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의 사건추적]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
  • 표창원│경찰대 교수 ()
  • 승인 2012.11.13 13:4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홉 살 때 성폭행당한 여성이 20년 후 가해자 살해 ‘아동 성폭력’ 심각성 알린 김부남 사건

1991년 8월16일 김부남 피고인이 여자 교도관에 이끌려 전주지법 1호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 뉴스뱅크이미지
1970년대 대한민국에는 ‘어린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윤리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남존여비, 남성 중심의 사고와 관행이 팽배해 수많은 ‘여자 어린이’가 유·무형의 차별과 희롱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홉 살 김부남이라는 여자 어린이였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녀의 집에는 우물이 없었다. 그래서 늘 이웃집 송씨 아저씨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남 어린이가 혼자 물을 길으러 갔고 집에 있던 35세 송백권씨가 ‘심부름 좀 시킬 테니 잠깐 들어오라’며 방 안으로 소녀를 불러들였다.

청소년기 들어서야 범죄의 의미 깨달아

송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안방에 들어간 부남이를 덮쳐 강제로 옷을 벗기고 입을 틀어막은 뒤 강간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죽을 것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던 부남이에게 송씨는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말하면 너도 죽고 네 부모와 오빠도 다 죽는다”라고 위협했다.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나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자신과 가족에게 더 나쁜 일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부남이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하며 질문하는 가족과 이웃, 학교 선생님에게는 ‘그냥 좀 다쳐서 아픈데 괜찮아요’라며 얼버무렸다. 그렇게 10일 정도가 지나자 하체의 상처는 거의 아물고 걷는 것이 전처럼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부남이는 다시는 물을 길으러 송씨네 집에 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사정하다가 부모에게 혼나는 일이 잦아졌다. 지나치게 화장실을 자주 찾고 밤에 오줌을 싸며 툭하면 멍하니 정신 줄을 놓는 등 이상 행동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누구도 따뜻하고 친절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왜 그러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부남이는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고, 친구와 놀이나 대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늘 불안하고 우울한 외톨이로 초등학교 생활을 마쳐야 했다.

당시에 많은 가난한 집 딸들이 그랬듯이, 김부남 어린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척이 소개한 서울 어느 부잣집 가사 도우미(가정부) 일자리를 얻어 상경했다. 주인집 가족은 친절했지만 어린 나이에 낯선 서울, 그것도 남의 집에 와서 하루 종일 밥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면서 지내는 삶은 고달팠다.

그나마 짐승 같은 이웃집 송씨 아저씨에게 당했던 악몽 같은 사건 현장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루 종일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번 돈은 고스란히 고향집 부모에게 보내져 남자인 오빠의 학비로 쓰였지만 부남이는 불평도, 불만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운명이고 자기 몫의 삶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춘기를 넘어 청소년기가 되면서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고 방송 등에서 접하는 남녀 관계 모습이 김부남씨의 상처를 후벼파며 삶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당한 그 일이 어떤 범죄이며 무슨 의미를 갖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민감한 10대의 감수성과 오랜 기간 남의집살이를 해온 데 따른 마음의 상처에 더해진 성폭력 피해 후유증은 김부남씨의 하루하루를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김부남씨는 스무 살이 되면서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부모는 그 당시 대개의 부모들이 그랬듯 중매쟁이를 통해 부남씨의 상대를 찾아 결혼을 시키게 된다.

결혼과 함께 남들처럼 ‘평범한 행복’이 찾아올 줄 알았던 김부남씨. 하지만 아홉 살에 당한 성폭행 피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고 남편의 손길이 마치 강간범 송백권씨의 더러운 그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부 관계를 할 수가 없었다.

당황하고 분노한 남편에게 어렵게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남편은 이해도, 공감도 하지 못했다. 10년이 넘게 지난 일이고, 어린 나이에 겪은 일을 왜 아직 극복하지 못하느냐는 의문과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남편은 처갓집으로 전화해 이 사실을 알리며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고, 부남씨 가족은 처음으로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남씨 부모는 딸을 데리고 가까운 대도시 병원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중얼거리며 이야기하다가도 머리가 아프다고 회피하는 등의 증상을 근거로 ‘정신분열증’ 진단을 내리게 된다.

