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의 사건 추적] 정치 조폭 ‘용팔이’의 각목 난동
  • 표창원│범죄심리학자 ()
  • 승인 2013.02.1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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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 전두환 정권 사주받은 장세동 개입

전두환 군사 정권의 폭정에 항거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거리를 메우던 1987년 4월, 국민 대다수는 체육관에서 거수기들이 모여 단독 후보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후진적 독재를 끝내고,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국민 직선제’를 도입하자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야당이었던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와 이철승 의원 등 야당 지도자들은 전두환 대통령과 여당의 ‘내각제 개헌’ 주장을 지지한다고 발표해 큰 혼란이 빚어졌다. 소수의 야당 지도자가 독재 정권과 야합해 그들의 장기 집권을 돕는 대가로 내각 입각과 정치 지분 등 ‘야당 권력’을 약속받았다는 비판이 야권과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1987년 4월24일 ‘괴청년’으로 불린 폭력배 조직원 100여 명이 통일민주당 서울 관악지구당을 습격했다. ⓒ 뉴스뱅크이미지
‘정치 영향 받은’ 경찰과 검찰의 수사

곧이어 김영삼과 김대중 등 ‘차세대 야당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70여 명의 신한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며 ‘통일민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4월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중앙당과 전국 지부에서 창당대회를 연이어 개최했는데, 대회장마다 각목과 쇠파이프 등 흉기로 무장한 폭력배들이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참석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리며 창당을 방해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출동은 난동이 끝나서야 이루어졌고, 현장에는 부상자와 파괴된 기물, 충격과 공포에 빠진 목격자들만 남게 되었다. 거듭된 수사 요청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당 내부 문제이므로 당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답을 줄 뿐이었다. 결국 ‘통일민주당’은 이런 조직적 폭력 난동에도 불구하고, 5월1일에 창당하게 된다.

통일민주당측은 격분했다. 문명국가의 정당 설립 과정에 대해 이처럼 대담하고 조직적으로 폭력 난동을 벌이는 것은 권력의 개입 없이는 발생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 공작’으로 규정했고, 즉각적이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정부와 여당에서는 구 야당과 신 야당끼리의 권력 다툼에 왜 정부를 끌어들이느냐고 반박했다. 야당끼리의 다툼이었다면 경찰의 수사를 통해 곧 진실이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무수한 목격자와 증거 앞에서도 경찰의 수사는 아무 성과 없이 제자리걸음만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태도와 은폐 의혹에 이어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조작’ 성명 발표가 이어지면서 전국적인 ‘독재 타도’ 시위가 벌어지게 되었다.

곧이어 6월10일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로 연일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가하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6월29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 ‘언론의 자유 보장’ ‘김대중 사면 복권’ ‘대학 자율화’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지방자치제’ 등을 수용하는 ‘시국 수습 특별선언’을 하게 된다.

이후 바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김대중·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의 단일화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결국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었다.

전두환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리게 되면서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폭력 사건’에 대한 수사가 재개되었고, 서울올림픽이 한창 진행되어 국민의 눈과 귀가 모두 ‘세계인의 축제’에 쏠려 있던 1988년 9월, 경찰은 폭력 난동을 주도하고 사주한 주범으로 일명 ‘용팔이’라고 불렸던 조직폭력배 ‘전주파’의 두목인 김용남과 그에게 폭력을 사주한 신한민주당 이선준 청년부장을 검거했다.

실제로 김용남을 만나 직접 폭력을 사주한 이용구 신한민주당 총무국 부국장은 이미 미국으로 도피한 뒤였다. 그리고 검찰에서는 이 사건이 신한민주당의 이택희·이택돈 의원이 주도하고 기획한 사건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1987년 4월4일 신민당 당기위가 무산된 뒤 용팔이로 알려진 김용남씨 등이 거칠게 위협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 뉴스뱅크이미지
충격적인 반전, 장세동 안기부장 등장

이는 사건 초기 정부·여당이 주장하던 내용이었다. 산발적인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신한민주당 의원들과 청년부장이 범행을 시인하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법원은 ‘용팔이’ 김용남에게 2년6월형, 이택돈 의원에게 1년6월형을 선고하는 등 솜방망이 처벌로 관련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며 진실 은폐를 도왔다.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면서 이른바 ‘3당 야합’의 결과로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자,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폭력 사건’의 피해 당사자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지시하게 된다.

