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섬들이 ‘블랙머니’ 블랙홀
  • 이유영│동북아조세정의네트워크 대표 ()
  • 승인 2013.06.12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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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조세 회피처 30여 곳…소득 높지만 국민 생활 질 떨어져

최근 조세 회피처에 세워진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가 연일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조세 회피처에 회사를 설립해 ‘절세’를 하는 것은 탈세와는 다르다. 하지만 최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에 세워진 페이퍼컴퍼니를 관리해주는 회사에서 흘러나온 250만건의 전자 문건 속에 들어 있는 한국인의 이름은 합법적인 절세 전략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BVI에만 수만 개의 페이퍼컴퍼니가 등록돼 있다는 점이다. 이들 페이퍼컴퍼니를 방패막이로 조세 회피처에 숨어들어간 돈은 천문학적이다. 20세기 말부터 신흥 공업국에서 유럽 대륙까지 초토화시킨 헤지펀드의 ‘실탄’도 조세 회피처에 숨어든 검은돈으로 추정된다.

ⓒ 일러스트 배중열
서유럽에도 조세 회피처 있어

조세 회피처는 인지대 수입이라도 올리려는 카리브 해의 낙후된 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같이 서유럽 무역의 중심지에 있는 나라도 조세 회피처다. 서유럽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늦은 아일랜드 같은 나라, 아시아권에서는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처럼 무역으로 먹고사는 국가가 조세 회피처다. 왜 이런 나라들은 조세 회피처를 제공하는 것일까. 조세 회피처를 제공하면 떼돈을 버는 것일까.

조세 회피처는 납세 의무를 피할 수 있거나 조세 비용을 현격히 줄일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들은 조세 전략상 실현할 수 있는 편익 유형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첫째는, 역외 비즈니스에 대해 법인세, 상속세, 자본소득세 등을 전혀 부과하지 않는 무조세 지역이다. 최근 한국계 페이퍼컴퍼니 관련 정보공개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를 포함해 카리브 해 권역에 소재한 조세 회피처가 이에 해당한다. 바하마 제도(The Bahamas)와 케이먼 제도(Cayman Islands)도 그런 곳이다. 중동의 두바이, 유럽의 모나코 등도 대표적 무조세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경우 역외 비즈니스 법인에 한해 무조세 혜택을 주는 것이 통상적이다. 면제 기업(Exempted Company), 국제 기업(International Business Company), 역외 기업(Offshore Company)이라 칭하는 역외 비즈니스 법인은 역내에서 행해지는 영업 활동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즉, 역내에 고정 사업장(permanent establishment)이 없이 우편사서함회사(mail box company) 형식의 페이퍼컴퍼니를 등록시켜놓고 역외 비즈니스 활동에서 발생한 소득을 이전하거나 신설 법인을 설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내에서 실질적 기업 활동을 하는 법인에 대해 이러한 혜택을 줄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이를 허용할 경우 자국의 조세 기반이 무너지고 시장 건전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조세 경쟁 체제 기반을 역내 기업과 역외 기업에 대해 차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을 링펜싱(ring-fencing)이라 부른다. 역내 시장과 재정을 울타리로 두르듯 보호하고 울타리 밖의 역외 기업에 대해서만 무조세 혜택을 제공하는 특징을 묘사한 것이다. 링펜싱 행위는 해당 조세 회피 체제의 이중성과 유해성을 보여준다. 조세 회피 체제를 역내 기업에 대해 전면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유해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타국으로부터 절세 또는 탈세 목적으로 도피하는 역외 기업은 적극 유치하겠다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역내 발생 소득에 대한 과세율은 통상적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역외 발생 소득에 대해서는 현격히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조세 회피처를 들 수 있다. 아시아 권역의 홍콩·싱가포르나 아프리카의 세이셀(Seychelles), 중남미의 파나마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홍콩·싱가포르는 한국을 포함한 중국 진출 기업이 중국 현지 생산 및 투자 활동에서 발생한 수익을 일차적으로 이전하는 보관처로 활용되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 저임금을 활용해 번 돈을 홍콩·싱가포르에 설립된 법인에 이전하거나 송금해 최소의 세금을 낸 후 이를 다시 카리브 해 권역의 무조세 지역에 최종적으로 송금 또는 이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소득세 등 특화된 조세 분야에서 조세 편익(tax advantage)을 주거나 당국과의 협상을 통해 세율 자체를 낮출 수 있다. 키프러스·영국·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오스트리아·아일랜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 아일랜드 정부가 애플의 미국 외 영업 활동의 중핵을 이루는 다수의 법인을 유치하면서 애플에 2%대의 낮은 세율 혜택을 제공했다는 것이 미국 상원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났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외환은행 매각 차익에 대한 조세 부과가 어렵게 되면서 해당 펀드의 설립지인 벨기에가 관심을 끌었다.

