식 요구에 세입자들의 한숨은 날로 커져만 간다.

사상 최악의 전세난이다. 서울 강남이나 잠실 등 전세 수요가 많은 곳은 3개월씩 기다려야 전셋집이 하나 나올 정도이다. 이마저도 적게는 3천만원 많게는 3억원씩 전세금을 올려주어야 전세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다.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전세금이 치솟고 전세 대기 수요가 넘쳐나자 임대인들은 이 틈을 타 전세가 아닌 반(半)전세, 깔세, 매매조건부 전세 계약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임대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 임대인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춰 임대 방식을 바꾸고, 세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집주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새로운 임대 방식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전세 제도가 뿌리째 흔들리는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이다.

반전세(전세금의 절반가량을 보증금으로 하고 나머지는 월세로 지급)가 확산된 진원지는 서울 송파구 잠실이다. 잠실에 있는 아파트는 전세금이 2년 만에 평균 2억원 넘게 올랐다. 1백9㎡(33평형) 기준으로 2억5천만원 하던 전세가 4억5천만~5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지난해 10월에는 4억원 미만이었지만 11월에 4억1천만원으로 오르더니 12월부터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해 4억5천만원까지 치솟았다. 79㎡(24평형)는 2억원대 초반이었던 것이 4억원으로, 1백45㎡(44평형)는 4억원 안팎이던 것이 6억원 전후로 올랐다. 상대적으로 소형 주택의 전세금이 많이 오른 편이다.

반전세·월세로 전환, 이중 계약서 쓰기도

▲ 서울 잠실동 신천역 부근 아파트 상가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전세, 반전세, 월세’ 시세표가 붙어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집주인들이 전세금 인상분 2억원을 목돈으로 받기보다 월세로 받기를 원하면서 반전세가 확산되고 있다. 서울 송파구 신천동에서 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정 아무개씨는 “재계약을 할 때 보증금은 2억5천만원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월세를 100만원에서 1백20만원씩 받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금리가 낮기 때문에 집주인들이 전세보다는 인상분을 월세로 받기를 원해 반전세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라고 말했다. 실제 정씨가 운영하는 중개사무소에 나와 있는 30개 매물 가운데 전세는 10개에 불과하다. 나머지 20개는 반전세이거나 월세이다. 월세는 1백45㎡(44평형) 기준으로 보증금 1억원에 월 3백만원을 내야 한다. 1백9㎡(33평형)는 보증금 1억원에 1백70만원, 79㎡(24평형)는 보증금 1억원에 1백40만원을 내야 구할 수 있다.

반전세와 월세로 전환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중 계약서까지 등장했다. 전세는 집주인이 내야 할 세금이 없지만 월세는 임대 소득에 따른 세금을 내야 한다. 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집주인이 계약서에는 전세 계약을 유지하는 것으로 작성한 뒤 실제로는 월세를 주는 계약서를 따로 작성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서 부동산 컨설팅을 하는 이민석씨(가명·43)는 “최근 고객들 가운데 집주인이 이중 계약서를 요구한다며 상담을 해 오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강남에서는 1년 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중 계약 행태가 잠실로 넘어오고 있다. 잠실이 강남 수준으로 집값과 전세금이 뛰어올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라고 증언했다.

