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의 문학, 이제부터 시작이다”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2.12.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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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씨 등단 50주년 맞아 ‘축하연’ 열려

‘어느 쪽 길을 택하는 것이 옳았던지는 태산의 꼭대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일이다. 길을 새롭게 뚫는 자만이 올라갈 의사를 지닌 자이고 당도하게 될 것이다.’ 2012년 12월5일, 눈이 펑펑 쏟아지던 밤에 황석영 작가(69)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띄운 글이다. 이 글은 <장길산>에 썼던 글이라는 설명이 달렸다. 다음 날 저녁 황작가는 선후배 문인들이 마련한 ‘황석영 문학 50년 축하연’에 참석했다. 1962년 사상계를 통해 <입석부근>으로 등단한 지 50년이 된 그를 후배 문인들이 축하한 것이다.

ⓒ 시사저널 전영기

‘시대의 아픔을 보고, 시대의 금기를 깨고, 시대의 희망을 쓰다’

작가로서 50년 동안 활동했으니 ‘달인’이 되었을까. 여울물처럼 계속 흐르는 이야기의 원천은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최근 그가 또 하나의 장편소설을 펴내고 식지 않는 독자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날 황작가에게 축사를 한 인사들은 입을 모아 ‘파란만장한 삶’을 회고했다. 어린 시절 피난길을 걸었고, 젊어서는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의 막노동판을 떠돌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작가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민중’을 위해 길을 만들어 걸었고, 광주에 이사 갔다가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에 서 있기도 했다. 제주에서 문화패를 만들고 소극장을 창립하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지하 출판’했다. 북한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고, 유럽에서 떠돌다 다시 돌아와 감옥으로 들어갔다. 감옥에서 나온 뒤 다시 독자의 품으로 돌아와 매년 한 편꼴로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이런저런 길을 걸으며 그는 늘 씩씩하게 걸었고, 말까지 날쌔고 거침없었다. 축하연에 마련된 영상에서는 ‘시대의 아픔을 보고, 시대의 금기를 깨고, 시대의 희망을 쓴 거장’이라고 소개했다. 

문학평론가인 황종연 교수는 황작가의 인생을 황작가의 오래전 소설 <가객> 에 등장하는 ‘수추’라는 인물에 빗대었다. 황교수는 “수추는 훌륭한 가락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노래를 연마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좋아했지만 막상 그의 추악한 얼굴을 보자 외면해버린다. 그러자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죽음 같은 휴식의 시간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예술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수추는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저잣거리로 되돌아온다. 그런 그가 다시 들려주는 노래에 사람들은 감동과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그를 못마땅해한 거리의 지배자는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을 어겨 수추는 혀를 잘리고 효수당한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가 불렀던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된다. <가객>은 황석영 작가의 문학이 가진 성격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수추의 인생이 황작가의 인생을 대변한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말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황작가는 한자리에 멈춰 안주할 줄 모르는 부랑자였다. 삶은 떠돌이였지만 언어 미학에서는 진지한 창조자였다. 그래서 그는 어떤 작가도 겪을 수 없는 체험을 바탕으로 아름답고 역동적인 언어로 뛰어난 소설 세계를 만들었다. 이런 황석영 작가의 성취를 누가 챙겨 이어갈 것인지 아쉬움이 든다”라고 축사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난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축하 인사를 한 배우 손숙씨는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분이라 백 살 정도 먹은 줄 알았는데, 이제 겨우 고희를 앞두고 있다. 쉽게 갈 인생을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한다. 개척 정신이나 소년 같은 호기심을 버리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황작가가 연극배우가 되었다면 대단한 배우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라며 회고했다.

황작가는 <객지>를 보고 세상 물정을 알았다는 독자와 같이 늙어갔다. <삼포 가는 길>에 독자들과 동행하며 민중에 대해,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객>을 초대해 노래를 들으면서 저 아닌 사람과 공감하는 법을 깨우쳤다.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는 독자도 있었다. 손자뻘 되는 학생들도 공감했다. 오열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는 독자도 있었다. 공감의 능력이야말로 인권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말이 있다. 문학이 넓은 범위에 걸쳐 공감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을, 황작가가 실례로 보여준 것이다.

축하연 이모저모.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50주년 기념 소설 세트를 전달받는 황석영 작가, 축가를 부른 최수정 명창, 가수 전인권씨, 해금 연주가 강은일씨. ⓒ 시사저널 전영기
“당대 현실과 더 밀착하기 위해 다시 중·단편 쓰려고 한다”

황작가는 축하연 답사에서 “늙은이가 주의할 점을 들은 이야기가 있다. 첫째, 넘어지지 마라. 한국 노인 사망의 60%가 낙상 때문이란다. 두 번째, 감기 걸리지 마라. 셋째, 약속을 지키려 애쓰지 마라. 그런데 오늘 날씨나 여러 가지 조건을 보면 이 세 가지를 다 생각나게 만든다. 내가 무슨 행사를 한다고 하면 비바람이 치거나 큰 눈이 내렸거나 그렇다.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 그런 것 같다. 팔자소관인지, 여행을 떠나려 해도 날씨가 고약해진다”라고 운을 뗐다. 달인이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은 듯 그는 “방송에서 어떤 일을 10년 넘게 해서 달인이 된 사람을 봤는데, 동작도 아름다워지고 그 일에 대해 철학도 생겨 참 보기 좋더라. 나도 이 일을 50년 했으니까 달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인터넷 연재를 하면서 원고지 10장 정도 쓰는 데 밤을 새워가며 12시간 걸려서야 겨우 완성시키는 날이 한 달에 스무 날이었다”라며 글쓰기의 고충을 털어 놓았다.

그는 스스로 ‘만년의 문학을 시작한다’고 자기 규정을 했다. 앞으로 몇 년간 중·단편을 쓰겠다고 했다. 그는 중·단편을 쓰려는 이유로 “당대의 현실과 밀착해 작품을 다룰 것”이라고 말하면서, “역사가 어떻게 기록할지는 관심없다. 시대와 박 터지게 싸우다가 소멸하겠다. 작품만 독자 옆에 남기를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고약한 날씨가 그의 운명인 것처럼 아직도 그는 ‘고약한 환경’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황작가는 “작가의 역할이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작가는 일차적으로 사상가보다는 시정잡배이다”라고 말해온 사람이다. 동시대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작가라는 말이다. ‘작가가 하는 일’에 대해 그는 “작가는 사회가 금기시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어기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장치들을 부딪쳐 뚫고 일상화하면서 그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 책임이 있다”라고 말했다.

황작가는 답사에서 1970~80년대를 일컬어 ‘못 견디게 무섭고 고통스러웠지만 재미도 있었던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우리가 함께 겪은 지난 시대의 모욕·수치·배신·절망에도 새로운 벗들에게 우리가 처음 출발할 무렵에 가졌던 꿈들을 현실로 바꿔서 넘겨줘야 할 때에 이른 것 같다”라고 말했다. 황작가는 그 시절 동료 문인으로 밤늦도록 술 마시며 함께 놀았던 김지하 시인을 비판하는 듯한 말을 답사에 올리기도 했다. 황작가는 김시인이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백낙청 교수를 비판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것이 못마땅한 듯 “반평생 함께한 시인의 일그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섬뜩하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날 축사를 한 백낙청 교수는 “문학판에 황작가가 없었다면 얼마나 적막했겠나. 또, 정치판도 황작가가 없었다면 좀 조용하지 않았겠나”라고 말했는데, 황작가는 이에 답하듯 야권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답사 끄트머리에 첨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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