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색깔을 잃다
  • 허미선 객원기자 ()
  • 승인 2013.03.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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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박찬욱·봉준호 등 데뷔… 우려도 많아

2012년은 할리우드와 충무로가 동시에 르네상스를 맞은 해였다. 극장 전체 매출은 할리우드 108억 달러, 충무로 1조4551억원으로 각각 6.5%, 17.7% 성장했다. 관객 수 역시 크게 늘어나 할리우드 13억6400만명(6.4% 상승), 충무로 1억9489만명(21.9%)이었다.

2013년은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조우가 본격화되는 원년이 될 전망이다. 김지운·박찬욱·봉준호 등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할리우드 데뷔작을 선보이고 있다. 2월21일 라이언스게이트에서 제작·배급한 김지운 감독의 <라스트 스탠드> 개봉을 시작으로 20세기폭스의 자회사인 서치라이트 픽처스와 손잡은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가 개봉했고,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개봉을 준비 중이다. 20세기폭스 인터내셔널이 100% 투자·제작한 한국 영화 <런닝맨>도 4월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배우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초보 단계의 할리우드 진출에서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가 할리우드 영화 현장에 투입되고 할리우드 제작사에서 한국 영화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진화되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 유명 제작·배급사의 리드필름(본 영화 직전 제작·배급하는 회사를 알리는 영상)을 단 영화에서 한국인 감독의 이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국 관객이 사랑하고 할리우드에서 감탄했던, 그 감독만의 색깔 혹은 스타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이는 한국과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아주 미묘한 차이가 데미지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었다. 할리우드는 현장에서 감독이 갖고 있는 힘을, 스튜디오·제작자·주연 배우 등이 똑같이 나눠가지고 있다. 뭔가 하나를 결정하려면 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더 생긴 것”이라고 토로했다.

게다가 현장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스태프를 설득해야 할 뿐 아니라 제작사에도 전달하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 ,
시스템 차이가 스타일 차이를 만들다

한국은 감독이 가지고 있는 영화적 비전과 미학적 견해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함께 고심하고 지원하는 가족 같은 스태프들과 일하면서 자신만의 색을 입히고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시스템이다. 이런 현장에 익숙한 한국 감독들에게, 현장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그 자리에서 반영하는 것은 물론 카메라 앵글이나 렌즈를 바꾸는 일조차 어려운 할리우드 시스템은 곤혹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철저하게 계산된 시스템 속에서 운신의 폭이 제한된 데다 촬영 회차는 한국의 절반가량이다. 박찬욱 감독은 “할리우드의 현장은 너무 바쁘다. 한국의 절반밖에 안 되는 40회차에 전체를 촬영해야 했다. 적응하는 것에 애먹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초 단위로 진땀을 뺐다”고 밝혔다. 김지운 감독 역시 “<라스트 스탠드>는 한국에서 찍으면 100회차 정도의 내용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인데, 57회에 끝내야 하는 압박감이 컸다”고 토로했다.

<라스트 스탠드>나 <스토커>가 감독 개인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면,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신하균의 <런닝맨>은 한·미 자본과 시스템의 크로스오버다. 시나리오 작가, 제작 프로듀서, 음악감독, 미술 및 의상 등 한국과 미국 스태프와 배우들이 동원된 <설국열차>의 제작비(4000만 달러)는 100% CJ E&M에서 조달했다.

CJ E&M 영화사업부문 홍보팀의 이창현 부장은 “<설국열차>는 한국 자본으로 만든 메이드 인 코리아 글로벌 프로젝트다. 대부분의 제작 과정은 할리우드 시스템을 따랐지만 간섭은 덜한 편이다. 할리우드 시스템에서는 감독의 재량이 아닌 후반 편집 작업에도 봉준호 감독이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해외 배급 역시 한국과 미국 기업이 동시 진행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와인스타인 컴퍼니가 북미를 비롯한 영어권 9개국 배급을 책임지고, CJ E&M에서 유럽 및 아시아 판로 개척에 나선다. 수익에 따라 배분율이 달라지는 슬라이드 계약을 한 <설국열차>는 개봉도 하기 전에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회수했다.

한국 자본과 할리우드 및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이 만난 <설국열차>와 달리 <런닝맨>은 한국의 제작 시스템을 따르고 한국 스태프들이 참여하는 한국 영화에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배급사가 투자한 작품이다.

<런닝맨>의 공동 제작사인 크리픽처스의 정종훈 대표는 “<런닝맨>은 한국에서 기획·제작하고 후반 작업까지 한국에서 전담한 한국 영화에 전 세계 배급망을 가진 폭스가 투자한 것이다. 진행 일정을 공유하고 촬영분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핵심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20여 일 중 40일 넘게 비가 와서 촬영이 가능한 날엔 강행군을 해야 했다. A매치 경기를 준비하듯 사명감을 가지고 완성도를 높이면서 예산을 맞추기 위해 죽을 정도로 고생했다. 한국 제작 시스템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한국 영화와 글로벌 배급망을 가진 할리우드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는 자금 투자로 인한 투자 기회 확대뿐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배급망을 통해 소개된 한국 영화가 어느 나라에서 재발견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배우에 국한되던 할리우드 진출이 감독은 물론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종훈 대표는 “<런닝맨>은 폭스를 만나면서 해외 배급 가능성이 커졌고 폭스의 외국어 영화 유통 레이블을 통해 북미 시장에 DVD로도 출시된다. 해외 배급뿐 아니라 부가 판권 시장까지 확대됐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폭스와 일하는 동안 수많은 제안을 주고받았다. 폭스가 개발한 시나리오나 한국의 훌륭한 시나리오를 공유하고 폭스 영화 중 리메이크하고 싶은 작품에 대한 접근도 용이해졌다. 이런 공유와 교류는 할리우드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기회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왼쪽부터) 김지운 감독, 봉준호 감독 , 박찬욱 감독 ⓒ 연합뉴스
문화 잠식 등 부작용 우려도

한국의 영화 산업은 멀티플렉스의 도입과 대기업 자본의 유입을 겪으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선택권을 박탈당했고 독과점이 형성됐으며, 작은 영화들은 갈 곳을 잃었다. 이처럼 발전에는 부작용이 따르듯 한국 감독들의 할리우드 진출과 할리우드 자본 유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자신의 색을 잃어버린 감독들에 대한 우려와 한국 영화 시장 보호 차원에서 유지 중인 스크린쿼터를 피하기 위한 글로벌 기업의 꼼수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피해갈 수 없다.

몇몇 기업이 이끌어가는 독과점 시장에서 새로운 투자처의 출현은 힘을 분산시키고 건전한 경쟁으로 이끌 전환점이다. 하지만 해외 투자로 발생한 수익이 한국 영화 산업에 재투자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지 못한다면 기회는 금세 위기로 돌변할 것이다. 게다가 자본의 논리로 만들어진 시스템 속에서 획일화된 콘텐츠를 양산해온 할리우드가 현재 겪고 있는 딜레마 역시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멀티플렉스와 대기업 자본의 유입으로 대작만 살아남는 배급 시스템 속에서 설 자리를 잃은 작은 영화들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도 자명해 보인다. 철저하게 자금에 의해 움직이는 할리우드 시스템에 작은 영화에 대한 배려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창현 CJ E&M 홍보팀 부장은 “국내외 기업에 차등 적용되는 매출 제한에 의한 불공정 경쟁이나 작은 영화와 관련한 문제는 한 기업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 차원의 정책 보완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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