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싸구려지만 근엄한 너보다 당당해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5.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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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 앞세워 주류 문화 위협하는 B급 문화 역사

수많은 매체에서 ‘B급 문화’라는 말이 사용되지만 정작 B급 문화가 뭐냐는 물음엔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박찬욱, 김기덕, <도둑들> <무한도전> 등 하도 많은 키워드가 B급이라는 이름으로 해설되니 이 세상에 B급 아닌 게 뭐냐는 반문도 나온다. 최근엔 <젠틀맨>과 관련한 선정성 논란이 일어나자 B급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함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떴지만, 그 의미가 애매한 B급 문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B급 문화는 원래 그 정의가 애매한 말이다. 하나의 경향성 정도로 보면 되겠다. 처음 사용된 건 1930년대 미국 영화 산업에서였다. 당시 대형 영화와 함께 끼워 팔기 위해 만든 싸구려 동시 상영 오락영화를 B급 영화라고 했다. 그 내용은 주로 공상과학, 갱스터, 공포스릴러 등이다. 이로부터 저예산에 조잡한 완성도, 빤한 오락적 구성, 강한 자극성을 보여주는 것들을 B급이라고 통칭하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한 장면. ⓒYG엔터테이먼트 제공
영화 의 한 장면. ⓒ쇼박스미디어플렉스 제공

싸구려에서 자유·개성·창조로 의미 확장

대규모 흥행을 노리는 주류 상업물은 사회적 비난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표현 수위를 조절한다. 요즘도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블록버스터엔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장면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에 저예산 B급 영화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고, 따라서 사회의 일반적 기준보다 더 강한 표현이 가능했다.

저항 문화도 주류 문화와는 다른 문화인데, B급 문화는 저항 문화와는 다르다. 저항은 주류 시스템에 글자 그대로 저항하면서 주류 문화를 바꾸려고 한다. 반면에 B급 문화는 동시 상영용 싸구려 오락영화라는 태생적 정체성에서 알 수 있듯이 주류 문화를 개혁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재미가 중요할 뿐이다.

1950년을 전후해 미국에서는 대형 스튜디오가 더는 끼워 팔기용 B급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회사가 제작·배급·상영을 모두 하는 독점적 스튜디오 시스템이 반독점법의 철퇴를 맞았기 때문이다. 스튜디오는 자신의 배급·상영망을 돌리기 위한 싸구려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게 됐다.

그러자 수많은 독립영화 제작사가 저예산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로부터 저예산 B급 영화에 대규모 흥행물에선 볼 수 없는 작가의 자유와 개성, 창조적 역동성이라는 의미까지 생겨났다. 특히 프랑스의 비평가들이 싸구려 오락물 제작자 정도로나 치부되던 할리우드 B급 감독들을 작가로 재발견하면서 B급의 가치가 수직 상승했다. 그리고 주류 문화가 아닌 하위문화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B급 문화라는 말이 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로저 코먼은 폭력성·선정성만 있다면 시나리오의 내용 자체엔 거의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많은 저예산 영화를 제작해 B급 영화의 제왕으로 불렸다. 이런 식의 B급 시스템은 대규모 흥행을 위해 신중한 기획을 하고 대중의 일반적 취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주류 시스템보다 젊은 작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이런 구조에서 훈련한 사람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영화 감독인 마틴 스콜세지와 코엔 형제, <대부>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터미네이터>의 제임스 캐머런 등이다.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 <스파이더맨>의 셈 레이미도 B급 영화 출신이다. 일본에선 로망포르노라는 에로영화 장르가 젊은 작가들에게 비슷한 기회를 제공했는데, <쉘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같은 작가가 태어났다.

마틴 스콜세지의 국제적 명작 중 하나인 <택시 드라이버>는 피가 줄줄 흐르는 마지막 액션 장면을 통해 B급 감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주류 흥행 영화는 피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선혈이 낭자한 폭력성은 1980년대의 대표적 동시 상영 영화였던 홍콩 느와르(<영웅본색> 등)로 이어지고 나중에 ‘헤모글로빈의 시인’으로 불린 쿠엔틴 타란티노로 연결된다. 박찬욱이나 김기덕도 주류 감성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폭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B급 감성의 계보에 들어간다.

한국형 B급 문화는 등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 시사저널 사진 자료
주류 질서 튼튼해야 탈주하는 B급도 유쾌

B급의 선정성·폭력성·공상과학·엽기성 등을 종합 선물 세트로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뮤지컬인 <록키 호러 픽쳐 쇼>

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선 상영 금지를 당했다가 민주화 이후에 해금됐다. 여기서 민주화와 B급 영화가 연결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B급에 기존 주류 시스템의 권위주의·엄숙주의·억압·가식·허위·이중성 등을 조롱하고 전복한다는 의미가 강해졌다. 근엄한 고위 인사가 ‘여대생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한편에서 선정성을 검열하는 나라에서는, 선정적인 표현이 오히려 더 정직하며 현실을 고발하는 측면이 있다는 뜻에서다.

한국형 B급 문화는 <선데이서울> <월하의 공동묘지> 등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다 1980년대에 아동용 특수 촬영 액션물인 <우뢰매>나 트로트 메들리 등으로 이어지고, 1990년대엔 <젖소부인 바람났네> 등의 에로비디오로 이어졌다.

1990년대 이후 문화 담론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솔직한 폭로와 주류 질서 전복이라는 B급의 미덕이 찬양됐고, 근엄한 척하지 않는 조잡한 오락성이 대중에게 환영받았다. 특히 2000년대에 만개한 인터넷 시대와 B급 문화는 절정의 궁합을 자랑했다. 네티즌은 성역 없고, 가식 없고, 품위 없는 웃음거리를 원했는데 그 귀결은 결국 B급 문화였다. 네티즌은 이것을 ‘엽기’라고 했고, 데뷔 초 엽기 가수라고 불렸던 싸이는 한국의 B급 문화가 만들어낸 최대 히트 상품이 되었다.

과거에는 말할 수 없었던 강한 이야기들을 하는 <라디오스타>를 비롯한 요즘 막말 토크쇼들, 촌스러운 복장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강호동의 <무릎 팍 도사>, 19금 MC 신동엽 등이 예능에서의 B급 스타일 것이다. 조악하고 자극적인 오락성으로 일관하는 주말드라마·일일드라마·아침드라마도 B급화돼 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가요계의 주류가 돼버린 아이돌도 사실은 하위 장르인 B급 출신이었다. <도둑들>을 통해서는 이제 B급에서도 1000만 관객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낸시 랭은 미술인과 B급 예능인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정치·사회 평론도 ‘딴지일보’가 B급 평론의 포문을 연 이래 <나는 꼼수다>에 이르러선 주류 미디어에 버금가는 수준까지 컸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의미를 따지지 않고 가벼운 오락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커졌는데, 이것이 2000년대 이후 전개된 상업주의와 맞물려 자극성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이젠 모든 것이 자극적이고 오락적인 것으로만 통한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싸이와 함께 등장한 B급 찬양론은 위험하다. 지금은 B급을 찬양할 때가 아니라, 의미를 찾고 주류 질서를 튼튼하게 세워야 할 때다. 주류 질서가 튼튼해야 거기에서 탈주하는 B급도 더 유쾌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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