잠실은 9호선 개통이라는 호재와 서울 강남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통망, 법조단지와 송파신도시 건설 등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최근 집값이 들썩이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초·중·고교가 아파트 단지 인근에 있고, 대치동에 있던 학원이 잠실로 많이 이동해 온 덕에 학군도 좋은 편이다. 따라서 잠실 지역 주민들은 전세금이 급등한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신천동 엘스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김 아무개씨(65)는 “2006년부터 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다섯 개씩 줄줄이 들어서면서 총 2만 세대가 동시에 공급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시세와 맞지 않게 낮은 가격에 전세가가 형성되었다. 재계약 시점에 와서야 정상적인 시세를 찾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2년 만에 2억원이 오르면서 잠실에서는 전세가 거의 사라졌다. 잠실에 있는 아파트에 거주하려면 보증금 2억5천만원 외에도 매달 100만원이 넘는 월세가 꼬박꼬박 나갈 수밖에 없다. 이 금액을 부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인접 지역인 경기도 성남 판교 지역으로 넘어가면서 이 지역도 최근 전세 가격이 두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1백9㎡(33평형) 기준으로 1억5천만원 하던 전세 가격은 최근 3억2천만원으로 치솟았다. 이 돈을 낼 수 없는 판교 지역 주민들이 용인으로 이동해가면서 전세금 인상 현상은 도미노처럼 수도권 외곽까지 번지고 있다. 심지어 잠실에 있던 세입자가 강남으로 이동해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서울 역삼동에 있는 으뜸부동산 정주환 팀장은 “송파구 신천동과 잠실동 전세금이 강남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테헤란로에 직장이 있어도 자금이 부족해 잠실에서 거주했던 직장인들이 최근 역삼동으로 돌아오고 있다. 교통비라도 아껴보려는 요량으로 강남으로 진입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 서울 강남 지역의 전세금이 2년 만에 최고 2억원까지 오르는 등 급등했다. 뒤쪽으로 한강 너머 강북 지역이 보인다. ⓒ시사저널 이종현

서울 강남, 평균 5천만원 이상 뛰고 월세 늘어

강남 역시 전세금이 뛰어오른 것은 마찬가지다. 주택 크기와는 상관없이 평균 5천만원가량이 뛰어올랐다. 서울 강남 청담동의 현대아파트에 사는 백동선씨(42) 역시 전세를 재계약하면서 5천만원을 올려주었다. 2년 전, 1백5㎡(32평)짜리 현대아파트를 전세 2억4천만원에 계약한 백씨는 올해 2억9천만원에 재계약했다. 그는 “집주인이 보증금 5천만원을 받기보다 월세로 매달 30만원을 달라고 했다. 이 금액도 1년치를 모아서 한꺼번에 3백60만원을 내라고 해서 티격태격 싸웠다. 부동산 중개인이 중재를 해준 덕에 보증금 5천만원을 올리는 선에서 합의했다”라고 말했다. 집주인이 우위에 있다 보니 상가 임대에서나 볼 수 있던 깔세(월세를 한꺼번에 지불하는 임대 방식)를 주택에까지 적용하려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강남 삼성동이나 역삼동 등 수요가 많은 아파트에는 이미 깔세가 보편화되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부동산 중개업체 럭셔리앤하우스 서성원 이사는 “한국으로 장기간 출장을 온 외국인이나 해외에 자주 나가는 국내 부자들 가운데 이것저것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깔세를 내고 아파트에 거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수요를 겨냥해 고급 아파트를 산 사람들 가운데 깔세로 임대를 주고 한몫 챙기려는 이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강남 청담동에 있는 상지카일룸 4백30㎡(1백30평)는 월세가 3천만원에 달한다. 2년 계약을 하려면 6억원을 선납해야 한다. 이런 고급 아파트에는 침대와 쇼파, TV를 제외하고는 모든 가구가 빌트인으로 갖추어져 있다.

강남에 있는 다세대주택이나 오피스텔은 월세가 대부분이다. 주택과 빌라가 밀집해 있는 역삼동에서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전세 물량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역삼동에 있는 오피스텔에 1억원을 주고 전세로 살던 한 아무개씨(29)는 계약 기간이 끝나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지만 2억원에도 구할 수 있는 오피스텔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역삼동에 있는 으뜸부동산 정주환 팀장은 “강남에 있는 전체 물량의 60%가 월세이다. 10%는 반전세이다. 나머지 30%가 전세인데 이마저도 삼성동이나 논현동 등 아파트 단지가 밀집해 있는 곳에 한정되어 있다. 목돈이 없는 직장인들이 강남에 거주하려면 역삼동이나 서초동에서는 최소 월 100만원가량을 월세로 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역삼동에 있는 다세대주택은 실평수 33㎡(10평)를 기준으로 보증금 1천만원에 월 100만원을 주어야 구할 수 있다. 빌트인으로 모든 가구가 들어가 있는 39㎡(12평) 오피스텔은 월세가 1백50만원에 달한다. 역삼동이 그나마 강남에서 저렴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 가격에 들어올 수 있다. 삼성동이나 논현동에 있는 다세대주택은 보증금 1억원에 최소 100만원에서 2백만원을 주어야 거주할 수 있다.