이후 한 달간 통원 치료를 받았지만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결혼 두 달 만에 이혼을 요구한 남편의 뜻을 받아들여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후 두 번째 결혼에도 유사한 문제가 반복되며 불화와 갈등을 겪게 된다. 자신이 겪는 모든 고통과 문제의 원인인 아홉 살 때 당한 성폭행에 대한 처벌 방법을 찾기 위해 밤새 법률 서적을 뒤지며 고소 준비를 하는 부남씨에게 남편은 ‘공소시효가 지나서 소용없을 것’이라며 다 잊으라고 말리기만 했다.

13세 미만 아동과 지적장애인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해바라기아동센터. ⓒ 연합뉴스
두 번의 결혼 생활도 파경으로 얼룩져

경찰을 찾아 문의를 해도 ‘공소시효도 지났지만, 강간은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인데 이미 고소 기한인 6개월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는 답을 듣게 되자 부남씨는 절망하게 된다. 아홉 살 어린 나이, 자신이 당한 피해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도 몰랐고, 누구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몰랐던 피해자의 사정은 전혀 헤아리지 않는 ‘가혹한 법’이었다.

분노와 좌절에 빠진 부남씨의 이상 행동과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반응들은 다시 ‘정신분열증’ 진단으로 이어져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첫 결혼과 달리 두 번째 결혼에서는 남편과 부부 관계를 갖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때마다 어린 시절의 악몽이 떠올라 소리를 지르고 남편을 밀쳐대는 발작 증세가 더 심해질 뿐이었다.

결국 남편과의 불화는 심해져만 가고, 가정 경제도 파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어린 시절 강간 피해 때문이라고 생각한 김부남씨는 고향 동네를 찾아 자신을 성폭행한 송백권씨를 향해 폭언과 협박을 퍼부어보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송씨는 자신의 범행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며 김부남씨의 오빠를 통해 40만원을 합의금조로 내밀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실의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피해자 김부남씨를 위해 진실을 찾고 정의를 구현해주려 하지 않았다.

이웃집 아저씨 송백권씨로부터 강간 피해를 당한 지 20년이 지난 1991년 1월30일, 김부남씨는 경찰이나 국가가 포기한 강간범 처벌과 ‘정의’ 실현을 스스로 해내기로 작정했다. 더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삶이 망가져 미룰 수가 없었다. 시장에 나가 부엌칼과 과도를 사고 낡은 손가방을 잘라 칼집을 만들어 허리띠 양쪽에 찼다.

옷을 입고 허리띠 양쪽 칼집에 칼을 꽂은 뒤 코트를 입으니 밖에서는 칼이 보이지 않았고, 언제든지 칼을 꺼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코트 자락을 제치고 빠르게 칼을 뽑아드는 연습도 여러 차례 했다.

송씨가 밤이면 문을 모두 잠그고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찾아가야 해서 길을 서둘렀다. 김부남씨는 송씨의 집으로 찾아가 문밖에 서서 ‘할 말이 있으니 친정집으로 오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송씨는 ‘이미 40만원 주고 합의 봐서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왜 또 그러느냐’며 마구 욕설을 퍼부어댔다. ‘집으로 오는 것이 겁나면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하자’는 김부남씨의 요구에 송씨는 ‘미친 여자’ 등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응수했다.

김부남씨는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가 코트 자락을 제치고 부엌칼을 뽑아들었다. 중풍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였던 송씨는 소리를 질러댈 뿐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김부남씨는 송씨의 성기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찌르고 휘두르고 또 찔렀다. 송씨의 필사적인 마지막 방어 행동에 부엌칼을 빼앗기게 되자 김씨는 주저 없이 허리춤에서 과도를 꺼내들고 다시 하복부 쪽을 향해 마구 공격했다.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 소리에 놀란 이웃 주민들이 달려와 김부남씨를 뒤에서 붙잡고 칼을 뺏으려 하자 김부남씨는 온 힘을 다해 칼을 뺏기지 않으려 애썼다.

