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영토 전쟁 제물 된 오키나와의 슬픔
  • 모종혁│중국 전문 자유기고가 ()
  • 승인 2013.05.2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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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 왕조 번속국…메이지 정권이 류큐 왕국 점령

“오키나와의 전신인 류큐(琉球) 왕국은 명(明)·청(淸) 왕조의 번속국이었다. 1879년 류큐를 강제로 병탄한 일본의 행위는 불법적 강탈이었다. 중국과 일본 간 미해결 현안으로 남은 류큐 문제를 재논의해야 한다.” (중국 인민일보)

최근 중국에서는 오키나와 귀속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시작은 5월8일 인민일보에 실린 사설이었다. 5월14일에는 중국 군부 내의 강경파 장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뤄위안 소장은 반(半)관영 통신사인 중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키나와는 중국의 일부분이지 일본의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전략문화촉진회 비서장이기도 한 뤄 소장은 인민해방군의 대표적인 이론가다.

중국 대륙에서 이런 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과 때를 같이해 5월15일 오키나와에서는 독립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가 결성됐다. 일부 정치인, 대학교수, 사회운동가 등이 조직한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가 그것이다. 이 학회는 주민투표를 통해 과반수 찬성을 얻어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의 주장이 잇따르고 있는 미묘한 시점에서 나온 움직임이다. 중국은 왜 갑자기 일본 땅인 오키나와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4월6일 오노데라 야쓰노리 방위상의 오키나와 미군기지 방문에 맞춰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기지 이전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 EPA 연합
류큐 왕국, 중·일 사이에서 중립국 지향

오키나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라진 왕국 류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인 규슈(九州)와 타이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군도다. 크고 작은 160여 개 섬으로 구성돼 있는데,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9개다. 각 섬에는 각기 다른 씨족 사회가 형성되어 오랫동안 통일된 국가가 없었다. 12세기부터 세력을 모으기 시작한 몇 개의 부족 집단이 서로 다투다가 1429년 통일 왕국이 성립됐는데, 이것이 류큐 왕국이다.

류큐는 오키나와 중심 섬인 나하(那覇) 동부의 슈리(首里)에 도읍을 정해 기초를 다졌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했는데, 수시로 조공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았다. 16세기 류큐는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일본에게 류큐는 눈엣가시였다. 1609년 명나라가 쇠락한 틈을 타 사쓰마(薩摩) 번이 류큐를 침공했다.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백전노장의 조총 부대를 작은 섬나라 류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사쓰마 번과 에도(江戶) 막부의 신하를 자처하고 조공을 바치는 선에서 독립을 유지했다. 청나라가 들어서고 서구 열강의 일본 진출이 잦아지자 류큐는 다시 과거의 영화를 되찾았다. 청과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쳐도 왕국은 부유했고, 주민 생활은 넉넉했다. 그러나 류큐는 오늘날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을 지향해 제대로 된 군대를 두지 않았다.

이런 안이한 국방 정책은 스스로의 패망을 재촉했다. 1879년 일본 메이지 정권은 단 500명의 병력을 보내 류큐를 점령하고 류큐 왕을 폐위시켰다.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해상왕국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이후 일본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해 자국 영토로 삼았다. 당시 청나라는 일본의 류큐 병탄을 항의했지만 이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청 스스로 서구 열강의 침략을 버텨내기 버거웠던 탓이다. 일본인이 된 오키나와 주민들도 큰 불만을 표출하진 않았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국력이 욱일승천하면서 일본의 신민이 된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2차 세계대전은 오키나와에게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의 본토 진입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 전역을 요새화해 지연작전을 벌이려 했다. 이 때문에 1945년 3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무려 3개월이나 악전고투해야 했다. 전투에 참전할 수 있는 군인 수가 7만여 명에 불과하자, 일본 군부는 만 14세에서 70세까지의 모든 오키나와 주민을 총동원했다.

이런 일본의 만행으로 인한 희생자 20만여 명 중 12만여 명이 무고한 오키나와 주민이었고, 1만여 명은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이었다. 종전 후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1948년 히로히토 일왕은 맥아더 점령군 총사령관에게 오키나와의 일본 영유권만 인정하면 미군이 25년에서 50년, 원하면 그 이상 오키나와를 점령해도 좋다고 제의했다.

중국이 귀속 문제 재논의를 들고 나온 배경에는 이런 오키나와의 고단한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 실제 류큐 왕국은 건국 이래 일본보다는 중국과 가까웠고 400여 년간 줄곧 중국의 번속국임을 자처했다. 인류문화학상 오키나와 주민 대다수가 중국 혈통인 점도 지적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필자와 만난 중·일 관계 평론가 왕진쓰(王錦思) 씨는 “DNA를 분석해보니 오키나와 주민의 선조는 저장(浙江)·푸젠(福建)·광둥(廣東)에서 건너간 중국계”라며 “슈리에 있는 류큐 왕국 건축물은 중국 양식과 똑같고 류큐의 문화 풍습은 일본보다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법학자들은 더욱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왕한링(王翰靈) 중국사회과학원 해양법·해양사무연구센터 주임은 “1946년 맥아더는 일본의 행정구역을 4대 섬 및 북위 30도 이북의 열도로 규정하면서 오키나와를 제외했다”며 “미국 정부도 오키나와를 신탁통치 지역으로 설정해줄 것을 유엔에 요청해 1947년 승인받았는데 이것은 일본의 통치권이 국제법상 박탈됐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정식 확정됐다. 그 후 미국은 오키나와에 대한 지배를 개시했고, 1972년 일본에 되돌려주었다. 왕 주임은 “유엔 헌장에는 신탁통치하 영토 변경과 개정에 대해 반드시 유엔 안보리나 총회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해놓고 있다”며 “미국은 이를 지키지 않고 미·일 간 반환 조약에 따라 돌려줘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일본 정치인들, 오키나와 반감 무시

여기에 중국측은 일부 오키나와인들이 오랫동안 독립을 추구한 점도 주목하고 있다. 1970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류큐독립당을 창당해 완전 독립을 지향했다. 2005년부터 류큐 대학에서 매년 실시하는 여론조사에서는 독립에 대한 지지율이 20~25%를 오르내리고 있다. 스스로를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이라고 여기는 주민도 30~40%나 된다.

이는 반환된 이후 일본의 일방통행식 지배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감이 작용한 결과이다. 일본은 주민들이 반대하는데도 자위대 주둔을 강행했다. 나하의 20%를 차지하는 미군기지는 주민 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다. 수시로 일어나는 미군의 강간 사건은 오키나와인들을 분노케 했다. 그러나 미·일 동맹을 중시하는 일본 정치인들은 오키나와의 요구와 불만에 대해 귀를 막고 있다.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각 정당이 선거마다 들고 나왔지만 번번이 공약(空約)에 그쳤다.

중국도 오키나와 영유권을 확보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가 오키나와의 부속 열도임을 주장하자, 그 논거에 대한 반박을 위해 오키나와를 이용할 뿐이다. 결국 오키나와 문제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 선전·선동을 구사하는 국제 정치의 냉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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