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 탄생의 비밀 담은 문건 단독 입수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12.02.25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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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고백 편지’ 등 문서 3개 단독 입수

최근 정수장학회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사장을 지낸 정수장학회 반환 청구 소송에서 고 김지태씨의 유족이 패소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국가의 강압으로 재산을 넘긴 사실은 인정했지만 시효가 지나 반환 청구는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사저널은 지난 2004년 정수장학회 탄생의 비밀을 담은 문건을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한 바 있다. 이후 문화방송의 기부 승낙서가 변조된 사실 등을 밝혀내는 등 정수장학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최근 불거진 정수장학회 문제는 긴 기간동안 진행된 복잡한 문제다. 선거의 해인 2012년 정수장학회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 지금,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2004~2005년)의 기사들을 소개한다.


지난 한 주 정가는 부산일보 지분 100%와 MBC 지분 30%를 갖고 있는 정수장학회 문제로 떠들썩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데다가 정수장학회 전신인 5·16장학회가 설립되는 과정에 군사 정권의 강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5·16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고 김지태씨의 유족은 <시사저널>과 만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을 일으키기 직전 선친에게 요청한 거사자금 5백만환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5·16 이후 부일장학회 등을 박정희 정권에게 빼앗겼다. 이제라도 정수장학회의 이름을 부일장학회로 바꾸고 이사진도 신망 있는 인사들로 바꾸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시사저널> 제771호 22~26쪽 참조).

그러나 고 김지태씨 유족의 이같은 애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안은 정치 공방으로 흐르는 조짐이 엿보인다. 한나라당은 여권이 심해지는 경제난을 외면한 채 과거사 규명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전여옥 대변인은 “박대표가 대권 후보가 된 것도 아닌데 여권이 박대표 흠집 내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은 이른바 ‘유신논쟁’을 제기하며 한나라당과 박대표를 유신 세력으로 몰기에 바쁘다. 열린우리당은 7월28일 조성래 의원을 단장으로 한 정수장학회 진상조사단을 구성했으나 8월1일 현재 모임은 물론 향후 일정조차 정한 것이 없다. 열린우리당은 시간을 갖고 느긋하게 이 문제를 다루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이 문제가 박대표에게 정치적인 부담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고 김지태씨가 만든 부일장학회가 5·16장학회로 바뀌는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왼쪽). 부산상고 총동창회는 2003년 11월22일 모교 교정에 김지태씨의 흉상을 세웠다(오른쪽).

 

부산일보 노조, 박근혜 이사장 사퇴 촉구

정수장학회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부산일보의 움직임도 변수다. 부산일보 노동조합은 지난 6월에 이어 조만간 박대표는 이사장 직을 사퇴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8월 말쯤 ‘부산일보 소유 구조에 대한 공청회’도 계획하고 있다. 이재희 부산일보 노조위원장은 “부산일보 내부에서 소유권 문제가 제기된 것은 1995년 박근혜 대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된 직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이다”라고 밝혔다. 

박대표는 “정수장학회는 공익 법인이어서 개인이 흔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승수 교수(전북대·언론심리학부)는 “정수장학회는 언제든지 부산일보 편집권을 장악할 수 있는 법적인 실체라는 점이 중요하다”라고 주장한다. 김교수는 <매체 소유 연구>라는 책에서 ‘정수장학회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부산일보와 MBC의 소유 구조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두 가지다. 박대표가 이사장 직을 사퇴하느냐와 설립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전자는 박대표가 선택할 문제이나 후자는 진상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중요한 부분은 후자이다. 고 김지태씨 유족의 주장이 새삼 주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자는 후자의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사저널>은 이와 관련해 정수장학회 설립 과정의 진상을 밝히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세 가지 문서를 입수했다. 고 김지태씨를 조사·구속했던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씨가 1963년 김씨에게 보낸 편지, 김씨가 1971년 8월 5·16장학회에 보낸 ‘(부일장학회)양도경위서’ 그리고 김씨 유족이 1993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가 그것이다. 

