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연비 논란 핵심은 ‘가혹 조건’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2.11.1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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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마찰값 대입한 탓에 미국에서 ‘연비 과장’ 지적받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신차에 올라타 차량 내부를 살펴보고 있다. ⓒ 현대·기아차 제공
현대·기아차가 ‘연비 논란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지난 11월1일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조사 결과 현대차 13개 차종의 연비가 실제보다 과장되게 표시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대·기아차는 재빠르게 시정 권고를 받아들여 연비를 하향 조정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불길은 국내로까지 번지고 있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은 현대·기아차 연비의 정확성 문제에 대한 검증과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미국에서 추가로 8천억원 규모의 소송까지 제기되는 등 난국을 맞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대·기아차는 연비를 조작하지 않았다. 다만 연비를 측정할 때의 조건을 미국 현지 조건이 아닌 한국 조건에 맞춰 공인 연비를 책정했다는 것이 이번 연비 논란의 핵심이다. 연비 논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소 복잡한 공인 연비 측정 방법에 대해 알아야 한다. 많은 소비자가 연비 측정을 도로나 트랙에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공인 연비는 롤러가 달린 차대동력계 위에 자동차를 올려놓고 마치 주행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면서 연비를 측정한다. ‘자동차용 러닝머신’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는 현대·기아차뿐 아니라 수입 자동차회사들도 마찬가지다.

현대·기아차 연비 논란과 더불어 실제 연비와 공인 연비의 차이에 대한 지적이 많다. 그러나 공인 연비는 실제 연비보다 높게 나올 수밖에 없다. 차를 세워놓고 하는 측정이어서 바람의 저항, 온도 변화 등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가혹 조건’을 적용해 실제 운전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든다. 가혹 조건이란, 타이어와 도로의 마찰 계수 등 차가 실제 운행을 하면서 겪게 되는 변수를 말한다. 가혹 조건은 나라마다 차이를 보인다. 도로 사정이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미국, 유럽, 한국, 일본 순으로 강하게 나타난다. 가혹 조건이 강할수록 같은 차라도 연비가 적게 나온다. 현대·기아차의 연비가 논란이 된 것은 미국에서 판매하는 차량의 가혹 조건을 미국이 아닌 한국에 맞춰 적용했다는 데 있다. 국내 가혹 조건이 미국 조건보다 느슨하기 때문에 국내 조건을 적용할 경우 연비가 높게 나온다.

미국 정부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자동차 브랜드의 연비 측정에서 ‘자기 인증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자기 인증제란 자동차 회사에서 정부가 정해놓은 가이드라인에 따라 연비를 측정해 정부에 제출하면 이를 공인 연비로 인증해주는 것을 말한다. 정부는 이후 자체 테스트를 통해 브랜드가 제출한 수치와 자체 측정 결과를 비교하게 되는데 이 차이가 크게 나타나면 시정 조치를 내린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현대차에서 제출한 연비와 미국 환경보호청이 측정한 연비가 3% 정도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현지에 맞는 조건으로 연비 측정해야

현대·기아차는 억울한 측면도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충족시키며 측정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현대·기아차는 미국 환경보호청의 가이드라인을 어기지는 않았다. 미국 환경보호청 노면 저항값 기준은 단순히 ‘평평한 도로’로 되어 있다. 이 기준만 충족시키면 업체는 자체 시험을 하며 아스팔트 도로나 시멘트 도로 중 어떤 저항값을 적용해도 괜찮다. 하지만 사후 테스트 단계에서 미국은 시멘트 도로를 가정한 저항값을 설정했다. 아스팔트 저항값을 반영한 업체는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지금과 같이 자기 인증제로 연비를 측정하는 시스템에서는 같은 문제가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이드라인에 맞춰 연비를 측정해 제출했다고 해도 추후 미국 환경보호청 검사 방식으로 측정한 결과 값과 차이가 나면 시정 권고 조치를 받게 된다. 아무리 권고 조치라고 해도 미국 환경보호청의 권고를 듣고 버틸 수 있는 자동차 브랜드는 없다. 미국은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이다. 1년에 판매되는 차량이 1천3백만대가 넘는다. 국내 연간 자동차 판매량의 10배 가까운 수치이다. 게다가 미국 환경보호청은 특히 자동차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에는 이산화탄소 배출 쿼터제가 있다. 미국 시장에서 일정 대수 이상 자동차를 판매하는 자동차회사들이 판매한 모든 차종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구해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자동차 브랜드들은 이 순위에서 앞서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포드와 같이 큰 트럭을 많이 만드는 업체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형차나 하이브리드 개발에 치중한다. 이처럼 미국 환경보호청의 정책이 곧 자동차 브랜드들의 지향점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미국에서 선전하는 현대·기아차의 경우 연비 문제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2011년 모델 기준으로 현대·기아차와 일본의 혼다는 미국 시장 내에서 연비 1, 2위를 다투고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 순위에서도 현대·기아차와 토요타 등 일본 브랜드들이 상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처럼 자국 브랜드를 누르고 잘나가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미국 정부를 자극할 수 있다. 지난 2월 미국에서, 일본 혼다 자동차가 미국에서 광고한 것보다 실제 연비가 낮다는 이유로 소액 배상 소송을 당해 패소한 바 있다. 이번 현대·기아차 연비 논란도 거슬러 올라가면 올 7월 미국 소비자단체인 컨슈머 왓치독이 미국 환경보호청에 제보해 일어난 것이다. 미국에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있어 논란이 불거질 경우 이미지 타격은 물론 금전적으로도 적지 않은 손해를 입을 수 있다.

미국 현지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정확히 맞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연비가 높게 나오도록 무리수를 쓰는 것보다는 규정을 지키는 것을 넘어 철저히 미국 현지에서 요구하는 값을 반영하는 것이다. 수입차 브랜드 BMW·폴크스바겐·벤츠 등도 한국에서 판매되는 차량의 연비는 철저히 한국 현지 상황에 맞는 가혹 조건에 맞춰 공인 연비를 측정한다. 본사에서 주는 값을 쓰지 않고 한국에 맞는 가혹 조건 값을 적용한다. 토요타의 프리우스는 우리보다 가혹 조건이 느슨한 일본에서는 연비가 ℓ당 38km가 나오지만, 한국에서의 공인 연비는 29.2km이다. 한국 실정에 맞는 가혹 지수를 적용한 결과이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올해 4월부터는 연비 측정에서 다섯 가지 가혹 조건이 추가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실제 연비와 가깝게 공인 연비를 내는 방식을 계속 연구하고 이를 적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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