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들고 돌아온 ‘잊혀진 감독’들 충무로의 새 희망봉으로 우뚝 솟다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2.03.1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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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올해 들어 8주 연속 주말 관객 집계 1위 차지해…최근 <러브 픽션> <화차> 성공 이어 <건축학개론>도 기대

왼쪽부터 .

3월 둘째 주말 충무로는, 작지만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다. 1월 셋째 주말 <댄싱퀸>을 시작으로 <부러진 화살>과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하울링> <러브 픽션> <화차>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8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것이었다.

극장가가 한국 영화 놀이터가 된 듯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영화의 전국 관객 점유율도 껑충 뛰었다. 3월14일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한국 영화는 관객 점유율 66%를 기록하면서 흥행 고공비행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개봉작을 기준으로 한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46.9%였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 5위(미국 영화 <장화 신은 고양이>)를 제외하고는 흥행 10위까지 9편의 한국 영화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블록버스터 아니어도 장기 흥행에 성공하기도

한국 영화 릴레이 흥행의 주역은 제작비가 중급 이하인 영화이다. 최근 4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장기 흥행 레이스를 이어가고 있는 <댄싱퀸>을 비롯해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4백59만여 명), <부러진 화살>(3백42만여 명) 등 순제작비 30억~40억원가량의 중급 영화나 10억원 이하의 저예산 영화가 흥행 전선을 주도하고 있다. 충무로의 허리라고 할 영화들이 잇달아 흥행 콧노래를 부르면서 한국 영화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3월22일 개봉하는 멜로 영화 <건축학개론>도 상당한 상업적 폭발성을 지니고 있어 중급 영화의 약진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중급 영화의 반란은 지난해부터 움트기 시작했다. <최종병기 활>을 제외하면 지난해 한국 영화 흥행 상위권에 오른 영화 대부분이 중급 영화이다. <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과 <써니>가 상반기 흥행 돌풍을 일으키더니 하반기에는 대박을 기대하지 않았던 <도가니>와 <완득이>가 흥행을 이어갔다. 로맨스 영화로는 드물게 3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선전한 <오싹한 연애>도 중급 영화 바람에 힘을 보탰다.

<퀵>과 <고지전> <7광구> <마이웨이> 등 지난해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100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투입하고도 체면치레 수준의 관객을 동원하거나 흥행 참패를 기록한 것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최근 중급 영화의 약진 뒤에는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중견 감독들이 있다. 이전 작품에서 좋은 흥행 성적을 못 냈거나 오래도록 충무로 주변부에서 와신상담을 꾀했던 감독이 최근 한국 영화 흥행 몰이의 중심에 서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이다. 1990년대 <남부군> 등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던 정감독은 1998년 <까>의 상업적 실패 이후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14년 만에 극장가를 찾은 영화 <부러진 화살>로 그는 확실하게 부활을 알렸다.

<범죄와의 전쟁>의 윤종빈 감독도 재기에 성공한 경우이다. 그는 대학 졸업 영화로 만든 <용서받지 못한 자>로 영화계의 눈길을 집중시켰으나 전작 <비스티 보이즈>는 호평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자신의 자질을 보여준다.

<러브 픽션>의 전계수 감독과 <화차>의 변영주 감독도 영화 인생의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전감독은 두 편의 저예산 영화 <삼거리 극장>과 <뭘 또 그렇게까지>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대중적인 갈채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높였던 변감독은 <밀애>와 <발레교습소> 등의 저조한 흥행 이후 8년 만의 복귀작으로 반전을 꾀하게 되었다. <댄싱퀸>의 이석훈 감독(<방과 후 옥상> <두 얼굴의 여친>)도 마찬가지다.

특히 정감독의 귀환은 여러모로 의미를 지닌다. 예전에는 충무로의 명장으로 통했으나 50대 이후 침묵하고 있는 노장 감독들에게는 좋은 본보기로 작용할 전망이다. 데뷔작만 내놓고 사라지는 감독이 부지기수인 최근 충무로의 조로화 추세에도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의 엄정화와 의 안성기 .

한국 영화 기초 체력 향상에 긍정적 신호

4월 이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과 <배틀 쉽> <다크나이트 라이즈> <맨 인 블랙 3> 등 할리우드 기대작이 속속 개봉하면 중급 영화를 포함한 한국 영화 전체의 입지가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형 재난 영화 <타워링>과 <빨간 마후라>의 후편을 자처하는 <비상: 태양 가까이> 등 충무로 블록버스터도 중급 영화의 입지에 영향을 줄 주요 변수이다.

최근의 중급 영화 연속 히트는 이미 한국 영화에 적지 않은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0억원대 블록버스터와 10억원 이하의 저예산 영화 두 부류로 나누어 이루어지던 투자의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는 데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는 2006년을 정점으로 불황의 터널에 들어선 뒤, 모 아니면 도 식의 투자를 거듭해왔다. 물량 공세를 앞세운 블록버스터로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보장받으려 했고, 10억원 이하의 영화로 투자 위험성을 낮추려 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충무로에서는 100억원대 영화 1편의 성공보다 중급 영화 3편의 흥행을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 중급 영화가 많아야 산업 생태계도 건전해진다”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연이어 죽을 쑨 블록버스터의 손실을 막고 한국 영화의 버팀목 역할을 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이다. 중급 영화는 스타 캐스팅과 마케팅파워에 기댄 블록버스터가 관객의 외면을 받은 자리를 메우며 새로운 갈림길에 선 한국 영화에 방향을 제시했다. 돈이 아닌 아이디어와 성실한 만듦새만으로도 관객의 마음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증명해냈다.

중급 영화의 릴레이 성공으로 충무로의 기초 체력이 향상되었다는 의견도 많다. 한국 영화의 허리가 두터워진 만큼 투자 환경도 더 나아졌고, 충무로의 제작 역량도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한 영화사 대표는 “최근 중급 영화의 흥행은 패배감에 젖어 있던 영화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영화 제작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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