재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최정예 국가 정보기관인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장세동 부장이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이택희·이택돈 의원에게 당시로서는 거액인 5억원을 주고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폭력 청부를 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당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남기고 구속되었으며, 국기 문란의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임에도 자신이 충성을 바쳐 모시던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는 의리를 보였다는 것 때문에 일부 청소년층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세동은 이후 법정에서는 범행을 부인하며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장세동이 받은 형량 역시 징역 1년6월이었다. 이후 장세동은 1997년 4월, 전두환·노태우의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항쟁 유혈 진압에 대한 내란에 가담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3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을 지지하며 호남 비하의 지역감정을 퍼뜨리고 있는 일부 세력의 오해와 달리, 전두환의 최측근이자 최고의 충복으로 끝까지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 바쳤던 장세동은 전라남도 고흥 출신의 ‘골수 호남’ 사람이다.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엄청난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 김용남. 일명 ‘용팔이’로 불리던 전국 최대 폭력 조직 ‘전주파’의 보스 김용남은 1950년 2월2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왔지만 동급생과 싸움을 벌이다 퇴학당했고,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 남산공전(현 리라컴퓨터고)에 역도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학교보다는 뒷골목에서 싸우거나 돈을 빼앗는 ‘깡패 짓’을 많이 했지만, 유도 훈련은 열심히 해서 고3 때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울을 본거지로 하는 ‘전주파’라는 폭력 조직 결성 과정에 참여해 행동대장을 맡았고, 스물여섯 살이 되던 1975년부터 전주파 두목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세력을 확장해 전주파를 전국 최대 폭력 조직으로 키웠고, 당시 주먹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얼굴만 비쳐도 몇백만 원씩 주던 때”라고 주장했다.

1993년 4월26일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과 관련해 구속기소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첫 공판을 받기 위해 서울지법 남부지원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용팔이’가 정치 조폭 된 이유

그러다 1980년, 전두환 군사 정권의 사회 정화 운동에 따른 폭력 조직 소탕 대상이 되어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삼청교육을 받으며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고 “어머니 생각도 났고, 하나님도 처음 불러”보고, “여기서만 꺼내주시면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라고 진심으로 빌기도 했던 김용남은 출소 후 다시 전주파 두목 자리로 돌아가 폭력 조직을 운영했다. 삼청교육대 같은 일시적 몽둥이가 결코 오랫동안 몸에 밴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폭력배들을 거느리고 위력을 과시하며 유흥가나 건설 현장 등의 약점을 비집고 들어가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거나, 채권을 대신 받아주고 수수료를 챙기며 살아가던 깡패 김용남은 정치에는 관심도 없었고, 정치를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1987년 4월 어느 날, 전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조폭 두목이었던 그를 신한민주당(신민당) 당직자가 찾아가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나중에 수사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도피해버린 이용구 총무부국장이었다. 그는 늘 법망을 피해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김용남에게 밝은 세상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솔깃한 제의를 한다.

대한민국 깡패들이라면 누구나 존경하고 동경하는 김두한처럼 영웅도 되고 국회의원도 될 수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깡패이고 조폭이다.

김용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때 신민당 총무국장인가 하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100명의 국회의원보다 동지 한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가슴이 끓어오르더라고요. 김두한씨가 국회의원 하셨으니까 나도 따라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주먹 쓰고 싸움하고 폭력을 이용해 약한 사람 괴롭히고 돈을 갈취하는 데는 이력이 났지만, 복잡한 정치적 술수와 계산에는 어두웠던 김용남은 영웅 심리와 정치인이 자신을 인정해주었다는 우쭐함에 큰 사고를 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사고를 치고 나니 영웅이 아닌 파렴치 정치 깡패가 되어 있었고 1년 6개월 동안 잡힐지 모른다, 잡히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도망 다녀야 했다.

