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FBI, 서로 물 먹이기
  • 김원식 │뉴욕 통신원 ()
  • 승인 2013.05.15 10: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스턴 테러 이후 미국 권력 사정기관 파워게임 심해져

4월29일 뉴욕타임스가 내놓은 특종은 미국 CIA(중앙정보국)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뉴욕타임스는 “CIA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에게 지난 10년 동안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비자금을 현금으로 지원해왔다”고 폭로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카르자이의 수석 보좌관을 지낸 칼릴 로만은 이런 자금을 두고 ‘고스트 머니’라고 표현했다. 그는 “비밀리에 반입되고 비밀리에 (유령처럼) 사라졌다”고 말했다.

CIA를 궁지에 몰아넣은 이 기사에는 취재원으로 익명의 ‘미국 정부 관리’가 등장했다. 이런 수준의 정보를 알 만한 정보원은 극히 제한적이라서 미국 FBI(연방수사국)를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다. 지금 시기에 FBI가 CIA를 물 먹였다는 의심은 정황상 가능했다. 최근 미국 정보기관 사이의 견제와 불신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공을 떨어뜨렸다(drop the ball).” 야구 경기에서 뜬 공을 놓치는 ‘치명적 실수’를 뜻하는 문구를 요즘 미국 언론들이 자주 쓰고 있다. 그런데 스포츠면이 아닌 정치면에 사용되고 있다. 이번 보스턴 폭탄 테러를 주도한 차르나예프 형제에 관한 정보는 해외 정보기관들이 미국 안보기관들에 직접 제공해줬다. 그럼에도 테러를 막지 못했으니 그 실수를 비꼬는 데 적절한 용어인 셈이다. 예를 들어 수년 전부터 러시아 보안 당국은 사망한 용의자인 타멜란 차르나예프(26)를 주의하라고 CIA에 전달했다. 타멜란이 러시아령 이슬람 자치 공화국인 다게스탄을 방문한 사실을 국토안보부는 파악했지만 FBI는 알지 못했다. 보스턴 테러 후 정보기관들은 거센 비난에 직면하고 있다. 마이클 맥콜 하원 국토안보위원장(공화당·텍사스)은 “국토안보부가 FBI에 타멜란의 출국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것 같다”고 밝히면서 FBI와 CIA가 제 역할을 다했는지 조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보스턴 테러 이전부터 FBI와 CIA는 크고 작은 일로 얽혔다. 복기해보면 2012년 11월은 CIA에게 치욕스런 날이다. 11월9일 사임한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전 CIA 국장의 불륜 사건에 FBI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FBI는 지난해 5월께 누군가 자신을 위협하는 블랙 메일을 보내고 있다는 여성의 신고를 받고 조사를 벌였고, 이 메일을 보낸 주인공이 전기 작가 폴라 브로드웰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연스레 메일 계정을 조사하면서 퍼트레이어스와 불륜 관계였다는 것도 파악했다.

FBI는 이 사건을 6개월 가까이 지난 11월6일 국가정보국(DNI)에 보고했다. 만약 이전에 알려졌다면 재선에 도전하고 있던 오바마 대통령에게 커다란 악재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여전히 CIA 전 국장에 관한 수사의 키는 FBI가 쥐고 있다. 4월에도 FBI는 퍼트레이어스의 얘기를 청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FBI는 국가의 중요 정보를 불륜 상대에게 전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품고 있는데,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사람에게는 치욕적인 혐의다.

꼭 퍼트레이어스 문제가 아니더라도 오바마 재선 이후 CIA에는 악재가 꼬리를 물었다. 미국 정부는 씨퀘스터(연방정부 예산 삭감)에 따라 정부 세출 강제 삭감을 실행하고 있다.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 장관은 “휴민트(HUMINT, human intelligence)를 비롯해 정보 활동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는 것은 미국에 치명적인 손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CIA가 의회와의 관계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사정이 나아지긴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최근 워싱턴D.C.에 본부를 두고 있는 FBI의 본부 이전 문제도 CIA를 난감하게 하고 있다. 후보지로 가장 유력한 곳은 유치에 가장 열성적인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카운티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 CIA 본부도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다. 페어팩스카운티는 FBI 본부가 이전하게 되면 정보기관이 한곳에 모이면서 정보 교환과 조직 간의 조정이 쉬워질 것임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 AP 연합
오바마 “FBI는 잘못되지 않았다” 두둔

그런데 워싱턴포스트는 “FBI가 옮기려는 지점에 이미 CIA의 비밀 시설이 건설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몇 년 전 예비 조사를 하러 갔던 주 정부 고위 관리의 말을 빌려 “그곳에 지하 깊은 곳까지 CIA의 시설이 건설되고 있고, FBI 본부를 이전할 경우 재건축 및 기초 공사 비용이 매우 커질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만약 CIA 건물이 정말로 위치해 있다면 FBI 본부의 이전은 불가능해지고 이것은 유치에 열을 올렸던 버지니아 주 정부나 FBI를 난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퍼트레이어스 전 국장의 추문과 예산 삭감으로 힘겨워진 CIA는 이번 보스턴 테러 사건의 실수로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보스턴 테러에 대해서는 FBI도 물론 궁지에 몰려 있다. 두 정보기관의 불협화음에 대해 오바마 정부는 조사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4월30일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보스턴 테러에 관한 사전 정보가 어떻게 취급되고 있었는지 조사하는 TF팀을 발족하겠다고 밝혔다. TF팀의 목적은 테러 방지 실패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겠지만, 오바마 정부는 FBI의 대응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서 책임 추궁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전직 국장의 불륜과 예산 삭감에 직면하고 아프가니스탄에 비자금 제공 사실이 드러나면서 난관에 처한 CIA, 그리고 그런 CIA의 수장을 조사하고 보스턴 테러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FBI. 미국 정보기관은 지금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불협화음만을 내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