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섹스·뇌물 그리고 ‘몰카’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3.04.03 10: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들이기용에서 폭로·협박용으로 진화

1997년 5월 당대 최고의 실세 김현철이 구속됐다.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속은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청와대와 내각은 물론, 검찰과 안기부 수뇌부를 꽉 잡고 있는 ‘소통령’ 앞에서 너나없이 설설 기었다. 김영삼(YS) 대통령 본인도 자신을 빼닮은 차남의 전횡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의 비행을 대통령에게 직보했던 박관용 비서실장마저 청와대를 떠난 이후 현철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심재륜 대검 중수부장이 현철을 잡아넣었다. 죄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알선 수재 및 조세 포탈).

“대통령이 울고 있어요(그러니 봐달라)”라는 민정수석의 애소를 뿌리치며 현철을 구속한 심 부장의 쾌거는 그의 기개와 탁월한 수사력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김현철 구속’은 동시에 ‘구속을 하지 않으려던’ 시도의 아이러니한 부산물이기도 하다.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씨와 그가 업무용으로 촬영한 비디오테이프가 아니었다면 김현철 구속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YS의 주치의이기도 했던 의사 박경식이, 김현철이 YTN 사장 임명을 운위하는 녹화 테이프를 까발리지 않았다면 ‘심재륜 중수부장’ 자체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 성접대가 이루어졌다는 건설업자 윤씨의 원주 별장 내부. ⓒ 연합뉴스
대통령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사진 한 컷

한보 금융 부정을 수사하던 검찰은 애초 김현철을 무혐의 처리했다. 26시간에 걸쳐 조사했다지만 실은 시늉만 낸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사과하는 것으로 한보에 대한 의혹투성이 5조7000억원 특혜 대출을 덮으려고 했다. 그런데 박경식이라는 의사가 김현철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고객으로 병원에 왔던 김현철의 통화 장면 녹화 테이프를 공개한 것이다. 달리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됐다. 현철의 국정 농단이 여실히 증명됐고, 민심은 들끓었다. 민란 우려까지 제기되자 검찰은 재수사를 공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인천지검장으로 나간 지 2개월밖에 안 된 심 검사장을 불러들여 사건을 ‘얼버무리라’고 맡긴 것이다. 그런데 심재륜 수사팀은 여론이나 무마하고 치웠으면 하는 윗선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결과적으로는 녹화 테이프 하나가 역사를 바꾼 셈이다.

전말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동영상의 위력은 이처럼 대단했다. 언뜻 소품에 불과한 듯하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메가톤급 폭발력을 갖는다.

‘김현철 게이트’ 5년 뒤 역시 현직 대통령의 아들(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홍걸)이 구속되는 ‘최규선 게이트’의 추동력도 녹취록과 테이프에서 나왔다.

이전에는 도청과 스틸 카메라를 동원해 자료를 수집했고, 주로 정보기관이 애용했다. 당국은 야당 지도자나 신·구교, 불교계를 가릴 것 없이 내로라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얽어맬 때 전가보도로 써먹었다. 현장에서 덜미를 잡힌 이들의 비화는 숱하다. 반체제 그룹의 대표적 인물인 K씨는 현장을 덮친 기관원들을 피해 2층 호텔 방에서 뛰어내리다 발목을 부러뜨리기도 했고, 교계의 거물로 꼽히는 J씨는 부인이 남편과의 통화 중에 내뱉은 내용(외도)에 덜미를 잡혀 곤욕을 치렀다.

1990년대 여권의 거물 K 의원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그를 찍소리도 못 하게 제압한 것은 그의 승용차에 부착시킨 녹음 테이프였다. 여인과의 밀회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정보기관 출신의 3선 국회의원인 L씨는 ‘그가 압박했던 야당 지도자’가 대통령이 됐을 때도 상당한 대접을 받아 모두들 궁금해했는데, 그 이유는 ‘대통령의 야당 시절 사진과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의 ‘자료’란 그 지도자가 ‘상대 여성’에게 써준 각서다.