다시 복역한 후 손 씻고 새 인물로 변신

텔레비전 뉴스마다 그의 얼굴이 나왔고, 신문과 전단지에 실린 그의 사진이 거리마다 깔려 있었다. 그는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다 나를 알아보고 신고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서 밝은 낮에는 밖에도 잘 나가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김용남은 1988년에 검거된 후 복역하고 1991년에 출소한 뒤에도 개과천선을 하지 못하고 다시 폭력 조직을 이끌었다. ‘먹고살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곧 인천의 한 호텔 이권을 둘러싼 폭력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살이를 한 뒤에는 완전히 손을 씻고 종교에 귀의해 선교와 청소년 폭력 예방 등 사회봉사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힘이 없어지자’ 그를 따르던 부하들마저도 그를 배신하고 외면하더라는 경험담을 전하며 ‘조직폭력, 깡패 세계에 의리란 없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전달하고 있다. 특히, 조직폭력을 미화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강한 반감을 드러내며, “전혀 사실과 달리 조직폭력을 포장하고 합리화한다”는 비판의 소리를 내고 있다.

1999년 사업 실패 이후 오랜 기간 신용불량자로 살아온 김용남은 끝까지 자신을 지켜준 부인과 딸 등 가족과 함께 소박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 옛 명성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자’며 접근하는 인간들은 아직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5·16 군사 정부는 사회악 일소 차원에서 정치 깡패들에게 이름표를 목에 걸고 거리를 행진하게 했다. ⓒ 뉴스뱅크이미지
이탈리아와 미국의 마피아, 일본의 야쿠자, 홍콩의 삼합회 등 뿌리 깊은 조지폭력(조폭)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늘 ‘정치와 조폭’ 간의 유착 문제가 대두되곤 했다. 특히, 정치적 불안을 오랫동안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때는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시절이었다.

1951년 부산에서 열린 국회에 이승만이 낸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당시 부산 거리에는 ‘애국자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는 반민족 의원을 처단하라’라는 전단이 나붙었다. 이후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같은 단체들이 국회를 둘러싸고 의원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당시 대표적인 정치 깡패였던 유지광은, 1957년 5월25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무소속 정치인들과 함께 연 시국강연회에서 깡패들을 동원해 난동을 부린 사건으로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 3·15 부정 선거에 깊이 개입한 혐의로 임화수, 이정재, 신도환과 함께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정재와 임화수는 혁명특별재판부가 사형 선고를 내린 지 10여 일 만에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반공청년단장 신도환은 다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0년형을 받았다. 판결문에는, 이들이 주도하고 개입했던 ‘반공청년단은 1960년 3월15일 선거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킬 것을 결의하고 조직원들에게 선전 요령문, 선거 자금을 비밀리에 배부해 부정 선거 실시에 주도적 행위를 하고 청년들을 사주 동원했다’라고 나와 있다.

유지광 등은 특히 1960년 4월18일 목봉·쇠갈고리 등 흉기를 소지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해 상해를 가하는 등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시위를 막기 위해 폭력을 자행했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철퇴를 맞은 정치 깡패들은 전두환 군사 정권하에서 다시 부활해 1987년 ‘용팔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직폭력 등 범죄 집단과의 ‘악마의 거래’를 통해 목적을 달성한 정치 집단이나 권력은, 목적이 달성된 이후 어두운 과거와 결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토끼를 잡은 뒤에는 필요 없어진 사냥개를 버리는’ 토사구팽이 반복되는 것이다.