아동 성폭력 문제를 수면 위에 처음 끌어올려

하지만 결국 칼을 빼앗기게 된 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초점 없는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과 공포에 두 눈을 크게 치껴뜬 송백권씨는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심장 박동도 멈춘 상태였다. 곧이어 출동한 경찰은 김부남씨를 살인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김부남씨의 송백권씨 살해 사건 혐의를 입증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지켜주지도 못하고 강간범을 처벌해주지도 않는 법을 대신해 아동 성폭행 피해자가 스스로 나섰다는 점과 아동 성폭행 피해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김부남씨가 법정에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라고 진술했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피해자의 가해자 살해 행위의 처벌 여부와 정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1991년 8월26일 1심 법원은 김부남 피고인에 대해 ‘원래 가지고 있던 내성적이고 정신분열증인 성격이 아홉 살 때의 강간 경험으로 인하여 더욱 정신분열성인 성격으로 발달되었고, 이러한 치명적인 경험이 적절히 치유되지 못하여 결혼 후에도 정상적인 성생활이 어려워지고 더욱이 이혼으로 충격을 받게 되면서 증상이 악화되었다. 아홉 살 때의 강간 경험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발전하고 이상한 행동, 부적절한 정서, 흥미의 결여, 심한 사회적 고립과 위축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잔재형 정신분열증 환자로, 이 사건 범행 당시에도 이와 같은 증상이 갑자기 발현되면서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의한 행동의 장애를 보였던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다만 범행에 사용된 칼 두 자루의 구입 경위와 칼집을 만든 경위 등 그 범행의 계획성, 범행 당시에 1차 식칼을 뺏기자 과도로 재차 피해자를 가해하는 등의 범행 방법과 수단, 그 범행 동기와 경위, 시간과 방법 등을 논리 정연하게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할 때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어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심신 상실’의 상태가 아니라 감형의 대상인 ‘심신 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인정했다. 법원은 징역 2년 6개월(살인죄 최저 형량인 5년의 절반)을 선고하고 그 집행을 3년간 유예하면서 1년간의 치료 감호 명령을 내렸다. 항소심과 대법원 최종심에서도 항소와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다. 김부남씨는 현재 지방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아동 성폭력’ 문제를 처음으로 수면 위에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동방예의지국·삼강오륜이 엄정하게 살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 짐승보다 못한 아동 성폭행이, 그것도 낯선 괴물이 아닌 이웃집 아저씨나 친척, 가족 등 ‘아는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회 심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아동 성폭력을 의심하고 발견하고 대응하는 시스템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나 피해 아동이 용기를 내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호소해도, 어린 피해자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고, 믿을 만한 정황이 있다 해도, 피해 어린이가 유혹하거나 원인 제공을 했으리라 단정했으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여자아이인 피해자보다 가해자인 오빠나 사촌, 삼촌, 이웃 남성이 입을 피해를 더 걱정해 쉬쉬하고 덮어두기 일쑤였다.

피해자를 위해서도, 일을 크게 벌려 소문이 나서 ‘더럽혀진 여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보다 잊히는 것이 낫다는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세월과 함께 성폭행 피해의 충격도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잊혀지리라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김부남씨의 가해자 살인은 이 모든 관행과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충격과 논란을 일으켰고,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아동 성폭력의 존재와 그 충격의 참담함을 알게 했다. 아동 성폭력을 둘러싼 법과 제도, 인식과 관행의 변화 필요성을 공감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예외적인 사건이야. 김부남씨에게만 특별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 다른 아이들에게는 문제가 없어’라는 안일한 반발이 제기되면서 1년 뒤, 더 끔찍한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가해자 살인 사건(속칭 김보은양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실질적인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민 모임 ‘발자국’ 회원들이 지난 9월7일 서울역 광장에서 아동 성폭행 추방을 위한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5년 캐나다에서 행해진 와이즈버그의 연구에서, 중범죄를 저지르고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여성 중 53%가 아동 성폭행 피해자였고, 청소년 성매매 여성 중 60~70%가 아동 성폭력, 특히 친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정신적 상처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을 경우 범죄 가해자로 변하거나 성매매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등 심각한 후유증이 뒤따르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피해자가 가해자를 공격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형태의 분노 표출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피해자는 분노와 상처, 고통을 안으로 삭인 채 안고 살아간다.

특히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 쓸데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낮은 자존감과 자신을 싫어하는 자기혐오, 극심한 우울감 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사람에 대한 ‘신뢰’ 자체를 잃고 의심과 경계에 휩싸여 사회 관계 형성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다.

악몽과 불면증 등 수면 장애는 부산물처럼 뒤따른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도 피해 당시 상황이 떠오르고 극심한 공포를 경험하는 ‘플래쉬 백(Flash back)’ 현상은 피해 생존자뿐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특히, 아동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가 ‘해리(dissociation)’ 증상이다. 해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마음이 도망갈 장소를 마련하는 능력이다”라고 풀어 설명할 수 있다.

성폭력을 당하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혹은 그 기억을 그대로는 도저히 감당하거나 이겨낼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서 몸으로부터 마음을 분리해내 다른 곳으로 보내 숨게 하고는, 마치 그 고통을 겪는 몸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끼는 해리 상태가 자주 발견된다.

