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치매’, 당신도 노린다
  • 김형자│과학 칼럼니스트 ()
  • 승인 2011.04.1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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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IT 건망증’ 생겨…정보화 사회의 진화 과정이라는 반론도

방금 들은 전화번호를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잊어버린다. 기억하고 있던 가족들 전화번호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단순 덧셈·뺄셈을 할 때에도 계산기를 찾는다. 혹시 당신은 요즘 이런 경험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한 번쯤 ‘디지털 치매’에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

디지털 치매는 컴퓨터·휴대전화와 같은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과 계산 능력이 크게 떨어진 데다 과다한 정보 습득으로 인해 각종 건망증 증세가 심해진 상태를 말한다. 즉, ‘IT 건망증’인 셈이다. 내비게이션 하나면 지도나 표지판을 보지 않아도 길을 찾아갈 수 있다 보니 지도를 따로 보지 않아 읽는 법도 모르고, 가사 자막 없이 부를 줄 아는 노래가 거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 현상에서 생긴 신조어이다.

‘디지털 치매’는 의학적으로 기억력 저장 창고인 수백억 개의 뇌 신경세포 뉴런이 파괴되는 등의 원인으로 생기는 질병인 ‘노인성 치매’와 달리, 질병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 낳은 증상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디지털 치매가 노인성 치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로 10~30대 젊은이들에게 찾아오는데, 이들 중에는 증세가 심해져 병원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리서치 전문 기관인 엠브레인에 따르면, 매일 사용하는 전화번호나 비밀번호 등을 기억하지 못하는 디지털 치매 현상을 경험한 직장인은 63.5%로 10명 중 여섯 명 이상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버튼 하나로 기억력과 사고 능력을 대신해주는 디지털 장비들이 ‘기억하려는 노력과 습관’을 필요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전자 기기에만 의존하다 보면 머리를 쓰는 노동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못 하는 사람’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사람의 기억은 뇌의 ‘해마’라는 부위에서 주로 담당한다. 해마는 쓰면 쓸수록 뇌세포가 증가한다. 그런데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마가 위축되어 기억 용량이 줄어든다. 물론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는 비중이 커진다고 해서 기억력이나 뇌의 기능 자체가 아예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력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집중력’의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인간의 뇌는 하나의 원칙을 따른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부터 우선 기억하려 한다는 것. 따라서 디지털 기기에 담을 수 있는 정보는 ‘기억할 필요가 적은’ 정보로 인식되어 집중을 덜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인출 연습’ 게을리하는 것도 문제

또 전문가들은 ‘인출 연습(retrieval practice)’의 부족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인출이란 머릿속에 저장된 내용을 탐색하고 재구성해서 끄집어내는 과정을 가리킨다. 하지만 요즘은 디지털 기기에 많은 정보를 담아두고 있고,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되살려낼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뇌 속의 내용을 꺼내는 인출 연습을 게을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직접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이 닥쳐도 인출에 애로를 겪을 수 있다. 기억은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한 뇌 운동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러한 디지털 치매의 원인을 사람들이 전자 기기 사용으로 머리를 너무 많이 쓰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채팅과 메신저를 하고, 인터넷을 통한 맥락 없는 정보만 추구하고, 정신없이 게임을 하느라고 쉴 틈 없이 뇌를 사용하는 바람에 뇌에 부담이 가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축적시키기 못해 기억을 하지 못하고 학습 효과도 떨어진다는 얘기이다.

한편,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 등 일부 학자들은 디지털 치매를 정보화 사회의 일시적 건망증이 아니라 진화 과정의 한 단면으로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인류가 직립원인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손을 사용하게 되어 먹이나 물건을 무는 입의 기능이 퇴화했지만 대신 입은 말하는 기능을 얻은 것처럼, 어떤 것의 진화 과정에서는 잃은 능력이 있으면 동시에 얻는 능력도 있기 때문에 디지털 치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세르의 주장이다.

직접 손으로 쓰고 계산하는 습관 길러야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과 디지털 기기와의 결합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다는 것일까. 세르는 인간의 기억력이나 계산력 등은 떨어뜨리지만 대신 정보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지식을 창조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인류는 기술 진보와 함께 진화해왔고 지금의 디지털 치매 현상도 그런 진화 과정의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기술과 융합된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향적 시각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성의 핵심 기능인 비판적 사고력까지 잃어가면서까지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 하는 부분은 별개로 치더라도, 문제는 수많은 정보에 노출되면 뇌가 피곤해진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디지털 피로감’이다. 지하철에서 벨소리가 울리면 혹시나 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본다든지, 조용한 공간에서도 벨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는 것도 디지털 피로 증상 가운데 하나이다.

디지털 피로감이 커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떤 정보이든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과 저장 장치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정보가 급증한 점이다. 또, 디지털의 발달에 따라 기기의 사용법과 활용법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디지털 스트레스도 크다.

다른 신체와 마찬가지로 뇌도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디지털 치매는 정보 과다로 인해 뇌가 주변 정보를 자꾸 밀어내는 현상이므로, 가능하면 손으로 쓰고 직접 계산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건망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그날 겪은 일을 일기로 써보자. 일기는 뇌에서 저장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기능을 활용해 그날 겪은 일들을 다시 떠올려 감정을 싣는 작업이라 기억력 유지에 이롭다.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와 시구, 성전의 구절 등을 암기하도록 노력하고, 신문이나 잡지를 매일 한두 시간씩 꼼꼼히 읽는 것도 유익하다.

반면 빠른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은 부분에서만큼은 의도적으로 한 박자 느리게 사는 방식을 선택해보자. 0과 1이라는 이진법으로 나누어진 세계 외에도 살아야 할 3차원 공간에서 할 일은 매우 많다. 사무실 책상 위에 작은 어항도 하나 갖다 놓고, 화분도 가끔씩 바꿔주자. 디지털 시대의 검은 그림자에 대비가 필요한 시점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덧입히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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