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 비극 끝없어도 총을 파는 나라
  • 한면택│워싱턴 통신원 ()
  • 승인 2012.07.29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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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루 총격 사망자 95명에 달해…총기 규제 논쟁 일고 있으나 총기협회 등의 로비 앞에 무력

미국총기협회가 마련한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각종 총기들을 둘러보고 있다. ⓒ AP 연합

“총으로 흥한 나라, 총으로 망하나.” 미국에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콜로라도 영화관에서 심야 시간에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보고 있던 관객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해 12명의 목숨을 빼앗고 58명을 부상시킨 제임스 홈스의 총기 난사극이 계기가 되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끝없는 총기 비극으로 미국인들은 다시 한번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총기 규제 대신 총기 무장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은 매일 24명이 총격으로 피살되고 오발과 자살까지 포함하면 하루 95명씩 목숨을 잃는 ‘끝없는 총기 비극의 나라’이다. 미국 FBI(연방수사국)의 통계에 따르면 총격 피살자들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해마다 1만명 이상, 2008년과 2009년에는 각 9천명 이상을 기록했다가 2010년에는 8천7백75명으로 약간 줄었다. 오발과 자살까지 포함하면 총기 폭력 사망자는 매일 95명씩, 한 해 3만5천명에 달하고 있다. 미국의 총기 폭력 피해자는 인구 10만명당 5.5명꼴이어서 어느 선진국보다 많다. 독일은 10만명당 1.1명, 영국은 1.4명, 프랑스는 1.6명, 캐나다는 1.9명에 불과하다. 미국 내에는 현재 3억정의 총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국민 10가구 중에서 거의 네 가구(37%)가 총기를 갖고 있다. 이 가운데 34%는 권총을, 26%는 샷건을, 4%는 더 긴 장총이나 고성능 총기를 가지고 있다.

신분 확인도 서류 작성도 없이 총기 구입 가능

미국총기협회가 마련한 총기 전시장에서 한 관람객이 소총을 살펴보고 있다. ⓒ EPA 연합
미국에서는 돈만 내면 누구나 손쉽게 거의 모든 무기를 살 수 있다. 신원 조회도 필요 없고, 양식에 기재하는 것도 없다. 판매상이 얼굴 한번 보고 인상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면 돈을 내라고 하고 총기를 넘겨준다. 지역마다 열리는 건쇼(Gun Show)에 가면 얼마든지 총기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총기 규제 단체가 촬영한 몰래 카메라를 보면 오하이오, 미네소타, 버지니아, 텍사스 등지의 건쇼에서 권총과 엽총, 소총과 장총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돈뿐이었다.

오하이오 건쇼에서는 판매상이 “18세 이상의 주민이면 세금도 없고 서류 작성도 없다”라고 외친다. 총기를 구입하려는 사람이 가장 많이 쓰이는 AK-47 소총의 개량형에 관심을 보이자 형식적으로 나이와 주소를 묻는다. 나이는 생김새로 보아 그 이상 된다고 생각한 듯한 표정이고, 오하이오 주민이라고 하니까 더는 묻지 않는다. 6백60달러를 내니까 AK-47 소총을 두말없이 내주면서 “총을 즐기라”라고 덕담을 건넨다. 버지니아 건쇼에서도 어깨에 메고 가던 사람에게 반자동 장총을 팔 것이냐고 물으니 4백 달러만 내라고 답한다. 신원 조회나 서류 작성, 심지어 신분증 제시도 없이 즉석에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텍사스 건쇼에서는 반자동 장총을 3백20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고, 미네소타에서는 2백25달러에 권총을 살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많은 지역에서 총기를 사려면 신분 확인은 물론 범죄 전과를 조회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처럼 돈만 내면 묻지 마 식 총기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더욱 심각해진 것은 온라인에서 너무나 쉽게 총기와 실탄을 살 수 있게 된 점이다. 온라인 총기 거래에서는 신분 확인이나 신원 조회, 서류 작성 등이 일체 없다. 그렇게 거래해도 불법이 아니다. 아직 온라인 총기 거래를 규제하는 법률이 대다수의 주에 아예 없기 때문이다.