한남동은 부르는 게 값…‘깔세’도 많아

▲ 서울 강남역 인근의 아파트 모델하우스. ⓒ시사저널 우태윤

전세금이 오피스텔의 경우 매매가의 80%에 육박할 정도로 뛰어오른 데다가 전세 물량마저 없어 매매를 하는 것이 유리한 경우가 종종 있다. 역삼동에 있는 신세계 부동산 최성배 대표는 “한 달 전, 30대 직장인이 6억원대 전세를 찾다가 결국 못 찾고 역삼동에 있는 경남아파트를 5억7천만원에 구입했다. 단독 아파트이기 때문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전세금보다 저렴했다. 사자마자 한 달도 안 되어 벌써 3천만원이 올랐다. 시세 차익을 기대할 수 없다고 전세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집을 사는 것도 한 방법이다”라고 조언했다.

고급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전세가는 부르는 것이 값이다. 세 달 전만 하더라도 한남동 스위트캐슬 2백48㎡(75평)에서 7억원이면 전세를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10억원은 주어야 구할 수 있다. 삼성부동산 한상주 팀장은 “말도 안 되게 전세금이 뛰는데도 수요가 있기 때문에 집주인들이 전세금을 낮추지 않는다. 전세금이 너무 올라 거래를 성사시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9억원 전세를 세입자에게 9억3천만원으로 뻥튀기한 뒤 깎아준다고 하면서 9억원에 계약한 경우도 있다”라고 귀띔했다. 고급 빌라를 원하는 수요가 항상 있어 깔세도 보편화되고 있다. 세입자들이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한남동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한팀장은 “좋은 전셋집이 나오면 갈아타기 위해서 단기간 전세 계약을 맺는 사람이 많다. 6개월이나 1년 전세는 거의 없지만 월세를 한꺼번에 내는 깔세로 나온 매물은 있다. 짧은 기간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계약 방식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매매 거래가 끊긴 서울 용산구 용산동과 이촌동은 매매 조건부 전세 계약까지 등장했다. 재개발 계획이 속도가 나지 않고 금융 위기 이후 경기마저 얼어붙으면서 매매 거래가 뚝 끊겼다. 용산이나 이촌동에 있는 집을 처분하고 싶은 사람들은 집이 팔리는 기간 동안 공실로 둘 수 없어 매매조건부 전세 계약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대신 전세금을 올리지 않기 때문에 세입자 입장에서는 불리한 계약 방식임에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용산구 한강로동에 있는 국제타운부동산 송인규 대표는 “최근 전세 재계약을 하는 집 가운데 매매조건부 전세 계약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단 몇 개월이라도 1억원 넘게 오른 전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오르지 않은 전세금으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계약을 받아들인다. 몇 개월이라도 대출 융자를 받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세입자에게는 이익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재계약을 하면 세입자에게는 2년 동안 거주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법으로 따지면 매매조건부 전세 계약은 무효이다. 그러나 집주인과 세입자 간 합의에 따른 계약 조건이기 때문에 법적 분쟁으로 비하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용산은 학군이 좋지 않아 강남에 비해 평균 1억원 정도 전세금이 낮다. 물량도 많지 않지만 한두 개씩 전세 매물이 나온다. 국제타운부동산 송희정 소장은 “자녀가 없는 직장인 부부라면 거주하기에 적당하다”라고 조언했다.

전세 수요가 많은 곳에 공급 늘려야

서울 곳곳이 전세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뾰족한 정부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국토해양부는 지난 2월7일, DTI(총부채상환비율) 완화, 생애 최초 주택 구입 자금 지원 등에 대한 연장 여부 등을 담은 전세 대책을 조만간 내놓겠다고 밝힌 바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런 대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예스하우스 전영진 대표는 “DTI 규제 완화보다는 역세권 일대에 장기전세주택(시프트)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역세권의 용적률을 높일 수 있도록 준주거 지역으로 상향해 공급을 늘려야 한다. 경기도처럼 서울 외곽이 아니면서 전세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늘려주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다. 분양가 상한제를 폐지해 민간 주택의 공급을 활성화하는 것도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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