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들어갔다 혼쭐난 백화점 재벌 2세들
  • 김영화│한국일보 법조팀 팀장 ()
  • 승인 2013.04.03 10: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세계 정용진·정유경, 현대 정지선 법정 출두 롯데 신동빈도 4월에 예정

지난 3월2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에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45), 현대백화점 정지선 회장(41)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회에서의 증언·감정에 관한 법률 위반 사건의 첫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정용진 부회장 공판은 서울중앙지법 형사8단독 소병석 판사 심리로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는 변호인측이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모두 동의하고 공소 사실도 인정하자 곧바로 결심(結審) 절차에 들어갔다. 검찰은 최종 논고를 통해 “피고인은 국회 정무위원회에 불출석할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며 벌금 700만원을 구형했다. 구형량은 애초 검찰이 약식명령을 청구했을 때의 액수와 같다.

이에 대해 정 부회장측 변호인은 “당시 회사 업무로 해외 출장이 불가피했던 점, 사유서를 내고 다른 임원이 대신 증언하도록 조치한 점, 유사 사건과의 균형 등을 양형에 고려해달라”고 요청했다. 정 부회장은 최후 변론을 통해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엄격한 잣대로 기업을 경영하겠다. 선처해달라”고 몸을 낮췄다.

정지선 회장에 대한 공판은 서울중앙지법 형사9단독 성수제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됐다. 검찰은 정 회장에 대해서도 약식명령 때와 같은 벌금 400만원을 구형했다. 정 회장측 변호인은 “현대백화점은 대형 마트 골목상권 침해와 무관한 회사인 점, 당시 불출석 사유서를 미리 제출했고 사안을 잘 아는 임원이 대신 출석한 점, 피고인이 전과가 없는 점 등을 고려해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관대한 판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국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아 기소된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3월26일 서울중앙지법에 출두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사법부, 유통 재벌 손보기 정서 강해

정 회장은 최후 변론을 통해 “국회의 출석 요구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인데 부득이하게 불출석해 죄송하다. 앞으로 비슷한 요구가 있으면 성실히 응하겠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또 ‘국민의 대표 기관에 나가 본인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옳지 않았느냐’는 재판부의 지적에 “잘못을 인정하고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루 뒤인 27일에는 신세계 정유경 부사장(41)이 법정에 불려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7단독 서정현 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정 부사장은 같은 혐의로 벌금 400만원이 구형됐다. 변호인측은 “정 부사장은 같은 혐의로 기소된 다른 그룹 회장 등과 달리 회사 경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국회의 출석 요구가 다소 의외였다”며 “실무 경영진이 출석할 것으로 알고 불출석 사유서를 냈다”면서 선처를 호소했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58)도 조만간 비슷한 요식 행위를 거쳐야 한다. 그는 해외 출장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일정이 늦게 잡히기는 했지만, 4월26일 열리는 공판에 참석해 공소 사실을 곧바로 인정한 뒤 선처를 바랄 것으로 보인다.

유통 재벌 2세들이 줄줄이 법원에 불려오며 수난을 겪고 있다. 지난해 가을 대형 마트의 골목상권 침해가 사회 문제화되자 국회의 공정거래위원회 국감 및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받고도 거부했던 것이 빌미가 됐다. 과거 같으면 국회 증언·감정법 위반은 약식기소 후 법원 출석 없이 벌금형으로 끝날 사안이었다. 실제로 2008년과 2009년 국회 불출석 46건 중 각각 6건과 5건만이 재판에 넘겨졌다. 나머지는 대부분 무혐의나 기소중지, 약식처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국회 정무위원회 고발→검찰 약식기소’ 절차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그런데 이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서울중앙지법 단독 판사들은 지난 2월4일 약식기소된 유통 재벌 2세들 사건을 직권으로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약식기소된 재벌 총수 일가가 법원의 직권으로 법정에 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법원은 “재판부가 공소장과 증거 서류 등을 검토한 결과 직접 심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에둘러 설명했지만, 항간에는 유통 재벌 손봐주기 정서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국회에서의 증언·감정에 관한 법 제12조는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아니한 증인 등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 조항은 원래 1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규정하고 있었으나 사회 지도층의 국회 불출석, 증언 거부 등이 늘어나자 2000년 2월 지금의 형량으로 상향 조정됐다.

하지만 실무에서 국회 불출석 죄의 형량은 대부분 벌금형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법 위반 행위 자체가 집행유예 이상의 금고형을 선고하기에는 가볍고, 행정법규 위반과 비슷한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또 해외 출장 등을 핑계로 국회의 소환 요구를 요리조리 피해나가는 재벌도 문제지만, 국감 철만 되면 국회 상임위마다 재벌 총수를 국감장에 부르려고 혈안이 되는 것도 ‘국감 불출석’ 사태를 불러오는 요인으로 꼽힌다.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오른쪽)이 3월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왼쪽 사진).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가운데)이 3월2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공판을 마친 후 나가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재벌 총수들 안 봐주는 판결 기류

사정이 이런데도 법원이 유통 재벌 2세들의 법원 출석을 강제하는 정식 재판 회부 결정을 내린 것은, 법원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경제 민주화 흐름과 연관 지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최근 판결 추세를 보면 김승연 한화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속에서 볼 수 있듯이 재벌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고 과감하게 양형 기준에 따라서만 선고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법원이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판결을 지향하면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이번에 법원이 유통 재벌 2세들을 정식 재판에 회부한 데는 골목상권까지 파고든 유통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행태에 대한 사회의 비판적 시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또 최근 사정기관이 신세계 이마트의 부당 노동 행위, 신세계의 계열사 부당 지원 의혹 등과 관련해 집중 때리기에 나설 정도로 유통 재벌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따가운 만큼, 법원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관심은 법원의 향후 행보다. 벌금형으로 약식기소된 유통 재벌 2세들을 정식 재판에 회부해 공판까지 연 법원이 과연 어떤 형을 선고할지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법원 일각에서는 “정식 재판에 회부할 때는 멋있었지만, 막상 집행유예를 선고하기에는 사안이 좀 미약한 것이 아니냐”는 걱정도 나오고 있다. 만약 벌금형이 선고된다면 “그럴 거면 뭐 하려고 정식 재판에 회부했느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법원이 검찰 구형보다는 벌금액을 조금 높이는 방향으로 선고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