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오월’은 아직도 아프다
  • 광주·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5.1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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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부상자 4명의 삶 추적…총알처럼 박힌 그날의 상처 여전

33년이 흘렀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세월이 지났다. 1980년 5월, 신군부 쿠데타 세력의 퇴진을 외치던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져갔던 비극적 사건은 이제 역사의 한 장이 됐다. 5·18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영광과 상처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폭도·빨갱이로 낙인찍혔던 광주 시민들도 ‘국가유공자’로 그 지위가 복권됐다. 그렇다고 5·18이 남긴 상처가 모두 치유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10여 년 전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세월이 흘렀던 때다. 2000년 발간된 책 <치유되지 않은 5월>에서 변주나 전북대 간호학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책에 참여한 필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광주 5월의 상처가 끝났다는 데 동의하지 않고 있다. 우선 피해 당사자 및 그 가족들의 구구절절한 심신장애와 가정 파탄에 대한 증언과 과학적인 분석 결과가 그렇다.”

각계 전문가 17명이 공동 집필한 이 책은 5·18 당시 공권력의 폭력으로 인해 부상을 입었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실상을 연구하고 취재한 결과물이다. 특히 이 책에는 5·18 부상자들이 맞닥뜨린 삶의 굴곡을 사례 중심으로 분석한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1980년 5월 이후 20년이 흐른 당시, 부상자들이 상당한 수준의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음이 생생하게 드러난 것이다.

세월은 다시 흘렀다. 당시 고통스런 삶을 살던 부상자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과연 그들의 아픔은 시간이 흐르면서 치유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시사저널>은 <치유되지 않은 5월>의 편(編)저자인 변주나 교수와 5·18 부상자회 등의 협조를 받아 5·18 부상자들의 이후 10여 년 삶을 추적했다.

5·18 당시 사망한 시민들이 묻힌 광주 망월동 구묘역. ⓒ 시사저널 최준필
부상자들 “치 떨리는 세월 살았다”

책 발간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상황이었다.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고리가 사라진 경우가 많았다. 이미 세상을 버린 이도 있었다. 자신의 삶을 노출하는 것을 꺼리는 피해자들도 많아 접촉이 쉽지 않았다.

어렵게 부상자 4명의 삶과 마주했다. 2000년 이후 각 부상자들이 걸어온 삶의 모습은 같은 듯 달랐다. 그렇지만 각자에게서 5·18의 아픔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류복남씨(82·여)와 김재수씨(48) 모자는 병원에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광주보훈병원 물리치료실에 나란히 누웠다. 어머니는 무릎과 등에, 아들은 왼쪽 어깨에 시술을 받았다. 팔순 노모는 소아마비장애를 가진 아들이 치료받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도 류씨의 간에는 총탄이 박혀 있다. 1980년 5월27일 새벽 4시, 계엄군들이 난사한 총알이 집 문을 뚫고 류씨의 가슴을 뚫었다. 살아난 것이 기적일 정도의 중상이었다. 류씨가 사경을 헤맬 당시, 빈집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던 막내아들 김씨가 두 번째 변을 당했다. 계엄군이 곤봉으로 김씨를 내리쳤다. 소아마비와 언어장애가 있는 장애인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왼쪽 어깨가 탈골됐다. 연이은 악재에 경황이 없던 가족들은 김씨의 부상이 심각한 것인지 몰랐다. 치료 시기를 놓친 김씨는 왼팔을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두려운 경험으로 인해 소아마비 증세도 심해졌다.

2000년 당시 류씨는 수시로 밀려오는 통증과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애인 아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에 눈물짓는 날이 많았다. 이후 13년이 지나는 동안, 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가슴에 박힌 총탄은 수술 과정에서 납 성분이 퍼질 위험이 있어 제거하지 못한다. 거의 매일같이 병원을 오가고 약을 먹으며 고통을 다스려야 한다.

