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첫사랑이 그려낸 희비 쌍곡선
  • 정덕현│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2.04.1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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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개론>의 흥행 성공에 비해 드라마 <사랑비>의 성적은 초라해…몰입에 큰 차이 보여

영화

<겨울연가> 윤석호 PD의 신작 <사랑비>가 다루고 있는 1970년대식 첫사랑은 왜 그리도 답답하게 다가올까. 정말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주인공’을 보면서 당장 전화해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그들을 왜 우리는 견디지 못할까. 이것은 2012년 현재적 관점과 1970년대식 사고방식의 충돌에서 생기는 것이다. 휴대전화로 언제든 전화하고 문자를 주고받는 시대의 정서와 아직도 편지를 쓰던 시대의 정서가 같을 수는 없다. 이 시대의 속도와 미디어와 관련이 있다.

정통 멜로의 입지 좁아진 상황에서 ‘아날로그’로 관심 끌어

사실상 ‘정통 멜로’라는 장르가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처럼 즉각적으로 ‘연결’되는 미디어가 쏟아져 나오면서부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 가진 우연성과 운명적인 느낌은 미디어에 의해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인스턴트식 사랑의 시대에 ‘정통 멜로’ 같은 운명적인 사랑을 다루는 장르는 어딘지 잘 맞지 않아 보인다. 멜로가 <해를 품은 달>처럼 사극 같은 이야기(운명적 사랑이 가능하다) 속으로 자꾸만 도망치거나, <패션왕> 같은 로맨틱 코미디처럼 유머로 바뀐 것(운명적 사랑이 유머처럼 그려진다)은 다분히 이런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지금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를 보면 멜로가 어떻게 장르에 기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더킹 투하츠>나 <옥탑방 왕세자> <패션왕>이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서의 멜로를 활용하고 있고, <적도의 남자>는 액션과 누아르에, <빛과 그림자>는 시대극에 멜로가 끼어 있는 정도이다. 이 밖에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 들어가 있는 멜로는 정통적인 것이라고는 하나, 몇몇 멜로 코드(이를 테면 혼사 장애나 출생의 비밀 같은)에 편향된 것이 대부분이다. 영화에서도 그다지 사정이 다르지 않다. <오싹한 연애>의 성공은 로맨틱 코미디마저 식상해진 멜로에 공포라는 장르를 퓨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 <화차>는 물론 정서적으로 멜로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그 성공의 방점은 멜로보다는 미스터리에 더 찍혀져 있다. 물론 <건축학개론>은 예외이다. 이 와중에도 정통 멜로로서 선전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드라마든 영화든 정통 멜로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도 <사랑비> 같은 드라마나 <건축학개론> 같은 영화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안에 ‘첫사랑’이라는 다분히 복고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소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멜로라는 장르를 질식시키고 있는 이 시대의 속도와 미디어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사랑비>는 이 사라진 시대의 멜로를 마치 서랍 속에 구겨넣었던 편지처럼 꺼내 읽고, <건축학개론>은 그때의 안타까웠던 첫사랑의 실패를 시공간의 변화와 그 시대를 여전히 통과해 흐르는 김동률의 노래에 실어 들려준다. 정통 멜로는 지금 바로 이 디지털과 속도에 경도된 세태로 인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시 반대로 떠오르고 있는 아날로그와 느림에 대한 욕구 사이에 서 있다.

