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예술·스포츠 망라한 ‘인재 1번지’
  • 이춘삼│편집위원 ()
  • 승인 2012.10.3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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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 인맥 지도 | 연세대학교 ④

연세세브란스병원 ⓒ 시사저널 최준필
1백27년의 풍상을 겪는 동안 무수한 인물이 연세대를 거쳐 갔다. 우리나라 대학사에서 가장 오랜 연륜을 가진 연세대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국학과 신학문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그와 궤를 같이해 많은 석학이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고(故) 위당 정인보 선생이 떠오른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해 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 동포의 계몽에 힘을 쏟던 그는 귀국해 연희전문, 이화여전, 세브란스의전, 중앙불교전문 등에서 국학 및 동양학를 강의하면서 민족사관의 확립에 진력했다. 그리하여 민족사관에 입각한 <조선사연구>를 저술했고, 우리 고전 연구의 터전을 마련했다.

고 외솔 최현배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우리말·글 교육을 받았다. 일본 교토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1926년 연희전문 강단에 선 그는 1938년 9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다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했다. 1941년 5월 연희전문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했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임하고, 1945년 광복 때까지 4년간 옥고를 치렀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돌아와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 퇴임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국어학 연구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해 20년간 한글학회를 이끌었으며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부회장, 대표이사 등으로 국어운동의 중심에 섰다.

김연준·주영하 등 창학의 주역들도

고 한결 김윤경 선생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회원이 되어 주시경 스승의 뜻을 이어받았다. 우리말과 글 연구·보급에 앞장섰으며 1922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뒤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공헌했다. 국학 연구와 민족주의 사상 및 국어운동에 관여한 선생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고 홍이섭 선생은 연희전문에서 정인보, 최현배, 김윤경, 백낙준과 같은 국학의 선각자들이 이어온 연세 학풍을 물려받아 한국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조선과학사>를 집필했으며, 광복 후에는 정인보 선생의 학문을 계승·발전시켜 실학을 다산의 사상으로 집약하는 업적을 남겼다. 1953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한국사의 방법> <한국근대사> <한국정신사> 등의 저술을 통해 일제의 한국 식민사 체계를 탈피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연세 국학의 선각들이 다져온 국학 연구의 축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연세대 출신으로서 창학의 주역이 된 인물을 꼽아보자면 고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 고 주영하 세종대 설립자, 외무장관으로서 한일협정 체결에 큰 역할을 했던 고 이동원 동원대 설립자가 있다.

산부인과 개업의로 명성을 쌓았던 차경섭 차의과대학 이사장(의학 35)은 국내 민간 병원 최초로 시험관 아기를 성공해 이름을 알렸으며, 포천중문의대를 설립했다. 그의 뒤를 장남인 차광열 차병원그룹 회장(의학 71)이 잇고 있다. 김예환 예일학원 이사장(상과 43)은 환일중고 설립으로부터 출발해 예일여중·고 설립에 이르기까지 사립 중등학교 분야에서 이름을 알렸다.

건양대 설립자인 김희수 이사장(의학 46)은 우리나라 안과학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꼽힌다.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한국의 대표적 안과병원 ‘건양의대 김안과’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962년 8월15일 영등포 로터리 인근의 허름한 2층 건물에서 의사 한 명이 15명의 환자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 김안과는 이제 안과 전문의 40명이 하루 1천5백여 명의 안질환 환자를 진료하는 아시아 최대 안과 전문 병원으로 자리 잡았다. 세브란스 의대를 나온 김이사장은 한국전쟁 직후 대구구호병원에서 눈 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보고 안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집안은 딸, 외손자를 포함해 3대째 안과 의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이사장은 1990년 고향인 충남 논산에 건양대를 설립했고, 지금까지 총장으로 재임 중이다.

이원희 대원학원 이사장(경제 53)은 최초의 외국어학교인 대원외국어고등학교를 1984년에 설립했다. 국제화 시대의 도래를 예견한 안목이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하버드·예일 등 미국 아이비리그의 우수 대학에서 입학생을 모집하러 찾아오는 명문 고교로 성장했다. 공보처 촉탁 서기로 있다가 KBS로 자리를 옮긴 그는 KBS 편성계장, MBC 편성과장을 거쳐 TBC 개국 때 편성국장으로 스카우트되어 상무까지 지낸 방송인 출신이다. 초등학교 교장이던 부친의 가르침을 받고 육영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김동길 교수(영문 47)는 80대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박영식 교수(철학 54)가 지난 8월 학술원 회장으로 취임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연세대 의료원은 1885년 미국인 선교 의사 알렌이 세운 최초의 근대적 의료기관인 광혜원에서 출발해 제중원, 세브란스병원을 거쳐 현대적 의료기관으로 성장했다. 교육과 연구, 진료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연세대 의료 분야는 교육기관으로 의대·치대·간호대를 망라하는 연세의료원과 진료기관인 세브란스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원주기독병원과 그 밖에 암센터, 재활병원 등 특수전문병원을 갖춘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연세대 의대 출신 중에는 사계의 권위자가 많다. 그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허갑범 명예교수(의학 58)는 학교를 떠난 뒤 차린 자신의 개인 병원에서 지금도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내에 간호원 양성 전문 기관으로 설치된 간호학교는 1910년 최초로 정규 교육을 받은 간호원을 배출했으며, 그것이 오늘날 연세대 간호대학의 모체이다. 김모임 전 대한간호학회 회장(간호 55)은 1959년 연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출발해 연세대 간호대학장을 지내기까지 간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는 국회의원,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했으며 ‘간호학계의 대모’로 칭송을 받는다.

