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세계에 ‘휴전’은 없다
  • 이장훈 국제 문제 애널리스트 ()
  • 승인 2011.03.1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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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이어져…‘미인계’는 중국이 가장 잘 활용, 동독은 ‘미남계’도 써

 

▲ 1930년대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여성 스파이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의 한 장면.

타이완 검찰은 지난 2월9일 무려 7년간이나 중국 스파이로 활동해 온 타이완군의 현역 소장인 뤄셴저(羅賢哲) 육군사령부 통신전자정보처장을 구속했다. 뤄 소장은 타이완에서 지난 1960년 국방부 차관이 구속된 이후 반세기 만에 중국 스파이로 활동한 최고위급 인물이다.

뤄 소장은 지난 2004년 태국 주재 대표부 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파티에 갔다가 한 여성의 유혹에 빠졌다. 뤄 소장은 미모와 큰 키, 늘씬한 몸매에 사교술이 능란한 30대 초반인 이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기밀들을 넘겨주었다. 이 여성은 뤄 소장에게 그 대가로 10만~20만 달러를 주었다. 이 여성은 태국과 중국, 미국 등에서 무역업을 하는 호주 여권을 가진 화교로 신분을 위장했다는 것 외에 신원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뤄 소장의 간첩 활동은 미국 연방수사국(FBI) 때문에 꼬리가 잡혔다. FBI는 미국 출장이 잦은 뤄 소장의 행적을 면밀히 추적했다. FBI는 뤄 소장과 이 여성이 밀회하는 장면을 몰래 찍어 타이완 군 수사 당국에 넘겼다. 타이완 군 수사 당국에 체포된 뤄 소장은 수사 초기에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다 FBI의 자료를 내밀자 혐의를 인정했다.

뤄 소장은 이 여성의 주선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연락부 소속 린이순(林義舜) 소장과 만나기도 했다. 총정치부 연락부는 첩보 공작을 주로 하는 부서이다. 뤄 소장은 통신병과 출신으로 국방부 국제정보처 부처장을 역임했고, 2008년 1월 소장으로 승진해 지금까지 통신전자정보처장으로 근무해왔다. 뤄 소장이 넘긴 정보 중에는 미국-타이완 간 군사 전자정보통신망 프로젝트, 타이완 육·해·공 정보통신망, 군사 광섬유케이블망 등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본 영사, 계략에 걸리자 자살하기도

스파이는 매춘에 이어 두 번째로 인류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해 온 직업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스파이가 수집한 정보는 한 국가의 운명이나 국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각국의 스파이 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허니 트랩(honey trap·미인계)’을 비롯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똑같다. 여성을 이용한 미인계는 어떻게 보면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가장 효과적이라는 말도 있다. 미인계를 가장 잘 활용하는 국가는 중국이다.

고대 병가(兵家)를 집대성한 <삼십육계>에서도 미인계는 제31계로 중시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04년 5월 중국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영사가 자살한 사건이다. 이 영사는 술집에 드나들다 만난 호스티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중국 정보 기관은 이 영사를 협박해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이 영사는 총영사관과 본국 외무성 사이에 오가는 전문(電文)을 담당하는 베테랑 전신관이었다. 중국 정보기관은 이 영사를 통해 일본의 암호문이 작성되는 시스템과 이를 해독하는 방법 등을 빼내려고 했다. 이 영사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미인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외교관에게 ‘친하게 접근해 오는 이성을 조심하라’라는 내용의 교육까지 시키고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미인계를 이용해왔다. 영화 <색계(色戒)>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주인공인 왕자즈(중국 여배우 탕웨이가 맡은 역할)는 1930년대 상하이 사교계의 꽃으로 불렸던 국민당의 정보원 정핑루이다. 뛰어난 미모에다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그녀는 주로 일본 고관들을 상대로 고급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아왔다.

