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는 ‘생방송 드라마’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 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1.08.2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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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슬 촬영 거부 파문’에 대한 적절한 접근법 찾기

ⓒ시사저널 유장훈

미니시리즈 <스파이 명월>에 출연 중인 배우 한예슬이 돌연 촬영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 때문에 파문이 일었다. 주연 배우가 이렇게까지 심한 돌출 행동을 한 것은 초유의 사태이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이와 관련해 방송사와 제작사를 중심으로 한예슬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폭로가 많이 나왔다. 그 외에도 PD와의 불화설이라든가, 재력가와의 결혼설 따위의 온갖 소문이 흘러나왔다.

제3자의 입장에서 사태의 정확한 원인을 알 길은 없다. 그리고 꼭 정확한 사태의 내막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누가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캐보아야 결국 호기심만 충족될 뿐이다. 좀 더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통해 우리가 사회적으로 논의할 만한 지점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이번 한예슬 파문에서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바로 한국의 고질적인 ‘쪽대본-생방송’ 드라마 제작 관행의 문제이다. 한예슬은 그 전에도 제작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미국에 가서도 인터뷰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드라마 환경이 너무 힘들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한예슬의 극단적인 행동을 초래한 원인 중에 드라마 제작 관행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제작 환경이 아닌 원인으로 갈등이 발생했다 해도, 그리고 어느 한 쪽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 해도, 만약 드라마 제작 스케줄에 여유가 있었다면 이렇게 순식간에 사태가 극단적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한예슬이 촬영을 거부하자마자 곧바로 드라마 결방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얼마나 제작 일정이 촉박하면 배우가 사고 한 번 쳤다고 방송이 멈춘다는 말인가? <아테나> 때에도 정우성이 부상으로 하루 쉬었을 뿐인데 드라마 결방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생방송’ 드라마의 문제이다.

위험천만 드라마 제작 관행 돌아보는 계기

만약에 사전 제작 시스템이었다면, 촬영 중에 배우가 펑크를 내도 전혀 이슈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제작 환경에서는 문제를 봉합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리고 애초에 감정적인 문제가 그리 크게 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생방송’ 드라마 제작 관행은 관련자에게 살인적인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작은 갈등도 크게 자랄 수 있고, 순간적으로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들 수도 있다.

지금처럼 ‘쪽대본 생방송’ 제작 관행이 이어진다면 앞으로 무슨 돌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적인 잘잘못이나 연기자의 인성을 따지는 것보다 드라마 제작 관행의 문제를 돌아볼 계기로 삼는 것이 한예슬 파문에 대한 적절한 접근법으로 보인다.

얼마 전에 <무사 백동수>에 출연하는 유승호와 <넌 내게 반했어>에 출연하는 박신혜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이것도 촉박한 제작 일정에 맞추려 무리하게 움직이다 당한 사고라는 것이 중론이다.

<싸인>에서 마지막 회에 오디오가 오락가락하다가 아예 정적이 흐르는가 하면 심지어 화면 조정용 컬러 바가 뜬 적도 있었다. <아이리스>의 마지막 회는 방영되는 당일 저녁에 작업을 시작해, 방송 시간 직전에야 가까스로 편집을 마쳤다. 이병헌이 저격당하는 장면에 문제가 있었지만 그냥 방영되었다. <최고의 사랑>도 마지막 회가 방영된 당일까지 촬영이 이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작품은 일단 전반부부터 방송을 내보내놓고 그 사이에 후반부를 작업하기도 한다. 방송을 한 후에 후반 작업을 다시 해서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우리 시청자는 임시로 편집해놓은 드라마를 보고 있는 셈이다.

<아이리스>에서는 툭하면 등장하는 회상 장면이 빈축을 샀었다. 지나치게 무리한 일정 때문에 제작진이 회상 장면으로 드라마를 ‘땜질’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사극의 경우, 초반 전투 장면은 웅장하고 완성도가 높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촉박한 시간 때문에 구성이 엉성해진다는 지적도 많다. 후반으로 갈수록 엉성해지는 구성은 현대극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미니시리즈에서 중반 이후에 치밀함이 와해된다.

제작 시스템을 바꿔야 드라마도 살고 모든 스태프도 산다

▲ ⓒKBS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의 질을 따진다는 것은 한가한 얘기이다. 작가도, PD도, 배우도 초인적인 속도전을 벌인다. 심도 깊은 작품 구상이나, 깊이 있는 작품 분석은 점점 힘들어진다.

배우 신구는, 요즘 촉박해지는 드라마 제작 관행 때문에 대본 연습이 사라져갈 지경이라고 말했다. <욕망의 불꽃>이 끝난 후에는 조민기가 쪽대본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프레지던트>에서는 최수종이 대본이 너무 늦게 나와 대사 외우기가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형편이 이러한데 어떻게 작품의 질이 나아질 수 있을까? ‘링거 투혼’ ‘부상 투혼’이 일상화된 살인적 스케줄 때문에 1급 배우는 드라마를 한사코 피하려고 한다. 드라마가 끝난 후의 인터뷰를 보면, 작품에 대한 내용은 없고 ‘자고 싶다, 너무 힘들었다’라는 말이 주류를 이룬다. <싸인>의 PD는 중도 하차를 선언하면서 ‘이러다가 내가 죽겠구나’라는 공포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생방송 드라마의 또 다른 문제는 작품의 완결성이 너무 심하게 떨어진다는 데 있다. <미스 리플리>에서 김정태는 전반부와 후반부에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에덴의 동쪽>에서는 러브 라인의 구도가 바뀌면서 이다해가 중도 하차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류의 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현행 제작 시스템에서 일주일에 드라마 두 편을 만들어 내보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 시간 정도의 이야기를 정성껏 일주일간의 영상물로 만들어도 생명이 단축되는 것 같은 극한의 피로를 느낀다. 그것을 어떻게 매주 두 편씩 여러 달을 한다는 말인가? 몇몇 가정의 거실에 배우들이 몰려나와 연기하는 주말 드라마는 그나마 상황이 괜찮지만, 온갖 곳에서 현지 촬영을 하며 다채로운 화면 구성을 하는 미니시리즈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기적일 정도이다.

선택을 해야 한다. 이대로 일주일에 두 편씩 드라마를 방영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충분한 분량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제작과 방영을 병행하려면 일주일에 한 편만 작업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드라마의 경쟁력을 유지할 최소한의 방안이다.

언제까지 배우들이 드라마 중반 이후에 시청자가 민망할 정도로 초췌해지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한류의 스타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예슬에 대한 인성 분석이 아니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제작 시스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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