의사는 입원 치료를 권한다. 그럼에도 현재 류씨는 입원하지 않고 있다. 아들 김씨 때문이다.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간병인은 낮에만 일한다. 그 외 시간에 김씨를 돌볼 이는 어머니인 자신밖에 없다. 류씨가 자신의 병실을 나와 아들의 병실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2000년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아들 김씨는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다. 왼쪽 팔은 여전히 불편하다. 수술 시기를 넘긴 채 불구가 된 탓에 지속적인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 소아마비 증세도 그대로다. 그동안 류씨는 아픈 몸을 이끌며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일상을 반복해온 것이다. 류씨는 “저놈(김씨) 저렇게 됐지, 나 병신 됐지. 지난 13년의 세월 동안 계속 이러고 살았다.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저 운명이라 여기며 참고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류씨에게 서른세 번째 5·18을 맞이하는 소회를 물었다. “모르는 사람은 몰라. 광주 사람들은 정말 치가 떨리는 세상을 살았어. 이걸 세상 어디다 원망할 것이여. 다만 전두환·노태우 두 죄인이 어떻게 죽을지만은 꼭 보고 싶어.” 체념과 비탄이 함께 깃든 어조였다. 총탄과 곤봉으로 얼룩졌던 ‘치가 떨리는 세상’은 모자에게 여전히 진행 중이다.

5·18 부상자 중에는 류씨 모자처럼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대다수 피해자에게 고통은 평생 짊어져야 할 낙인이 되어 있었다. 박 아무개씨(44)도 마찬가지다. 1980년 5월21일 당시 12세였던 박씨는 도청 앞 골목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척추관통상을 입었다.

5월8일 광주보훈병원에서 물리 치료를 받고 있는 류복남씨(왼쪽)와 아들 김재수씨. ⓒ 시사저널 최준필
정상적 사회 활동 어려운 사람 많아

이후 하반신 마비 및 골수염에 시달려야 했다. 척추의 통증이 극심해 진통제를 하루에 20~30알씩 복용할 정도였고, 창상분비물 및 욕창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그래도 2000년 당시 박씨는 대인 기피 성향을 상당 부분 극복하고 결혼도 하는 등 삶의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13년간 박씨의 몸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취직을 하고 5·18 피해자 유관 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생활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으나 건강 문제로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최근 들어 박씨의 건강 상태는 크게 나빠졌다.

박씨와 절친한 사이인 5·18 부상자회 관계자는 “요즘 몸에 경련이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전했다. 그런 탓인지 박씨는 <시사저널>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그는 완고했다. 박씨의 침묵 뒤로 지난 30여 년에 걸친, 그리고 앞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고통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정태기씨(53)는 집에 있었다. 그는 광주 산수동 자택에서 아버지와 함께 산다. 지난 1990년 국가로부터 받은 보상금으로 산 집이다. 그가 세상을 버텨 나가는 근거지다. 13년 전과 같았다. 정씨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낸다.

1980년 당시 그는 전남대 학생이었다. 5월18일 금남로를 지나다 친구와 함께 경찰에 연행됐다. 사복 경찰관은 시위에 참가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려 했다. 평소 정씨는 학내 시위 세력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았다. 그날도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손톱 밑에 흙가루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씨를 체포했다. 정씨는 곤봉으로 무수히 머리를 난타당했다. 졸지에 ‘시위자’가 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이후 정씨는 대학을 휴학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 그러나 자신이 정밀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는 사실을 몰랐다. 취직 준비와 고시 공부 등을 하던 정씨는 1988년 5·18 청문회를 계기로 정신분열증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정신질환 때문에 정씨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됐다.

2000년 당시 정씨는 3주 간격으로 정신과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안면이 떨리고 치아가 아파오는 등 육체적 후유증이 컸다. 당시 그는 “일을 갖고 싶지만 아무데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취직은 물론 결혼도 못 한 채 이대로 늙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정씨는 어떻게 지냈을까. 당시에 비해 많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약물의 도움으로 스스로의 정신을 제어할 정도는 된다. 그러나 정상적인 수준의 사회 활동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화산이 폭발한 이후의 상태다.” 정씨는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5·18 이후 그의 심신은 휴화산이 되었다. 정상적인 생활에 필요한 육체적·정신적 에너지가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늘 집 안에 있다.

5·18 당시 머리 부상을 입었던 정태기씨(왼쪽)와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전 아무개씨의 묘. ⓒ 시사저널 최준필
마음속 깊은 곳엔 ‘총과 칼’ 있어

정씨는 의욕적으로 살고자 했다. 2004년 사회복지사인 누나의 권유로 광주대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다. 공부는 쉽지 않았다. 건강 때문에 학업에 열중할 수 없었다. 그래도 2007년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1급 고시에도 합격했다. 사회복지사로서의 ‘제2의 인생’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정씨의 마음은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대학 졸업 즈음에 찾아온 큰누나의 죽음은 큰 심리적 타격을 줬다. 치매노인 전문 요양원에 취직했으나, 열흘 정도 근무하다 한계를 느끼고 그만뒀다. 주치의는 정씨가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다. 정씨는 가족들과 고등학교 친구 소수를 제외하고는 외부와 거의 접촉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정씨는 “아직도 마음속 깊이 들어가면 총과 칼이 있다. 해결하지 못한 분노가 있다”고 말했다. 폭력의 기억과 그에 대한 분노는 정씨로 하여금 내면에 과도한 에너지를 쏟게 한다. 이 때문에 외부 활동에 동원할 수 있는 활력이 부족하다.