“목에 힘주고 큰소리치다가도 ‘사진’ 한 장 내보이면 금세 흐물거리게 마련입니다. 잘나가는 인사일수록 더합니다. 대개가 그렇고 그러니까요.” 국정원에서 30년 넘게 일하다 최근 퇴직한 간부 G씨의 술회다.

도·감청과 몰카가 정보기관의 전유물이 아님은 물론이다. 소형화·경량화·고성능화된 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곳곳에서 모든 이들이 타깃이 되었다. 아이들까지 소지한 휴대전화에 고성능 카메라 기능이 첨부된 지금은 전천후 전 방위 몰카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B 재임 중 벌어진 자신의 형 이상득 의원과 최측근인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감옥행도 따지고 보면 사진 한 컷 때문이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미스코리아 출신의 노골적인 ‘야동’이나, 오래전 일본 도쿄를 방문했던 모 언론사 대표 J씨가 야쿠자가 설치한 몰카에 ‘2명의 여성과 출연’했다가 홍역을 치른 일 등등 근자의 굵직한 건만 모아도 큼직한 도서관 서가를 채울 수 있을 터다.

 “바람피우더라도 사진에 안 나오게…”

J씨가 등장하는 테이프는 ‘사업용’으로 국내에 반입됐는데 ‘야동’ 제작 자체를 목적으로 한 이외의 것들은 거의가 ‘협박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차기 검찰총장으로까지 거명되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옷을 벗긴 ‘성접대 동영상’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촬영 주체나 대상들의 신분·위치 등에 미루어 의도는 빤할 듯싶다.

각종 수사기관이 고위직 혹은 유명 인사를 연행했다가 여의치 않으면 으레 들이미는 게 “돈 먹은 것, 계집질한 것 다 알고 있어”다.

“이권 부서 공직자들에게 ‘들통 났다. 튀어라’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10명 중 8명 이상은 일단 직장에 안 나타날 것”이라는 국정원 퇴직 간부 G씨의 우스개 말처럼 ‘권력, 여자(Sex), 돈’은 패키지로 움직이게 돼 있고 특히 고위직일수록 여기서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또, 한때의 달콤함은 드러나는 순간 치명적 독이 된다.

그러니 ‘생생한 화면’을 확보한 상대에게 공직자는 코 꿰인 순한 양 신세를 벗어날 길이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저지할 뻔했던 사건이 2010년에 터진 ‘베이커 스캔들’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의 정치 참모인 베라 베이커와 2004년 호텔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인데, 대중 연예지 내셔널 인콰이어러가 현직 대통령의 치부를 들추겠다고 감히 나선 것은 CCTV 필름을 확보했기에 가능했다(여기서의 ‘베이커 스캔들’은 로스앤젤레스 가톨릭 신부로서 20명이 넘는 소년 신도들을 성추행해 구속됐던 마이클 베이커 신부의 스캔들과 다르다. 로스앤젤레스 교구는 3월12일 성추행 피해자들에게 10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고 ‘베이커 스캔들’을 정리했다. 로스앤젤레스 교구는 2007년에도 500건이 넘는 성직자의 추행 제소를 6억60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들여 틀어막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속적 권력이건, 영적(靈的) 권력이건 권력이 있는 곳엔 ‘돈과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라지만 오늘의 모습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게다가 ‘화면’을 무기로 공직자를 겁박했다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사실 이 대목이 김학의 차관을 낙마시킨 ‘별장 성접대’ 사건의 본질이며 반드시 척결해야 할 부분이다.

요즘 ‘잘나가는 부인네’들이 모여 앉으면 “(남편이) 바람은 피우더라도 사진에나 안 찍혔으면 해”라며 낄낄댄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한국판 르윈스키’의 당사자인 전직 대통령을 면담해야겠다. 짓궂지만 이런 세태도 전하고, 상황이 불거졌을 당시 영부인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등을 들어볼 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