박용기씨가 고 김지태씨에게 보낸 서신

고 김지태씨가 농지개혁법과 관세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끌려가 구속된 뒤 부산에 있던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그리고 부일장학회 운영권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1962년 5월25일. 그 1년 뒤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었던 박용기 대령이 김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생각하니, 저 자신 그 당시가 정말 꿈 같기만 합니다. 좀더 사회 경험과 사회 실정을 알았다면 김사장님과 저와의 관계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당시 그렇게 조종한 인간들에게 휩쓸려들지도 않았으리라고 믿습니다. 군대 생활 17년간 일선 지구만 헤맨 탓인가 싶습니다. 

저 자신 김사장님을 직접 상면하여 과거지사를 사죄할까 했으나 너무나 죄송스러워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며칠 전 파티에서 조○○ 의원을 만나 김사장님이 저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용기를 얻어 붓을 들었습니다. 사람이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몸, 저 자신 김사장님과 언제든 한번 상면할 기회를 얻어 지난 과거지사이기는 하나 마음 속 이야기라도 한번 하였으면 하는 생각 태산 같습니다.

고 김지태씨가 5·16장학회에 보낸 ‘경위서’

고 김지태씨는 1971년 8월7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었던 박용기씨가 보낸 편지를 첨부해 자필로 쓴 (부일장학회·부산일보·문화방송 등의) 양도경위서를 5·16장학회에 보냈다. 당시 정·재계에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매각설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 서신에서 매각한다면 창설자인 본인이 인수하겠다고 강조했다. 경위서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62년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씨에 의하여 본인이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어 군사재판이 진행 중, 계엄사령부 법무관실에서 고원증씨가 미리 작성한 양도 서류를 지참하여 날인을 강요당하고, 쇠고랑을 찬 손으로 본의 아닌 날인을 하게 되었음.

2. 그 후 1963년 사건을 일으킨 박용기씨로부터 ‘그 당시 조종한 인간들에게 휩쓸려 저질렀다’는 사과 서신을 받고 참 억울하였으나 본인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켜왔음.

3. 또다시 불미스러운 사회 여론이 재발하였으니 5·16장학회의 명예와 본인의 신변에 대한 어색한 여론을 진정시키고자 진정서를 제출한 것임.

4.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은 부산 사회의 민심과 여론을 보아 절대로 제3자에게 매각하는 일이 없도록 강조함.’

유족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낸 탄원서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3월, 고 김지태씨의 장남 김영구씨와 차남 김영우씨는 유족을 대표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김대통령은 1988년 10월 윤우동씨 등 부산일보사 전 임원이 국회에 청원서를 낼 때 ‘소개 의원’으로 도장을 찍어준 의원 13명 중 한 사람이었다. 탄원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선친께서 5·16 쿠데타를 일으킨 정치 군인들에게 우리 나라 민간 방송의 효시인 부산문화방송과 한국문화방송 그리고 부산일보를 강탈당한 지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치적 장물’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선친의 피와 땀의 결정이 아직도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이 불의를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 하나.

5·16 직전 선친께서 발행인으로 있던 부산일보사 황용주 주필을 통해 혁명 주체가 요구해 온 거사 자금을 거절한 일, 그 이듬해 그들이 선친을 탈세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을 구형해 놓고 신문·방송에서 손을 떼라고 협박한 일, 결국 함께 구속된 아내와 부하 직원들의 고초를 보다 못해 쇠고랑 찬 손으로 도장을 찍어주고 곧바로 공소 취하로 풀려난 그 끔찍한 굴욕과 수모를 우리는 어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신문·방송의 재정적인 바탕이자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규모의 장학사업의 원천이었던 부일장학회가 슬그머니 5·16장학회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정수장학회로 둔갑해 오늘에 이르렀다. 세월이 흘러도 신문·방송을 되찾는 일에 무심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시던 임종의 유언이, 그리고 그 유언을 지키지 못한 회한이 자식들의 가슴을 친다. 

그와 같은 군사 문화의 독버섯이 문민 시대의 밝은 햇살 아래서도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오늘의 시대 정신을 모독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선친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라도 정수장학회의 이름을 부일장학회로 바꾸고 장학회의 이사선임권을 유족에게 돌려 달라. 이것이야말로 강압에 찢긴 정의와 진실을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사저널> 772호 (2004년 8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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