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마, 이 사랑! ‘딸바보’ 신드롬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2.2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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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방송가 인기 소재로 다시 떠올라

때는 2010년이었다. ‘3단 고음’ ‘미친 존재감’ ‘하의실종’ ‘베이글녀’ ‘차도남·차도녀’ 등의 신조어가 화제가 되었던 해였다. 당시 각 매체로부터 ‘딸바보 열풍’에 대해 인터뷰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했는데 알고 보니 영화 <아저씨>가 개봉된 후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영화에서 원빈이 어린 여자아이를 온몸으로 지켜주는 역할을 맡았는데 관객이 그런 원빈에게 열광하면서, 어린 여자아이를 사랑하거나 지켜주는 성인 남자에게 ‘딸바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처음에는 남녀 로맨스 판타지의 성격이 있었다. <모래시계>에서 이정재가 고현정을 지켜주는 흑기사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이래, 남자는 여자를 보호했고 여자는 남자에게 기댔다. 연약한 신데렐라를 지켜주는 백마 탄 왕자님에게 여자들은 환호를 보냈다.

어린 여자아이를 온 힘을 다해 지켜주는 멋진 남자의 모습에서 여자들은, 궁극적으로 백마 탄 왕자님의 환영을 보았다. 여자에게 추호의 흑심도 없이 그저 헌신적으로 지켜주는 꽃미남. 여자들은 육체적 흑심을 품은 남자를 혐오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남자의 태도는, 남자가 자신을 성적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반대로 순수하고 헌신적인 딸바보는 여자들에게 이상적 남성상의 표현이었다. 판타지인 것이다.

원빈의 뒤를 이어 이승기·박유천 같은 꽃미남 스타들이 딸바보에 등극한 것만 보아도 당시 딸바보의 로맨스 판타지적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작품 활동 중간 중간에 아역 어린이를 품에 안고 돌봐주는 모습이 찍혔는데, 여자들은 그 사진을 보며 마치 자신이 안겨 있는 듯한 착시에 빠져들었다.

ⓒ NEW 제공
‘꽃미남’에서 ‘아버지’로 이동

그랬던 딸바보 캐릭터는 곧 그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한다. 딸바보를 단순한 로맨스 판타지 캐릭터에 머무르게 할 만큼 여유로운 시대가 아니었다. 각박한 시대에 대중은 간절히 보호자를 찾았다. 지난 대선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여야 주요 후보들이 모두 복지를 내세운 선거였다. 서민의 따뜻한 보호자를 자처한 것이다. 그럴 정도로 보호를 원하는 시대는 딸바보를 로맨스의 영역에 내버려두지 않았다.

2011년작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정보석은 지적장애를 가진 아버지로 등장했다. 의붓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조연이었는데도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이 대중이 원하는 것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즈음부터 딸바보는 아버지를 빙자한 로맨스 대상이 아닌, 부성애를 보여주는 진짜 아버지가 되었다.

2012년 말에 의붓딸을 위해 헌신하는 딸바보 ‘장씨’의 이야기가 개봉되었다. 바로 영화 <레미제라블>이다. 이 영화에서 장발장은 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보호자였다. 작품은 감독이 깜짝 놀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가 낯선 형식인 데다가 길기까지 해서 대중적으로 흥행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한국인은 딸바보 휴머니즘에 감동했다.

그리고 2013년, <7번방의 선물>이 나왔다. 1천만 관객 동원 영화들인 <도둑들>과 <광해>가 개봉 4주차에 각각 62만여 명과 66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는데, <7번방의 선물>은 4주차에도 90만여 명을 동원했다. 도저히 믿기 힘든 폭발적 흥행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영화의 초반 흥행이었다. 별로 화제작도 아니었는데, 단지 콘셉트만 보고서 사람들이 개봉하자마자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입소문으로 검증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묻지 마’로 몰려간 것이다. 사람들은 스크린을 통해서나마 딸바보를 보며 위안받았다.

ⓒ 팝파트너스 제공
‘부성애’ ‘가족애’ 말하려 한 것

로맨스 판타지 남성상에서 진짜 아버지로 의미가 확장된 이상, 아이의 성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이 사이에 존재하는 부성애, 혹은 가족애이다. 그것만 있으면 아이가 남자건 여자건, 어쨌든 큰 틀에서 딸바보 캐릭터의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요즘 가장 ‘핫’한 <일밤>의 <아빠! 어디가?>도 딸바보 예능이다. 비록 다섯 가족 중 네 가족이 딸이 아닌 아들이지만 말이다. 아버지와 아이들을 내세운 <아빠! 어디가?>는 <일밤>의 ‘흑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예능과는 종류가 다른 <나는 가수다> 말고는, 오랫동안 참담한 실패를 반복해온 <일밤>에 마침내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아빠! 어디가?>는 인터넷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등극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일밤>까지 살릴 정도로, 아버지와 아이가 엮어가는 가족애에 대중이 뜨겁게 반응하는 분위기이다.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 MBC 제공
사람들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딸바보는 절대적 사랑인 가족애의 현신이다. 그리하여 불안의 시대에 나를 지켜주는 안전의 징표가 된다. 세상이 이익 경쟁으로 각박해질수록 무조건적인 사랑·희생·헌신에 대한 열망은 커질 수밖에 없는데, 가족애야말로 그런 절대적 사랑의 원형이다.

세상의 이해 다툼에 지쳐갈수록 사람들은 순수한 것을 찾는다. 딸바보의 헌신적 사랑이야말로 그런 순수의 정화이다. 단순한 딸바보로도 모자라, 보통 사람의 차원을 뛰어넘는 극단적 순수인 지적장애 아버지까지 나왔다. <내 마음이 들리니>와 <7번방의 선물>이 그렇다. 지적 수준이 낮다는 것은 세속적 이해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순수를 보여주는 또 다른 존재가 지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다. 그래서 딸바보와 아이가 엮어가는 이야기에 대중이 열광한다. 이것이 <아빠! 어디가?>를 띄워 올린 배경이다. 똑같이 아빠와 아이들이 나오지만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은 그리 크게 화제가 되지는 못한다. 대중이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에서 나오는 토크들을 순수하지 않은, 예능적 설정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능숙한 방송 감각을 자랑하는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바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아빠! 어디가?>는 마치 진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이들은 한없이 순박하고, 아빠들은 어설프다. 세속적 영악함과는 거리가 먼 ‘바보’들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들이 무조건적인 정을 나누는 이야기. 화면을 보기만 해도 곤두섰던 신경이 사르르 녹는다. 전쟁터에서 조건(스펙)에 치어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휴머니즘은 너무나 달콤한 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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