NBC 뉴스 팀이 잠입 취재한 결과 온라인에서는 수백 개의 총기 판매 사이트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온라인으로 총기를 선택하면 단 몇 분 안에 총기 판매상과 접촉할 수 있다. 쇼핑몰 주차장이 주된 접선 장소이다. 이때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얼굴 한번 보고 가격만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NBC 취재진은 단 한 시간 안에 권총에서 장총에 이르는 여덟 정의 각종 총기와 실탄을 살 수 있었다.

온라인에서 권총 구입을 신청한 다음 파킹장에서 판매상을 만났다. 신원 조회를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판매상은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안 해도 된다고 답한다. 5백 달러를 받고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경찰들이 쓰는 피스톨 권총 새것과 실탄을 넘겨준다. 한 판매상은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와 총기 거래를 할 때 조수 역할까지 시킨다.

애리조나 주의 한 약국 주차장에서 이루어진 거래 내용은 충격적이다. 50구경 캘리버 라이플 장총은 무시무시한 성능을 지닌 살상용 총기이다. 이 장총은 사거리가 5마일이나 되며 장갑차까지 뚫을 수 있는 고성능 공격용 무기로 유명하다. 심지어 헬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성능을 갖고 있다. 이러한 고성능 무기를 팔면서도 신원 조회는커녕 그 흔한 신분증조차 보지 않고 돈만 받고 있다. 미국에 주소지가 없는 외국인도 구입이 가능하고 범죄자, 테러 조직원도 돈만 내면 어떤 무기든 손쉽게 사들일 수 있다는 뜻이어서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공포스럽기까지 하다고 NBC 뉴스는 개탄했다.

‘총기 허용’ 여론 우세해 규제는 사실상 불가능

미국에서 다시 한번 총기 규제 논쟁이 일고 있으나 이번에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1996년 이후 여러 차례 대형 총격 참사에도 총기 규제 강화 조치가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도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 등 일부 정치인들만 총기 규제 강화를 외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총기 옹호론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미트 롬니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물론, 버락 오바마 대통령조차 총기 규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실제로 1996년에 한 번 총기 규제가 강화된 이후 대형 총기 비극이 벌어졌을 때도 총기 규제 강화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9년 4월 13명의 사망자를 낸 콜로라도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2007년 한인 조승희군의 총기 난사로 33명이 사망한 버지니아테크 비극, 2009년 13명을 숨지게 한 텍사스 포트 후드 미군기지 총격 사건 등이 일어난 다음에도 총기 규제 강화는 없었다.

영화 <십계>로 유명한 찰턴 헤스턴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장총을 들고 대중 앞에 나타나 총기를 옹호했던, 총기 옹호론자들에게는 모세와 같은 인물이었다. 헤스턴 때문에 더 유명해진 미국총기협회인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는 가장 파워풀한 로비 단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NRA는 4백만명의 회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로 공화당 정치인들을 상대로 강력한 로비 활동을 펼쳐 총기 옹호를 강화시키거나 총기 규제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NRA를 중심으로 총기 옹호파들은 최근 대통령과 연방의원 후보들에게만 2천7백70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상당한 로비 자금을 뿌렸다. 이 로비 자금의 86%는 공화당에게 집중되었다.

반면 총기 규제론자들은 고작 1백90만 달러를 기부하는 데 그쳤는데, 그중 94%는 민주당에게 지원되었다. ‘Gun Lobby(총기 로비)’가 ‘Gun Control(총기 규제)’을 압도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총기 규제보다 총기 보유 여론이 더 많아진 미국인들의 태도 변화가 총기 규제를 더 어렵게 만든 주된 요인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올해 초 실시된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 50%가 현재의 총기 정책에 만족한다고 답해 불만족한다는 의견 42%보다 많았다. 2001년에는 만족 38%, 불만족 57%로 총기 규제 목소리가 훨씬 많았으나 이제는 역전된 것이다.

지난 4월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서도 총기 보유 권리 지지는 49%로 총기 규제 지지 45%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 때문에 미국에서 총기를 통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으며 총기 비극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만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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