최근 우리 정치에는 과거형의 주먹을 쓰는 조폭이 아닌, 사이버 공간에서 집단으로 몰려가 특정인에게 사이버 테러를 가하는 ‘사이버 정치 조폭’의 존재에 대한 의혹이 강하게 일고 있다.

유력 정치인이나 정당, 정부 등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이나 언론인, 작가, 예술인, 방송인 등 여론 주도층을 무력화하기 위해 돈을 주고 ‘사이버 알바(아르바이트)’를 고용해 테러를 감행한다는 의혹과, 성향이 유사한 네티즌들을 선동하고 이들에게 일정한 (허위)사실이나 논리를 제공해 여론을 조작하게 만드는 ‘정보 사회형 정치 조폭’이 등장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는 과거형 정치 조폭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정보기술의 발달에 따라 그 형태와 방법을 바꾼 ‘사이버 정치 조폭’의 경우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미 밝혀진 윤정혼 전 새누리당 SNS단장의 사례와 국정원 직원의 유사한 범행 혐의 그리고 ‘일간베스트’ 등 특정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 사이버 정치 테러 의혹에 대해서는 그 배후 여부를 밝히는 등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용팔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정치와 (사이버) 조폭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면, ‘아무리 감추려 해도 시간과 역사가 진실을 밝혀낼 것’이고, 결국 정치에 이용당한 (사이버) 조폭은 버려지고 패가망신하게 된다는 엄정한 사실이다.


 
 

Series) 표창원 교수의 사건 추적


1. 악마가 된 외톨이의 빗나간 분노의 돌진
- 1991년 10월 여의도 광장 차량 폭주 사건

2. 미군에 희생된 꽃다운 청춘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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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자친구의 환심 사려 끔찍한 범행
- 1990년 유치원생 곽재은양 유괴·살해 사건

4. 만삭의 여인이 벌인 잔혹한 범죄
- 1997년 8월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 사건

5. 자녀 학대가 부른 끔찍한 패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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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희 되도록 못 버린 ‘그놈의 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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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악마로 변한 살인자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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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살인자' 꿈꾼 소년의 잔혹한 범행
-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다 잠자던 동생 도끼로 내리쳐

9.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
- 아홉 살 때 성폭행당한 여성이 20년 후 가해자 살해 ‘아동 성폭력’ 심각성 알린 김부남 사건

10. '짐승' 의붓아버지 죽인 비운의 여인
- '성폭력 특별법' 탄생시킨 김보은·김진관 사건

11. "유전 무죄, 무전 유죄" 탈주범의 절규
- 1988년 탈주범 지강헌 일당의 인질범 사건
 

12. 법대 여대생 꿈 짓밟은 판사 장모의 편집증
- 미행과 감시, 위협하다 킬러 고용해 살해

13. 기막힌 살인 누명 쓴 '억울한 3인조'
- 경찰, 가상 사건 꾸며내 범인으로 몰아, 2001년 속초 콘도 살인 암매장 사건

14. 무고한 인명 앗아간 '지옥 지하철'
- 1백92명 사망, 1백48명 부상한 최악의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15. 탐욕스런 선수들의 썩은 스포츠 정신
- 조폭과 승부 브로커들, 금전 동원해 선수 유혹한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

16. 무참하게 행복 짓밟힌 한 가족
- "웃음소리에 화가 나 살인했다"...2010년 서울 신정동 묻지마 옥탑방 살인 사건

17. 조폭들의 객기가 부른 '희대의 참극'
- 1986년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 - 반대파 조직원 4명 살해, 주범 2명 사형

18. '시신 없는 살인' 노린 파렴치 교수의 범죄
- 2011년 부산 대학교수 부인 살해 사건 / 내연녀와 치밀하게 공모한 후 바다에 시신 유기

19. 정치 조폭 ‘용팔이’의 각목 난동
-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 전두환 정권 사주받은 장세동 개입

20. 금융 시장 짓밟은 ‘가장 못된 손’
- 1982년 장영자·이철희 부부 어음 사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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