정씨는 매일 약을 먹는다. 정신분열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한 내과 약 등이다. 육체적인 고통도 계속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금씩은 다 아프다고 했다. 머리에는 곤봉에 맞은 혹과 상처가 남았다. 치아에도 문제가 있고, 왼쪽 팔도 불편하다.

정씨의 마음에는 모순적인 감정들이 교차한다. 일자리를 갖고 결혼을 하는 등 보통의 행복을 누리길 갈망하지만, 이를 떠올리는 순간 벽이 가슴에 박히는 느낌을 받는다. 심리적 부담감 때문이다. ‘행복해지면 안 된다’는 주문에라도 걸린 것 같다고 한다. 그래도 정씨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으려 한다. 그는 “일상 속에서 조금씩 해결해나가고 싶다. 당장 무엇을 하는 것 이전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정신적·육체적 힘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5·18 부상자 중에는 정씨처럼 정상적인 사회 활동이 어려운 사람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1980년 이후 군부 독재가 종식되기까지 약 10년의 기간 동안, 이들의 사회적 기반이 크게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폭도’라는 이유로 취직을 거부당한다든지, 폭력에 의한 충격으로 알코올에 의존하는 등 삶이 망가진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전 아무개씨(사망 당시 47세)는 묘지에 있었다. 그는 <치유되지 않은 5월>이 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0년 12월 사망했다. 전씨는 5·18 당시 받은 구타로 왼쪽 어깨뼈와 왼쪽 무릎을 다쳤다. 죽기 전까지 물리 치료와 진통제 투약에 의존했다. 1980년 이후 계속적인 반군부 독재 투쟁에 참여한 전씨는 직장도 잃었다. 울분을 견디지 못해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간질환과 만성위염을 앓았다. 여기에 당뇨까지 겹쳐 건강은 극도로 악화됐다. 과거 그를 진료했던 외과의사 이민오씨는 “5·18 이후 삶이 망가지면서 가족들과도 떨어졌다. 아내와 이혼해 혼자 살았다. 사망 당시에도 외롭게 지내는 상태였다”고 전했다. 전씨는 국립 5·18 민주묘지 4구역에 묻혔다.

말 않고 기억 못 한 역사는 되풀이된다

5·18 부상자들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1988년 국회 청문회 이후 1990년 제정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배상이 이뤄졌다. 그 보상과 지원 수준이 미흡하다는 여론이 있어 2002년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추가로 제정됐다. 교육·취업·의료 지원 등 유공자들의 희생에 상응하는 예우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충분한 수준인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5·18을 둘러싼 세간의 인식에도 세월의 이끼가 묻었다. 시민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옛 전남도청 주변은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사로 인해 먼지가 자욱하다. 국가보훈처는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수 없다는 방침을 밝혀 논란을 낳았다. 일부 극우 세력은 5·18을 ‘폭도에 의한 반정부 행위’로 규정하며 민주화운동으로서의 의미를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의 폭력이 남긴 상흔은 깊다. 5·18 이후 33년, 고통으로 점철된 일상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다. 해가 바뀌고 5·18이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물러나는 동안 그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의 더께도 점점 쌓여간다. 내내 고단한 삶을 이어가다 세상을 버린 이들도 있다. 역사에 의해 고통받은 이들 개개의 죽음을, 역사는 기록하지 않는다.

5·18 묘역을 찾은 방문객들은 방명록에서 “말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역사가 안긴 고통을 스스로의 잔인한 운명으로 체념하고야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이들 앞에서,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기억은 지금 이 역사를 어떻게 기록해나가고 있는 것일까. ‘오월’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 시사저널 최준필
부상자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혜택을 달라는 게 아니다. 생활에 안정을 갖기 위한 최소한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회원이 많다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의 고통만이 아니라 부상자들을 돌보는 가족 전체의 고통이라는 점에서, 5·18 유공자들의 최소 생계를 보장할 만한 조치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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