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어>의 권혁준 “절박하지 않으면 남을 웃길 수 없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7.10 00: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시사저널 전영기
1992년 2월, 인천에 사는 권혁준군은 미대에 응시했다 낙방하자 고교 졸업식이 끝난 직후 친구 한 명과 무작정 서울 대학로로 향했다. “재수를 하기도 그렇고 공부가 안 어울리는 것은 확실하고, 그러면 연극을 해볼까. 교회에서 연극도 해봤는데…. 연극의 메카를 가자.” 그래서 내린 결론이 대학로행이었다. 1호선을 타고 서울역에서 4호선을 갈아타고 혜화역에서 내려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서 포스터에 쓰여 있는 극단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었고 그것이 제일 빠른 것 같았다. 친구와는 우리 둘이 같이 가면 경쟁이 되니까 서로 다른 극단에 가자고 했다.” 

그는 극단 신화에 들어갔다가 반년 만에 배우극장으로 옮겼다. 포스터 붙이기, 전단지 돌리기, 사무실 청소 같은 일부터 시작했다. 1년 정도 지나 아동극 무대에 처음 섰다. 그러다가 군대에 갔다. 제대하자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석처럼 그의 걸음은 대학로로 향했다. “20대 때는 개런티라는 것이 없었지만 굶지는 않았다. 사무실에서 자기도 하고. 그런데 그것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하면 즐거우니까 했다.”

그가 처음 방 한 칸을 얻은 것은 10년 전인 서른쯤 때였다. 그 무렵부터 그가 <라이어>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3년 3월부터 그는 <라이어>에 참가해 무시무시한 기록을 쌓아갔다. 지금도 계속 <라이어>에 출연 중인 그는 10년간 2천회의 무대에 섰고 <라이어> 1, 2, 3탄을 하면서 14개의 역할 중 여덟 개의 역할을 했다. 여름부터 부산에서 막을 올리는 <라이어>의 연출을 맡고 있기도 하다. <라이어>는 세상 물정과 담을 쌓고 연극만 바라보고 산 그에게 방 한 칸을 얻어주었고, 배우라는 자존감도 안겨주었으며, 세상이 그를 알아보게 만들었다.

“연극하면서 생활이 안 되니까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랬지만 어떻게든 살게 되기는 하더라. 은행 잔고가 없어서 그렇지, 연극하면서 후회해본 적도 없다. 어릴 때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하다 보니까 내가 원하던 직업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행복하다. 마누라를 만나서 지난해에 결혼도 하고, 올 초에 예쁜 아이도 태어나고, 전셋집도 마련하고…. 다 <라이어>를 만나서 생긴 일이다.”

그는 “코미디도 정극처럼 절실해야 사람을 웃길 수가 있다. 절박하지 않으면 남을 웃길 수 없다. 관객 중에는 ‘한번 웃겨봐’라는 마음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넘어오게 하려면 배우가 절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 “더 큰 김두관으로 돌아오겠다”

 ▶ “이상득, 금융위원회에 솔로몬 관련 전화 했다”

 ▶ 경제 민주화 논쟁은 ‘꼼수의 전쟁’인가

 ▶ 요람을 흔드는 ‘비밀 입양’의 함정

 ▶ 무엇이 ‘개가수’에게 열광하게 하나

 ▶ 대학로에서 오래 살아남는 연극의 4대 요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