추억 어린 장면을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감동의 크기 달라

출연자들 ⓒ KBS 제공
흥미로운 것은 <사랑비>와 <건축학개론>이 둘 다 이 아날로그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정통 멜로를 보여주면서도 그 성적표가 영 다르다는 점이다. 배용준을 잇는 차세대 한류 스타 장근석, K팝의 중심에 서 있는 소녀시대의 윤아. 1세대 한류를 이끈 <겨울연가>의 윤석호 PD와 오수연 작가, 게다가 이미 일본에 약 90억원의 판권 계약을 맺은 저력까지. 하지만 <사랑비>의 시청률은 고작 5%대에 머무르고 있다. 같은 첫사랑을 소재로 삼고 있는 <건축학개론>이 2백만 관객을 넘어서 3백만 관객을 향해 가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이다.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면 드라마적 완성도가 떨어져서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시청률 5%에 머무르고 있지만, 시청률이 완성도를 얘기해주던 시대는 지났다. 작금의 매체 환경에서 시청률은 점점 중·장년층의 선택에 의해 갈리고 있지 않은가. 완성도로만 보면 윤석호 PD 특유의 감성적인 화면과 영상 미학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하고, 오수연 작가의 대사나 캐릭터 구축 또한 떨어지지 않는다. 즉, 문제는 완성도나 소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통 멜로라는 장르 자체가 힘이 빠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변화가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더 크다는 점일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장르적 차이는 <사랑비>와 <건축학개론>으로 하여금 희비 쌍곡선을 긋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영화는 특정 공간에서 완전히 몰입해 감상하는 반면, 드라마는 생활의 공간 속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슬쩍슬쩍 보기도 하는 장르이다. 따라서 이 두 장르의 몰입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특히 멜로처럼 서사가 아니라 서정을 담는 장르에 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즉 영화에서는 미세한 떨림을 갖는 손가락이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채울 정도로 포착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런 미세함이 소소하게 느껴지고 또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사랑비>가 다루고 있는 1970년대식 첫사랑의 답답함은 <건축학개론>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그 느낌이 다른 것은 이런 몰입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장르적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추억’ 어린 장면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하는 문제이다. 중·장년층이 점점 대중문화의 중심적인 구매층으로 자리해오고 있고 따라서 ‘복고’와 ‘향수’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은 이들에게는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중·장년층이 현재 구가하는 복고란 현재의 청춘을 통해 과거 자신의 청춘을 상기하는 것이다. 즉 이들은 올드한 취향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가장 트렌디한 것을 ‘청춘’이라는 공통의 지점을 통해 그들과 같이 향유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삼촌팬, 이모팬으로 불리는 팬심과도 닿아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막상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 그것은 그저 올드한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비>의 시작이 1970년대의 재현이었던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차라리 2012년의 장근석을 통해 1970년대의 장근석(그는 이 드라마에서 1970년대의 인하와 2012년 그의 아들 서준으로 출연해 1인2역을 한다)을 회고하는 쪽으로 넘어갔다면 훨씬 효과적이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점에서 <건축학개론>은 정석적인 방식으로 복고에 접근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중년이 과거 반짝반짝했던 청춘의 지점을 추억하는 방식이다. 영화 <써니>에서도 사용되었던 바로 그 방식이다. 여기에 멜로, 그것도 첫사랑이라는 닳고 닳은 소재를 건축이라는 낯선 소재로 풀어낸 점도 관객에게는 참신하게 다가온 점이 되었다.

성적표는 달라도 <사랑비>와 <건축학개론>은 모두 현재의 정통 멜로와 세태와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안타깝게 부르짖었던 그 유명한 대사는 이제 현실이 되었다. 사랑은 변했다. 사랑은 이제 운명적인 것이 아니고, 손을 뻗어 쟁취하는(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또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속도의 시대에, 또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수많은 말의 시대에, 영원이나 불멸은 점점 생경한 단어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래서일 것이다. 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질문이 거꾸로 정통 멜로와 같이 점점 화석화되어가는 장르에서 던져지고,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진중한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디지털의 끝단에서 아날로그를 향수하듯이, 미친 속도감의 시대에서 우리는 느림의 미학을 갈구한다. 멜로라는 장르는 그래서 그렇게 변해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고수하기도 한다. 1970년대에 내리던 비나 2012년에 내리는 비는 물론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또 과거의 허물어져가는 집과 그것을 다시 리모델링해 세운 집은 다른 공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비라는 본질(여기서는 사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또 그 공간이 향유한 기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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