당시 국민당 조사통계실(정보기관)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친일파 왕정웨이(汪精衛) 괴뢰 정권이 상하이에 비밀리에 만든 정보기관인 ‘76호’와 최고 책임자인 딩모춘이었다. 국민당 조사통계실은 그녀에게 딩모춘에게 접근해 제거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녀는 두 차례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중국은 옛 여성 스파이 추도회까지 열어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스파이는 선안나(沈安娜)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6월 그녀가 사망하자 베이징(北京) 팔보산(八寶山) 혁명공동묘지에서 추도회까지 열었다. 그녀는 국공(國共) 내전 당시 장제스(蔣介石)가 이끌던 국민당에서 스파이 활동을 했었다.

1분에 2백자를 기록할 만큼 뛰어난 속기사였던 그녀는 1937년 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국민당에 들어갔다. 미모까지 뛰어난 그녀는 장제스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그녀는 1949년 국공 내전이 끝날 때까지 장제스 및 국민당과 관련한 고급 정보를 공산당에 넘겼다. 당시에는 모든 문서가 속기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국민당의 당 간부회의에 항상 참석했다. 장제스가 바로 곁에 공산당 스파이를 두고 자신의 말을 빠짐없이 기록하게 한 셈이다. 국민당은 그녀의 간첩 활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타이완으로 데려가려 했었다. 그녀는 상하이에 있는 가족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한 뒤 탈출했다.

러시아도 미인계를 상당히 선호한다. 지난해 6월 FBI에 체포된 스파이 안나 채프먼은 요즘도 화제가 되고 있다. 채프먼은 러시아 볼고그라드 출신으로, 본명은 애나 쿠스첸코였다. 모스크바의 인민우호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녀는 대외정보국(SVR)에서 스파이 교육을 받은 뒤 2002년 심리치료사 수습생이었던 영국인 알렉스 채프먼을 만나 결혼해 영국에서 살다 2006년 이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의 위장 신분은 온라인 부동산회사 CEO였다.

그녀는 밤에는 각종 파티는 물론이고 레스토랑과 고급 클럽을 드나들며 뉴욕 사교계의 거물로 활동했다. 그녀는 미국과 러시아 간의 스파이 맞교환 협상에 따라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국가 최고훈장을 받은 그녀는 스파이 생활을 청산하고 남성 잡지의 모델, 디자이너, TV쇼 진행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중국 상하이 주재 총영사관 영사 등 외교관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덩신밍 씨. ⓒ서울신문 제공

스파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은 마타하리이다. 인도네시아 말로 ‘여명의 눈동자’라는 뜻의 마타하리는, 프랑스 파리 물랭루즈에서 일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스트립 댄서였다. 본명은 마가레타 젤러. 마타하리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프랑스 당국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마타하리는 매혹적인 미모를 이용해 프랑스 군부와 정계 고위층, 재계 인사, 네덜란드 총리, 프로이센의 황태자 등을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였다. 마타하리는 이들로부터 들은 정보를 독일에 넘겨주다 들통이 났다.

여성 스파이들 중에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된 인물도 있다. 영국 MI5의 첫 여성 국장을 지낸 스텔라 리밍턴이 그 주인공이다. 한 가정의 평범한 어머니였던 그녀는  1992년부터 1996년까지 MI5를 이끌었다. 영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M’이라는 암호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스파이 세계에서는 남성을 이용한 미남계도 있다. 옛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대외정보부장이었던 마르쿠스 볼프는 서독 정부 주요 부처에 비서로 일하고 있는 미혼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해 ‘로미오 작전’을 벌였다. 볼프는 미녀 스파이를 통해 정보를 빼오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미남 스파이들을 파견해 여성 비서들에게 접근시켰다. 볼프의 작전은 예상 밖으로 크게 성공했다.

스파이의 역사는 ‘비공식 세계사’라는 말이 있다. 스파이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세상에 알려진 스파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스파이 전쟁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성패에 따라 거대한 역사의 흐름마저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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