지난 6월3일 인터넷 매체 뉴스타파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 작업을 통해 확인한 ‘조세 회피처 프로젝트’ 4차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조세 회피처

조세 회피처의 경우 역외 자금과 비즈니스를 유치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조세정의네트워크 등 글로벌 NGO와 연구자들에 따르면 미국 자체가 세계 최대의 조세 회피처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부터 미국 역내에 고정 사업장을 둔 법인에 대해 공격적인 규제 완화와 더불어 조세 회피가 가능한 체제를 도입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우선 미국 연방법 차원의 회사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국은 UCC(Uniform Commercial Code)라 불리는 일종의 회사법 모델이 민간에서 마련된 후 이를 원용해 각 주가 자체적으로 회사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개별 주들은 기업 유치를 위해 회사 설립 및 운영, 청산 등의 기준을 느슨하게 했다. 델라웨어 주가 이를 선도했으며 실제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포춘> 선정 500대 기업 중 대다수가 델라웨어 주에 설립된 이른바 델라웨어 법인(Delaware Corporation)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버몬트 주의 경우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전 주지사 하워드 딘이 버뮤다가 독점하고 있던 역외 조세 도피형 캡티브 보험을 적극 유치해 이를 버몬트 주의 대표적 산업으로 육성했다. 2004년 민주당 후보 경선 당시 존 케리는 하워드 딘에 대해 버뮤다가 장악하고 있는 ‘추악한 조세 탈세 도구인 역외 보험 산업’을 역내로 유치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버몬트를 ‘산세 수려한 버뮤다(a hilly Bermuda)’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경선이 끝난 후는 물론 오바마가 집권한 민주당 정부에서도 이를 제어하기 위한 연방정부 차원의 시도는 없었다.

실제 조세 회피처 체제 구축을 통해 자국 시민이 어떠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세 회피처의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1만8000달러로 비조세 회피처의 9600달러를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조세 회피처형 역외 금융 산업이 서비스 산업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공익에 기여할 것이라는 얘기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집계된 GDP 자체의 공신력이 없다. 설령 소득이 높다 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한 관련 업계 종사자가 이를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어깨를 견주는 조세 회피처 케이먼 제도의 경우 섬 전체를 통틀어 영화관은 단 한 곳에 불과하다.

영국 근처에 소재한 대표적 조세 회피처인 영국왕실보호령 3개국의 경우 역외 관련 산업이 국내 경제를 압도하면서 일반 시민의 주거 및 복지 수준이 현격히 떨어져 내부적으로 조직적인 반대 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일랜드와 키프러스의 경우 역외 조세 피난 서비스 산업이 무너지면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영국 식민지들이 조세 회피처로 변모

조세 회피처에 대해서는 영국의 책임과 미국 다국적 기업의 적극적 편승 행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 대륙의 전통적 조세 회피처를 제외하고 대다수 조세 회피처는 1930년대 이래 영국의 식민지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영국 식민청(colonial office)은 금융자본의 적극적 역외 조세 회피처 건설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소규모 도서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을 조세 회피처로 키워온 영국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마팔라(Dharmapala)와 하인스(Hines)의 2009년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전 세계 30여 조세 회피처가 영국식 의회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경우는 1을 기준으로 했을 때 0.61이었다. 비조세 회피처의 경우 이 수치는 0.30에 불과하다. 조세 회피처 중 영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경우는 0.69, 비조세 회피처의 경우는 0.26이다. 조세 회피처가 영국의 법제를 기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수치는 0.72에 이른다. 반면 비조세 회피처의 경우 그 수치는 0.30으로 떨어진다.

카리브 해 권역의 대다수 조세 회피처의 최고법원은 영국의 추밀원(privy council)이다. 또한 대다수 조세 회피처는 역외 탈세의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인 신탁회사 설립 운용과 관련해 그 기반을 영국의 신탁회사인정법(Recognition of Trusts Act)에 두고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조세 회피처에서 미국 기업들은 평균적으로 4.04%의 유효 세율을 적용받고 있다. 비조세 회피처에서의 세율은 21.1%로 수직 상승한다. 미국발 해외 직접투자(FDI)는 실질적 경제 투자처가 아닌 8개국에 불과한 조세 회피처에서 49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비조세 회피처 47개국에서 이뤄진 해외 직접투자는 280억 달러에 불과했다.

국제적으로 조세 회피처 문제 해결에 나서는 지금, 영국과 미국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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