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제국은 ‘도청’으로 이루어졌다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1.05.10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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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오브더월드’, 유명 인사 수천 명 대상 불법 행위…‘미디어왕’ 머독의 영향력에 가려 있다 드러나

 

▲ 뉴스오브더월드 건물. ⓒ연합뉴스

최근 영국 북서부의 체셔에 있는 2층짜리 복고풍 저택에 런던 경찰청 소속 형사들이 찾아왔다. 형사들은 집주인에게 “그동안 당신이 도청당하고 있었다”라며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집주인은 그동안 자신과 관련된 사건들이 왜 그렇게 재빠르게 기사화되었는지 깨닫고 분노했다. 이 집주인은 ‘악동’이라 불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격수 웨인 루니였다. 도청을 해왔던 곳은 ‘뉴스오브더월드(이하 NOW)’인 것으로 밝혀졌다. 1843년 창간된 NOW는 2백80만부를 발행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일요판 타블로이드 신문이다.

도청 사건은 루니만의 일이 아니다. 시작은 2005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NOW는 윌리엄 왕자의 무릎 부상에 관한 내용을 보도했는데 이는 왕실 내부의 사람만이 아는 정보였고 이상하다고 느낀 왕실은 런던 경시청에 정보 유출에 관한 수사를 의뢰했다. 2006년 1월 런던 경찰청은 NOW의 왕실 출입 기자 클리브 굿맨과 사설 탐정 글렌 멜케이의 공모 가능성을 밝혀냈다.

멜케이의 자택에서는 도청 대상자로 의심되는 수천 명의 휴대전화 번호를 기록한 서류가 나왔고 음성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비밀번호들이 발견되었다. 압수물 중에는 멜케이가 한 기자에게 축구협회 간부의 전화를 어떻게 도청하는지 설명하는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찰청의 행보는 의외였다. 왕실 관계자에 관한 도청으로만 수사 대상을 좁혀버렸기 때문이다. NOW 내부에 굿맨과 멜케이 이외에 추가로 관여한 사람이 있는지 여부도 수사하지 않았다. 도청을 공모한 두 사람이 구속되면서 이 사건은 묻히는 듯했다. 하지만 2009년 7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독자 취재를 통해 NOW의 다른 기자들도 포괄적인 전화 도청을 실시했다고 보도하면서 파문이 커졌다.

가디언의 보도 이후 영국 하원의 ‘문화·미디어·스포츠위원회’는 도청 사건에 관한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의 초점은 도청 행위가 NOW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 일인지, 그리고 당시 편집장이었던 앤디 쿨슨이 연루되었는지 여부였다. 앤디 쿨슨 전 편집장은 왕실 도청이 발각되었을 때 “도청 행위에 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지만 2007년 1월 사건의 책임을 지고 편집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NOW에서 나온 그는 당시 야당이었던 보수당의 홍보 책임자가 되었다.

소환된 쿨슨은 “도청 활동은 기자 개인이 한 것이다”라는 답변을 고수했다. 멜케이가 도청 내용을 적은 메모를 NOW의 기자에게 보낸 내용 등 세세한 내용을 확인하는 질문에도 “기억에 없다”라며 일관되게 부인했다. 2010년 2월, 위원회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도청 사건과 관련해 “집단적 건망증에 걸려 있다”라며 비아냥거리는 평가가 기록되었고 “편집실에서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다”라는 진술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라는 지적도 담았다. 결국 쿨슨이 도청을 인지하고 허락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한 채 청문회는 끝났다.

공식 사과했지만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

애매했던 사건의 핵심을 찌르는 보도는 2010년 9월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 나왔다. 뉴욕타임스는 NOW의 도청 행위가 조직적으로 있었다고 보도하면서 쿨슨 전 편집장이 관여했다는 증언을 이끌어냈다.

뉴욕타임스는 런던 경찰청이 왜 도청 관여자에 관한 수사를 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존 위팅데일 하원 문화미디어스포츠위원장은 “경찰청은 굿맨과 멜케이 이외에 안건을 조사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당시 경찰청 소속 몇 명은 NOW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포괄적인 수사를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터져나온 뒤 쿨슨 전 편집장은 뉴스의 중심이 되었다. 보수당의 홍보 책임자였던 그는 2010년 5월,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총리실 공보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때문에 타블로이드 신문의 단순 스캔들이었던 도청 사건은 빠르게 정치 문제로 변해갔다.

쿨슨은 영국 정계와 언론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캐머런 총리의 측근이기도 하지만 루퍼트 머독의 심복이기도 하다. 머독이 경영하는 ‘뉴스인터내셔널’은 영국에서 <더 선> <NOW> <더 타임스> 그리고 <선데이 타임스>를 발행한다. 머독이 운영하는 신문의 총 발행 부수는 약 8백만부. 그 지지를 얻는 것은 총리와 여당에게 매우 중요하다. 쿨슨은 머독 소유의 언론과 여당을 연결하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어서 의혹이 드러났다고 해서 그를 쉽게 내쫓을 수 없었다.

유명 영화배우 시에나 밀러 등 도청을 의심하는 유명 인사들은 잇달아 NOW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올해 1월21일 앤디 쿨슨은 도청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지만 가디언의 정치 담당 기자 마이클 화이트는 “쿨슨이 그만둔다고 영국 정치권에서 대중지에 근무하고 있던 인물을 공보 담당으로 고용하는 흐름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더 타임스>와 <가디언>보다 영국의 신문 시장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가십 기사가 가득한 타블로이드 신문이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타블로이드 신문의 헤드라인을 관리할 인물이 필요해진다.

여론이 점점 악화되고 경찰청의 수사망이 조여오자 4월8일 NOW는 유명 인사에 대한 도청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반면 도청 피해자인 시에나 밀러, 전 국회의원인 조지 캘러웨이 등 유명 인사들 여덟 명은 사과받기를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루퍼트 머독이 운영하는 ‘뉴스오브더월드 도청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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