연세대 교정에는 윤동주 시인(연희전문 문과, 1917~45년)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그가 머물렀던 기숙사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윤시인의 유족들은 최근 그의 육필 원고와 유품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거물 문인과 스포츠 스타 대거 배출

최인호(영문 64)·마광수(국문 69)·성석제 (국문 79)·공지영(영문 81) 등의 쟁쟁한 작가들이 연세대 문단의 맥을 지켜 나가고 있다. 지금도 서점가에서 스테디셀러로서 꾸준히 팔려나가는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쓴 기형도 시인(정외 79)은 천재적인 문학성을 인정받으며 대중의 사랑도 듬뿍 받았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해 안타까움을 남겼다.

소설가인 한강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국문 89)는 아버지 한승원씨의 뒤를 이어 소설을 쓰는 부녀 작가이다. 부녀가 대를 이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연세대는 종목을 가릴 것 없이 역량 있는 스포츠 스타들을 배출하는 산실로 자리 잡아왔다. 연세대 체육인 관련 모임으로 연세체육회가 있다. 1946년 설립된 연세체육회는 동문 체육인들의 화합과 모교 체육 발전을 지원하는 모임으로서 현재 박갑철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법학 61)이 회장을 맡고 있다.

연세대는 특히 농구 종목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한국 농구의 제1 전성기라 불리는 1960~70년대, 국가대표로서 빛나는 선수 시절을 보낸 김인건(경영 62)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 감독으로, 프로농구 출범 이후에는 삼성전자·진로 농구단장, SK농구단 부단장, 대한농구연맹 부회장 등을 거치면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2002년과 2008년 두 차례 태릉선수촌장을 지내면서 후진들을 양성했다. 선수들을 인격적으로 대접하는 풍토를 길렀고 ‘스포츠 과학화’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가 연세대 유니폼을 입고 뛰던 시절, 곁에 신동파(상과 63)·김영일(정외 60)과 같은 기량 있는 선수들이 있어 연세대 농구팀은 그 자체로 국가대표팀이나 다름없는 강팀이었다.

현역 시절 농구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혔던 허재 전주 KCC이지스 감독의 장남인 허웅 선수가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다. 허웅은 용산고 재학 시절에 이미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다. 허재 감독과 허웅·허훈(용산고 2학년) 3부자는 ‘축복받은 농구 DNA’를 가진 가족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연세대는 또한 풍부한 골프 인재들을 확보하고 있다. 신지애 선수(체교 07)는 세계대회에서 연거푸 우승 트로피를 안으며 연세대의 성가를 높였고, 유소연 선수(체교 09) 역시 샛별로 떠오르고 있다. 연세대 골프 선수들은 버디를 기록할 때마다 일정 금액씩의 기금을 적립해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난치병 환자들을 후원하고 있다.

체조 요정 손연재 선수가 2013학년도 연세대 수시모집에 지원했다. 손선수는 그동안 7개 대학으로부터 입학 제의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진행 중인 입학 사정의 결과는 10월31일에 발표될 예정이다.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최동원씨(경영 77)가 지난해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나는 최고이며,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최고답게 던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빠른 직구와 낙차 큰 변화구 앞에서 타자들은 맥없이 무너졌다. 홈런을 얻어맞으면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다음 대결 때 “한번 더 쳐보라”라며 한복판에 공을 찔러넣던 두둑한 배짱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최동원씨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1·3·5·6·7차 전에 나와 혼자 4승(1패)을 따냈다. 최동원씨가 프로 8년간 통산 2백48경기에 등판해 남긴 성적은 1백3승 74패 26세이브이다. 1984년 한국시리즈 4승(1패)과 그해 기록한 2백23 탈삼진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연세대에는 명아나운서로서 이름을 날렸던 동문이 수두룩하다. 임택근 전 아나운서클럽 회장(정외 51)은 출중한 용모와 중후한 목소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김동건 아나운서클럽 회장(교육 58)이나 차인태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석좌교수(성악 63) 역시 듬직한 모습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명MC로 이름을 날린 임성훈씨(사학 70)도 연세대 출신이다.

여성 아나운서 중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백지연 PJY스피치코리아 대표(심리 83)와 장은영 커피와문화 이사(신방 91)가 있다. 연세대 재학 시절인 1992년에 미스코리아 선에 뽑혔던 장은영씨는 KBS 아나운서로서 대중적 인기를 모은 <열린음악회> 프로를 진행해 얼굴이 널리 알려졌고, 1999년 스물일곱 살 연상의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과 결혼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오세철 경영대 명예교수(상학 61)는 자신의 전공을 뛰어넘어 재학 시절부터 연극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배창호 영화감독(경영 71)과 함께 ‘연상극우회’를 만들었는데, 연세대 입학 동기인 누나 오혜령 극작가(영문 61)와는 ‘연세예술동우회’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연극배우 오현경씨(국문 56)와는 ‘형님·아우’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이번 호를 끝으로 지난 2009년 10월27일자 제1044호 창간 20주년 기념호부터 시작해 3년여 동안 연재해온 특별 기획 시리즈 ‘한국의 신 인맥 지도’를 모두 마칩니다. 오랜 기간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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