한편으로는 ‘해리 능력’ 덕분에 그 참혹한 피해를 겪고도 마음이 부서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피해가 즉시 발견되지 않거나 피해의 충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중인격장애 환자 중 98%가 아동 성폭력 피해자라는 연구 결과도

더 심한 경우에는, 해리의 결과 아예 마음속에 성폭력 피해 자체를 알지 못하는 ‘다른 인격’이 만들어진 뒤, 살아가는 내내 그 상태가 지속되어 한 몸에 서로 다른 여러 인격체가 공존하는 ‘다중인격장애’라는 심각한 정신 장애를 앓게 되기도 한다.

1991년에 마르고 리베라가 행한 다중인격장애자 대상 연구는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는데, 조사 대상이었던 1백85명의 다중인격장애 환자 중에 무려 98%가 아동 성폭력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각하고 다양한 아동 성폭력 피해 후유증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설명이 김부남씨 판결에서도 언급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과거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의 사회 부적응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1980년에 미국 정신의학회는 ‘정신질환의 임상 및 통계 교본 제3집(DSM-III)’의 질병 분류 체계에 PTSD를 질병의 하나로 추가했다.

세계보건기구는 ‘국제질병분류’의 제10호에 이를 추가했다. 최근에는 교통사고나 산재 사고와 같은 돌발적인 사고, 열차·비행기 등의 대형 참사, 성폭력과 같이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범죄 등을 겪은 피해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성 씨랜드 화재 사건 이후, 피해자 부모들 다수가 PTSD 증상을 보여 이슈화된 적이 있고,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 다수가 PTSD 진단을 받았다. PTSD의 과학적 근거와 임상적 표현을 이해하는 열쇠는 ‘쇼크, 충격을 뜻하는 심리적 외상’의 개념이다.

PTSD는 극한적인 위협이나 공포를 겪고 난 뒤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정신·신체 증상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로, 전형적 증상은 공포스런 사건의 상상적 재경험, 정신적 둔마, 자율신경 과민, 우울증, 정신지체 장애, 주정 중독, 심할 경우에는 만성 정신분열증 등이다.


 

Series) 표창원 교수의 사건 추적


1. 악마가 된 외톨이의 빗나간 분노의 돌진
- 1991년 10월 여의도 광장 차량 폭주 사건

2. 미군에 희생된 꽃다운 청춘의 절규
- 1992년 10월 동두천 주한 미군 범죄 희생자 윤금이씨 사건

3. 남자친구의 환심 사려 끔찍한 범행
- 1990년 유치원생 곽재은양 유괴·살해 사건

4. 만삭의 여인이 벌인 잔혹한 범죄
- 1997년 8월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 사건

5. 자녀 학대가 부른 끔찍한 패륜 범죄
- 2000년 5월 과천 토막 살인 사건

6. 고희 되도록 못 버린 ‘그놈의 도벽’
- 권력자 울리고 서민 웃겼던 대도 조세형 사건

7. 악마로 변한 살인자의 두 얼굴
- 1998년 부천 비디오 가게 살인 사건

8. '살인자' 꿈꾼 소년의 잔혹한 범행
-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다 잠자던 동생 도끼로 내리쳐

9.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
- 아홉 살 때 성폭행당한 여성이 20년 후 가해자 살해 ‘아동 성폭력’ 심각성 알린 김부남 사건

10. '짐승' 의붓아버지 죽인 비운의 여인
- '성폭력 특별법' 탄생시킨 김보은·김진관 사건

11. "유전 무죄, 무전 유죄" 탈주범의 절규
- 1988년 탈주범 지강헌 일당의 인질범 사건
 

12. 법대 여대생 꿈 짓밟은 판사 장모의 편집증
- 미행과 감시, 위협하다 킬러 고용해 살해

13. 기막힌 살인 누명 쓴 '억울한 3인조'
- 경찰, 가상 사건 꾸며내 범인으로 몰아, 2001년 속초 콘도 살인 암매장 사건

14. 무고한 인명 앗아간 '지옥 지하철'
- 1백92명 사망, 1백48명 부상한 최악의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15. 탐욕스런 선수들의 썩은 스포츠 정신
- 조폭과 승부 브로커들, 금전 동원해 선수 유혹한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

16. 무참하게 행복 짓밟힌 한 가족
- "웃음소리에 화가 나 살인했다"...2010년 서울 신정동 묻지마 옥탑방 살인 사건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